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문과 산문

이영광<기우>

미송 2013. 2. 1. 21:21

     

     

    기우 / 이영광

     

    먼 훗날 당신이 아파지면

    우리가 맨발로 걷던

    비자림을 생각하겠어요

    제주도 보리밥에 깜짝 놀란

    당신이 느닷없이 사색이 되어

    수풀 속에 들어가 엉덩이를 내리면, 나

    나는 그 길섶 지키고 서서

    산지기 같은 얼굴로

    오가는 사람들을 노려 봤지요

    비자림이 당신 냄샐 감춰주는 동안

    나는 당신이, 마음보다 더 깊은

    몸속의 어둠 몸속의 늪 몸속의 내실(內室)에

    날 들여 세워두었다 생각했지요

    당신 속에는, 맨발로 함께 거닐어도

    나 혼자만 들어가본 곳이 있지요

    나 혼자선 나올 수 없는 곳이 있지요

    먼 훗날 당신이 아파지면

    웃다간 눈물 나던 비자림을 찾겠어요.

     

    시집<아픈 천국>(창비시선 3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