내가 읽은 시

이병률<당신이라는 제국>

미송 2012. 12. 16. 09:29

 

 

당신이라는 제국 / 이병률

 

이 계절 몇 사람이 온몸으로 헤어졌다고 하여 무덤을

차려야 하는 게 아니듯 한 사람이 한 사람을 찔렀다고

천막을 걷어치우고 끝내자는 것은 아닌데 봄날은 간다

 

만약 당신이 한 사람인 나를 잊는다 하여 불이 꺼질

까 아슬아슬해할 것도, 피의 사발을 비우고 다 말라갈

일만도 아니다 별이 몇 떨어지고 떨어진 별은 순식간

에 삭고 그러는 것과 무관하지 못하고 봄날은 간다

 

상현은 하현에게 담을 넘자고 약속된 방향으로 가자한다

말을 빼앗고 듣기를 빼앗고 소리를 빼앗으며 온몸을

숙여 하필이면 기억으로 기억으로 봄날은 간다

 

당신이, 달빛의 여운이 걷히는 사이 흥이 나고 흥이 나

노래를 부르게 되고, 그러다 춤을 추고, 또 결국엔 울게

된다는 술을 마시게 되더라도, 간곡하게 봄날은 간다

 

이웃집 물 트는 소리가 누가 가는 소리만 같다 종일 그

슬픔으로 흙은 곱고 중력은 햇빛을 받겠지만 남쪽으로

서른세 걸음 봄날은 간다

 

 

바람의 사생활을 떠올리게 하는 시인. 시인의 책갈피에선 언제나 바람냄새가 나왔다. 절절하여 곧 죽을 것 같은 아름다운 향기. 오래전 李箱도 말했던가, 사생활이 없는 사람은 너무도 불쌍한 사람이라고. 문득 李箱이 연상되자 금홍이까지 보고 싶다. 원색적인 솔직함으로 시인들은 살아서도 죽어가면서도 별을 노래한다. 별이 머리위에 떨어져 우박이 되어도 그 채찍 아래 한 점 부끄럼 없기를 기도한다. 그러고 보면 바람 아닌 사람이 어디 있나. 그러고 보니 세상에 시인 아닌 사람이 없네. 만나고 헤어지는 일이 바람의 일이요 여행의 목적이니 서글프다. 그래서 이왕 만남일 바에야 화장터 가마 속으로 함께 들어가는 두 시신의 만남쯤 되지 않을래, 그러지 않을래... 자신하는 일!(그러나 거짓말). 이 모든 것들이 결국 ‘당신이라는 제국’ 안에서 일어나는 내 마음의 사소한 소요(?), 헤어지는 일의 사소하지 않음을 말하기 위해 무슨 말을 저렇게 모았다 흩으렸을까. 그러는 당신도 나도 ‘이상한 나라 엘리스’에 나오는 체셔의 고양이다. 사라져 버렸지만, 그럼에도 사라지기를 멈추지 않는 고양이의 미소다. 자주 미소하진 마라. 당신의 미소 무시무시하다. <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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