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론과 칼럼

[그림, 詩에 빠지다] 그들은 매미의 소리에서도 덕을 배웠다

미송 2013. 1. 6. 07:42

 

명선부(鳴蟬賦) / 구양수

 

여기에 한 물건 있어 나무 끝에서 우는데 (爰有一物鳴于樹顚)
맑은 바람 끌어들여 긴 휘파람 불기도 하고 (引淸風以長嘯)
가는 가지 끌어안고 긴 한숨 짓기도 하네 (抱纖柯而永歎)
맴맴 우는 소리는 피리 소리와 다르고 (嘒嘒非管)
맑은 소리는 현악기 소리와 같네 (泠泠若絃)
찢어지는 소리로 부르다 다시 흐느끼고 (裂方號而復咽)
처량하게 끊어질 듯하다 다시 이어지네 (凄欲斷而還連)
외로운 운율 토하고 있어 음률 가늠하기 힘들지만 (吐孤韻以難律)
오음의 자연스러움 품고 있네 (含五音之自然)
나는 그것이 어떤 물건인지 알지 못하거니 (吾不知其何物)
그 이름이 매미라네 (其名曰蟬)

 

큰비가 내렸다. 온 백성이 하늘을 원망할 정도로 심한 비였다. 황제는 구양수(歐陽脩·1007~1072)에게 예천궁에서 제사를 드려 하늘을 달래도록 명했다. 구양수는 엄숙한 사당에서 정성을 다해 제사를 지냈다. 행여 삿됨이 끼어들지 못하도록 생각을 맑게 하고 마음을 깨끗이 했다.

지성이면 감천이라 했던가. 막무가내로 쏟아지던 아침비가 갑자기 멎었다. 바람마저 멈추더니 구름이 걷히고 푸른 하늘이 드러났다. 멀리서 간간이 우레 소리의 여운만이 들릴 뿐 맑은 대기 속으로 햇빛이 쏟아졌다. 할 일을 마친 구양수는 편안하게 풀밭에 앉았다. 무심한 눈길로 빈 뜰을 바라보니 풀밭 사이에 고목 몇 그루가 서 있었다. 그때 발견했다. 나무 끝에서 울어대는 매미 한 마리를. 오랫동안 풀밭에 앉아 매미 울음소리를 듣던 구양수는 느낀 바가 있어 부(賦)를 지었다. 이것이 그 유명한 ‘매미 소리에 붙이는 글’, ‘명선부(鳴蟬賦)’다. 가우(嘉祐) 원년(1056), 중국 송나라 인종(仁宗) 때의 일이었다. 
   
문자를 아는 선비의 상징 매미
   

구양수의 ‘명선부’는 ‘고문진보(古文眞寶)’에 실려 있는 보배로운 문장이다. 그는 이 글에서 매미 울음소리의 특징을 묘사하는 데서 시작해 만물의 갖가지 다양한 소리를 거쳐 사람들의 울음소리인 문장론에 도달한다. 사계절마다 여러 새가 울고 벌레들이 울고 심지어 연못 속의 맹꽁이와 흙 속의 지렁이도 운다. 제각기 자기 몸 안에서 울음을 토해내는 점에서는 만물이 모두 똑같지만 그중에서 사람이 가장 귀중한 까닭은 자기의 말을 글로 전해 백 세대에 걸쳐 장구히 울기 때문이다. 생명은 짧지만 문장은 길다. 구양수의 ‘명선부’는 매미 한 마리의 울음소리를 통해 심원한 예술론으로 확장해 나가는 시인의 집중력이 놀라운 작품이다. 그는 ‘취옹정기(醉翁亭記)’와 ‘추성부(秋聲賦)’처럼 자연과 인생에 대해 통찰력 있는 글을 쓴 작가로 유명하지만 사람들의 관심 밖에 있는 곤충을 소재로 쓴 글도 그의 대표작이다. 심지어 쉬파리를 소재로 부(賦)를 지을 정도였다. 소재는 하찮은 미물이지만 그 속에 사람살이의 다양함과 교훈이 담겨 있어 많은 선비들이 읽고 외우기를 반복했다. 
   

 
▲정선 '송림한선' 종이에 연한 색, 45×23,1cm

간송미술관

 

‘명선부’에 취한 화가들은 너도나도 붓을 들어 매미를 그렸다. 조선의 화가 정선(鄭敾·1676~1759)도 그중의 한 사람이었다. 그가 그린 ‘송림한선(松林寒蟬·소나무 숲의 가을 매미)’은 구양수의 ‘명선부’를 잘 살린 수작이다. 그림은 매우 단순하다. 왼쪽 상단에서 대각선으로 가로지른 소나무 가지에 매미가 붙어 있다. 매미는 하늘 쪽을 향해 있는데 나뭇가지는 땅 쪽으로 뻗어 있어 그림 속에 긴장감이 감돈다. 만약 매미가 나뭇가지와 같은 방향을 향하고 있었다면 그림의 기운이 흘러내린 듯 맥이 빠졌을 것이다. 이 그림의 매력은 또 있다. 대부분의 화가가 나무의 몸통을 넓게 그리고 넓은 몸통에 작은 매미가 붙어있는 형식으로 구도를 잡는다. 실제로 우리가 길을 가다 시끄럽게 울어대는 매미소리를 좇아 나무를 쳐다봐도 매미를 발견하기는 쉽지 않다. 매미가 보호색을 띠고 있는 이유도 있겠지만 그만큼 매미가 나무에 비해 몸이 작아 존재감을 느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정선은 소나무 가지의 연장선처럼 매미를 그렸다. 매미와 나뭇가지가 만나는 부분에서는 붓질이 끊겼다. 마치 두 개의 나뭇가지가 매미를 매개로 해서 이어진 것 같다. 큰 나무의 몸통에 붙은 매미는 매미가 날아가 버려도 아무런 변화가 없지만, 이 그림 속에서는 매미가 자리를 뜨면 두 개의 나뭇가지 연결고리가 끊어지게 되어 있다. 매미를 보며 아슬아슬한 긴장감이 느껴지는 이유다. 이런 형식은 심사정의 ‘화훼초충’에서도 발견되는 공통점인데 정선의 작품에서 정점을 이룬다. 소나무 가지를 제외한 나머지 부분을 텅 빈 공간으로 남겨둔 것도 비가 그친 뒤 청아한 기운을 전해준다.  
   
다섯 가지 덕목을 가진 매미

그림 속의 매미는 단순히 감상을 위한 매미가 아니다. 매미가 지닌 ‘오덕(五德)’을 실천하며 살겠다는 다짐이자 맹세였다. 진(晉)나라 때의 시인 육운(陸雲)이 매미를 일컬어 ‘문(文)·청(淸)·염(廉)·검(儉)·신(信)’을 지닌 곤충이라 칭송하였는데 오덕은 군자가 갖추어야 할 도리를 말한다. 그런 의미에서 옛 그림은 자연을 그대로 옮겨 그린 풍경화가 아니라 자연에 빗대어 삶의 철학을 담은 철학책이자 사상서이다. 미미한 곤충 한 마리에도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고 그 뜻을 되새겨 보려 했던 옛사람들의 삶의 자세가 얼마나 숭고하고 겸허한지를 매미 그림 한 장이 알려 준다.

구양수를 비롯한 옛 선비들은 매미를 오덕을 갖춘 군자로 생각하며 그 미덕을 배우려고 노력했는데 지금은 시대가 변했다. 밤낮 없이 울어대는 매미 소리로 밤잠을 설치는 사람들에게 매미는 어느덧 반갑지 않은 불청객이 되어 버렸다. 밤이 되어도 대낮처럼 환한 불빛 때문에 밤을 낮이라 착각한 매미들이 한밤중에도 극성스럽게 울어대는 것이다. 귀청을 찢는 듯한 매미 소리 때문에 오덕을 생각하기는커녕 그나마 간신히 남은 덕의 흔적마저 버려야 할 판이다. 매미는 옛날 그대로인데 어찌 매미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이 바뀌었을까. 사람들은 매미를 재워야 할 시간에 환한 불을 켜놓으면서 다만 매미의 울음소리만 타박한다. 나 또한 누군가에게 어떤 불상사가 일어날 빌미를 제공해 놓고서 정작 사건이 발생했을 때는 모두 그 사람 탓이라고 책임을 전가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조정육 미술사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