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홍준, 「오므린 것들」
자연의 침묵은 인간에게로 몰려온다.
인간의 정신은 그러한
침묵의
드넓은 평원 위에 걸린 하늘과도 같다.
—막스 피카르트, 『침묵의 세계』 중에서
배추밭에는 배추가 배춧잎을
오므리고 있다
산비알에는 나뭇잎이 나뭇잎을 오므리고 있다
웅덩이에는 오리가 오리를 오므리고 있다
오므린 것들은 안타깝고
애처로워
나는 나를 오므린다
나는 나를 오므린다
오므릴 수 있다는 것이 좋다
내가 내 가슴을 오므릴 수 있다는 것이
좋다
내가 내 입을 오므릴 수 있다는 것이 좋다
담벼락 밑에는 노인들이 오므라져 있다
담벼락 밑에는 신발들이 오므라져
있다
오므린 것들은 죄를 짓지 않는다
숟가락은 제 몸을 오므려 밥을 뜨고
밥그릇은 제 몸을 오므려 밥을 받는다
오래 전
손가락이 오므라져 나는 죄 짓지 않은 적이 있다
『현대시』 2012년 1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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