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의 안부
오정자
1
늦은 저녁 별을 보았습니다. 어둑해진 길을 걷다 올려다 본 별들이 어떤 빛보다 황홀합니다. 콧속으론 물컹한 냄새. 저는 제법 시골과 가까운 곳에 살고 있습니다. 조금만 돌아가면 자연스럽게 생긴 길이 있지요. 꾸부정한 길을 걸을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다행인지, 생경스러움은 쉬 떠나지 않는 율동입니다. 시골길에서 만나는 별들로 아찔했습니다. 간지런 웃음이 솟았습니다. 어두움이 때로는 태양보다 환하게 보일 때가 있어요.
언젠가 좋아하는 사람과 별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흔히 별의 수효만큼 광채만큼 온도만큼이라는 답을 스스럼없이 하는 우리. 하늘 땅만큼 쌓아도 모자라는 것이 있어 다 안길 수 없는 마음끼리는 별들의 수군거림도 뒷전으로 흘리며 웃곤 합니다. 그래요 제 안에 두고서도 그리운 것은 별이 뜬 하늘같습니다.
가까운 곳에 쉼터가 있고 처녀의 가슴마냥 설레이는 하늘이 있어 지루하지 않습니다. 산길을 따라 곡예를 벌이는 청설모 다람쥐 참새들에게 단물이 되어 주었을 생명의 환희들. 분칠하지 않은 모습이나 한풀 가린 마음이 그립습니다. 세수하지 않고도 말끔해진 나팔꽃 같은. 그러나 그러한 마음도 떠돌이 별과 같아서 욕심일랑 버려야겠지요. 눈이 부셔도 화려하지는 않은 별, 소리 내지 않아도 웃음을 선사하는 별, 저항 할 수 없는 것들이란 그렇게 한 점 그림자도 없이 옵니다.
근시에 별들이 마음을 흔드는 까닭에 시간 가는 줄 몰랐습니다. 별들도 결혼을 하고 전쟁을 하고 죽음을 맞이할까요. 평화의 전갈을 들고 은하수 길을 달리던 신하처럼, 사랑하는 여인을 쓰다듬던 목동처럼, 우리에게도 신뢰할 수 있는 어깨가 필요합니다. 스테파네트처럼 졸고 있나요. 오리온 북두칠성 마글론의 전설을 알고 있지만 당신이 나의 가장 오래된 전설이며 별입니다. 저는 지금 중력이 당기는 쪽으로 기울고 있어요.
2
내가 좋아하는 사람 내가 사랑하는 사람. 사랑이란 말이 너무 유치한가요, 그럼 내가 생각하는 사람이라 말할까요. 그는 바닷가에 앉았을 때 별이 없으면 허전해 하였고, 꼭 있어야 할 자리에서 뭔가 빠진 듯, 그래서 이빨 어딘가가 엉성해진 느낌이라고 했습니다. 찡그린 미간이 환해지는 순간 그는 손가락으로 파도자락을 가리키며 “저기 별들이 밀려오고 있어” 말했죠. 그렇습니다. 별이 백사장 위로 자꾸 올라옵니다. 모래톱을 성큼 밟은 별들이 바글바글한 거품으로 터져나가는 바다에는 우주쇼가 열립니다.
대낮에도 별에 취해있습니다. 햇볕 쨍쨍한 날 손을 휘휘 저으며 별이 보이냐고 묻습니다. 물론 안 보인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러나, 다만 햇볕에 가려서 보이지 않을 뿐 별은 낮에도 떠 있었습니다. 정말인가 하여 별에 관한 책을 뒤적거려도 보았습니다. 맞더군요. 별은 지구 전체를 감싸 안고 늘 우리의 머리위에 떠있습니다. 이것은 신화神話의 눈입니다. 낮에도 별을 볼 수 있는 사람이라야 자신이 하나의 신화인 줄, 하나의 별인 줄 알게 된다는, 그래서 나는 꿈을 꾸는 사람이 가장 현실적이란 사실을 깨닫습니다.
플라톤의 이데아론이 기독교 신학의 로고스 세계로 연장되었고, 그 로고스가 근대 이성이란 개념으로 이어졌지만, 이는 순전히 정신세계에 대한 하나의 관념일 뿐입니다. 그러나 잘난 철학자들은 이것을 현실이라고 하더군요. 보고 듣고 접촉하고 느끼는 모든 감각이 나의 진정한 현실일 텐데 그들은 이것을 허상이라 하더군요. 생각을 연장시키자면 현실적이란 말조차 참 모호해집니다.
3
손금을 따라 그려진 북두칠성을 보다가 방안 가득한 별을 발견했습니다. 구석자리에 누운 별들을 보았을 때, 발아래 밟히는 별을 사뿐히 건너 이불장에도 화장실에도 창고에도 별이 빛나고 있을 때 내가 좋아하는 사람 내가 찾던 사람, 이 순간 이 자리엔 없지만 여전히 느껴지는 따스한 손길 따스한 감촉, 그것이 허상이거나 환상일까요. 설령 먼 세월 이후의 이야기라 해도 이렇게 손에 잡히는데 말입니다.
2010, 가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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