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과 신화

보드리야르

미송 2021. 3. 19. 18:46

보드리야르, 이미지가 실제인 세계

 

현대 사회에서 우리에게 드러난 이미지의 의미는 더 이상 고정된 것이 아니다. 이미지에는 최종적 해석이 있을 수 없고, 다만 그것이 만들어내는 창조적이고 생산적인 효과만 있을 뿐이다. 그래서 현 사회에서는 원래의 사실보다 복제된 이미지로 드러난 사실이 더 실재적 의미를 부여받는 경우가 많다. 복제가 현실을 베끼는 게 아니라 거꾸로 현실이 복제를 베끼는 일이 지금 우리가 사는 세계의 참 모습이다. 이렇게 현실과 가상의 관계가 전복된 것에 대해 주목한 사람이 프랑스의 사회학자 장 보드리야르이다. 플라톤의 이데아론에 오랫동안 물들어온 보통 사람들은 복제란 원본의 모사이기 때문에 환영일 뿐이라 생각할지 모르지만, 보드리야르는 복제로 이루어진 가상의 존재가 실제 현실적이라고 주장한다. 가상이 끊임없이 현실을 위협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현상을 보드리야르는 시뮬라크르와 시뮬라시옹의 두 가지 개념으로 설명한다. 시뮬라크르란 원본에 대한 복제이고 시뮬라시옹은 그것을 하는 행위다. 우리가 사는 세계가 바로 이러한 시뮬라시옹이 지속적으로 일어나는 시뮬라크르의 세계라는 것이 보드리야르의 세계관이다. 따라서 보드리야르가 말하는 시뮬라크르는 기호가 의미를 감춘 채 그 자체를 계속해서 변화시키면서 만들어진 것이다. 그래서 그 이미지는 사실성을 감추거나 변질시키고, 그래서 그 시뮬라크르는 실재와는 전혀 무관하다. 실재와 가상, 현실과 재현, 원본과 복제의 차이가 부괴되면서 만들어진 거대한 시뮬라시옹의 세계에서는 더 이상 새로움이란 없다. 동일자의 무한 증식만 있을 뿐이다. 보드리야르가 암(癌)과 클론을 현대 사회의 상징으로 본 것은 이런 맥락에서다.

 

현대 사회는 기술의 혁신으로 말미암아 소비자는 더 편리하고 새로운 것을 선호하게 되고 그 과정에서 하나의 사물이 이미지로, 이미지는 다시 사물에 대한 담론으로 진화한다. 그렇게 되면 그 과정 속에서 사물은 하나의 기호이기 때문에 소비의 개념도 역시 그 기호 체계 안에서만 이해된다. 따라서 생산자는 소비자가 실제 생활에서 필요로 하는 물건을 만들어내는 대신 소비자들의 욕망을 자극하는 물건을 만들어낼 뿐이다. 결국 소비자는 물건 대신 기호를 욕망하고, 기호를 소비하게 되고 그럴수록 이미지의 비중은 커져만 가는 사회화가 진행된다.

 

이러한 사회화의 총아는 광고다. 광고는 그 재현한 대상을 마치 실재하는 것처럼 인지하게 만드는 존재다. 광고는 존재하지 않는 현실과 재현된 물질 사이에 생성되는 갈등 사이에서 새로운 형태의 에너지를 만들어 그것을 접하는 소비자에게 그 기호가 실재 혹은 그 이상의 의미를 갖는 것으로 받아들이도록 만든다. 그래서 그 광고란 실재와는 아무런 관계없는 상품의 기호화일 뿐이다. 좋은 예를 한 번 들어보자. 한국 사회에서 광고의 비중이 무엇보다도 막중한 것 가운데 하나가 소주 광고다. 어떤 소주 회사는 예의 소주병에 젊고 섹시한 한 여배우 사진을 붙였다. 그러자 남성 소비자들이 너나 할 것 없이 그 사진을 오려 잔 밑에 붙이고 그 잔에 술을 따라 마셨다. 그리고선 누구나 그 여배우를 먹은 것이라 희희낙락 한다. 그들은 시뮬라크르가 된 기호를 소비하면서 실재를 소비한 것으로 즐긴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현실을 지배하는 가상 현실을 보드리야르는 초(超)실재라 부른다. 이는 실재보다 더 실재 같은 가상, 현실보다 더 현실적인 재현, 원본보다 더 원본 같은 시뮬라크르를 이르는 말이다. 그리스 이래로 근대에 이르기까지 아주 오랫동안 서구의 사유 기반을 이루던 실재와 재현의 이분법적 차이가 비로서 사라져버린 것이다.

 

보드리야르는 이 초실재의 세계에서 대중과 매체를 생각한다. 매체는 기호와 정보를 증대 시키는 것으로 결국 의미를 소멸시킨다. 그리고 정보의 과잉 공급 때문에 대중은 침묵하는 다수로 전락하고 만다. 그래서 그 대중은 의미와 정보의 수용과 생산을 거부함으로써 모든 것을 무의미하게 하며 결국 사회 자체가 무관심하고 냉담한 대중 속으로 파급되어 급기야 소멸되게 된다.

 

이러한 초실재의 세계 속에서는 대중 예술만이 예술일 뿐이다. 근대에 들어와 미술은 도덕적 가치에 따른 예술을 거부하고 자율적 요소의 중요성을 인식하기 시작했다. 사물의 재현적 이미지는 해체되기 시작했고, 점차 추상화 되어갔다. 예술가가 고전적인 장인에서 칸트가 말하듯 천재로 바뀐 상황이다. 그러다가 20세기 후반 다시 대중 예술에서 사물의 이미지가 부각된다.

 

보드리야르는 그러한 이미지 속에서 대중 예술은 기호의 내재적 질서에 따르면서 드디어 형이상학적 초월성을 극복한다고 본다. 그는 대중 예술의 의미를 증언적·창조적·이데올로기적·가치적 행위 등을 끝내는 것에 있다고 본다. 따라서 예술은 가치나 이데올로기로서 평범한 것, 하찮은 것, 보잘 것 없는 것을 자기 것으로 삼으려는 노력이다. 즉, 현대 예술은 그 동안 아무런 인정을 받지 못해 온 무가치, 무의미, 비의미를 지향하는 것이다. 예술가가 칸트의 천재에서 보드리야르의 누구나로 바뀐 셈이다.

 

보드리야르가 무가치를 옹호하는 것은 근대를 관통하면서 지켜온 아우라·고상함·성성(聖性)·실존·내용 등의 근대적 가치를 완전히 전복시키는 것이다. 그야말로 기의 없는 기표만을 요구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보드리야르가 주장하는 대로 모든 하찮고, 무의미하고, 무가치하고, 쓸데없는 일상의 것들이 미의 대상이 된다면 시뮬라크르로 뒤덮인 일상 그 자체가 바로 예술이 된다. 따라서 기존 개념의 예술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되는 것이 자연스럽다. 결국 실재라는 것은 결코 표현할 수 없는 것이고, 오직 모조만이 존재하는 것이 현실이기 때문에 예술 또한 모조 가운데 하나이고, 그 초실재의 세계 안에서 사라지는 모든 시뮬라크르들처럼 예술 또한 사라져버릴 뿐이다.

 

 

 

앤디 워홀, 1962

 

앤디 워홀(Andy Warhol)은 보드리야르가 자신의 시뮬라크르 개념을 가장 잘 활용한 작가라고 지칭한 이다. 그는 보드리야르가 전형적인 초실재의 세계라고 규정한 미국에서 활동하였다. 그는 모두에게 동일한 수준으로 아주 넓게 유통되는 감각적 대중 이미지를 소재로 작업하였다. 그가 엘비스 프레슬리, 마릴린 몬로, 재키 오나시스, 마이클 잭슨 등을 잡은 것은 그들이 우상화 된 대중 스타이기 때문이고, 모나리자를 잡은 것은 그가 전통 미학에서 가장 가치 있는 존재로 숭배 받기 때문이며, 마오쩌둥을 잡은 것은 그가 이데올로기 가치의 차원에서 근대주의의 표상이 되기 때문이다. 코카콜라 병이나 달러, 캠벨 스프 통조림 등도 마릴린 먼로나 마이클 잭슨과 아무런 차이가 없는 단순한 시뮬라크르 기호일 뿐이다. 그 안에는 아무런 실재도 없고, 있는 것이라곤 오로지 대중적이고 일상적인 이미지들의 텅 빈 기표뿐인 것이다. 실크 스크린 안에서 마릴린 먼로든 마오쩌둥이든 달러든 그 누구 무엇 하나 할 것 없이 그 위선으로 가득 찬 허깨비가 되지 않은 것은 없다. 그야말로 앤디 워홀은 시뮬라크르를 동원해 영웅의 명성과 가치를 통렬하게 전복시킨 잔인한 복수극을 벌인 것이다.

 

앤디 워홀의 예술 안에는 작품으로서 숭고한 의미와 작가의 정신 따위란 없다. 예전 같으면 그저 키치(kitsch)에 불과한 저급한 미술이 포스트모던의 예술이 된 것일 뿐이다. 소비가 일상화 된 매일의 삶에서 흔히 눈에 보이고, 손에 잡히는 일상의 이미지들을 실크 스크린이라는 기계적인 복제 기법을 이용하여 손쉽게 제작한 것일 뿐이다. 따라서 이 작품을 진지하고, 의미 있게 성찰하면 그 작품과 작가에 대한 오독이다. 작가 정신이 없는 것 그 자체가 작가 정신일 뿐이다. 다만 한 가지 아이러니 한 것은, 가치를 배제하고 아우라와 숭고미를 부인하는 것도 모자라 예술 그 자체를 부정한 보드리야르적 예술 행위가 여전히 작가에게 명예와 돈이라는 근대적 가치를 부여한다는 사실이다. 보드리야르가 1991년 미국의 이라크 침략 전쟁 (소위 걸프전)은 시뮬라시옹이 만들어 낸 것일 뿐 이라크에서 실재 (즉 변화)한 것은 아무 것도 없기 때문에 그 전쟁은 일어나지 않은 것이라는 파라독스를 보여준 것과 같은 의미의 파라독스다. 예술을 부인하면서 예술이 되고, 가치를 부인하면서 가치가 되는 것이 이 세계이기 때문이다.

     

현실과 시뮬라크르 사이의 차이가 무의미하게 되어 버린 세계에서 사진은 더 이상 찍는 행위의 결과로서만 존재할 필요는 없다. 합성이나 변형과 같은 디지털 기술 속에서 사진은 더 이상 사실의 재현 혹은 기록일 수만은 없다. 사진이 허구의 매체로 돌아다니는데도, 사진이 사실과 철저하게 단절되어 있음에도 여전히 많은 사람들은 사진은 거짓말 하지 않는다 라는 거짓 속에 파묻혀 있다. 그 와중에 사진은 거짓말을 할 뿐이다 라고 소리치는 작가들이 일어난다. 사진은 거짓임을 부담스러우리만큼 직설적으로 보여주는 그러한 작업들 안에 강홍구의《그 집》연작이 있다.

 

강홍구의《그 집》연작은 흑백으로 인화한 사진 위에 잉크, 아크릴 물감 등으로 색을 칠해 생산한 작품이다. 특히 위로부터, 아래로부터, 한 가운데를 망치려 작정하듯 흰색 물감으로 흘리거나 그은 행위는 작품을 사진과 그림의 경계를 파괴한 이미지이자 기호로 만든다. 그것은 그 물감이 고전적 의미의 사진에서는 존재할 수 없는 부피와 물질을 가진 오브제가 되기 때문이다. 그 흰색 물감질은 사진이라는 평면적이고 불개입적인 매체를 완전히 부인하지 않으면서 전체의 구성에서 실재감을 줄 수 있는 방식이다. 그래서 장르의 파괴다. 재현 위에 고의적으로 가해진 물감질의 - 그것도 질서정연하지도 아름답지도 않게 - 행위를 통해 강홍구는 시뮬라크르로 넘치는 세상에 대해 제 목소리를 낸다. 시뮬라크르가 지배하는 세상으로부터 실재가 독립을 선언하는 외침으로 들린다.

 

마틴 파 1991

 

마틴 파의 사진은 보드리야르가 이 시대의 예술이라고 하는 광고나 낙서화 등과는 거리가 멀다. 그의 사진은 분명한 모더니즘에 따른 사진이다. 그런데 그가 담는 내용이 보드리야르가 말하는 초실재 세계에서의 시뮬라크르와 시뮬라시옹의 개념을 전달하려 하는 것이다. 그는 조금이라도 더 편리함을 추구하고, 조금이라도 더 새롭고 자극적인 물건을 선호하고, 한층 더 광고에 노출되면서 소비 지상주의에 흠뻑 빠져 있는 현대인의 일상생활을 스케치한다.

 

마틴 파가 그린 현대인의 일상생활 가운데 가장 활발한 것 가운데 하나는 여가 활용이고 그 가운데 대표적인 현상이 관광일 것이다. 그런데 그들이 찾는 관광지란, 보드리야르의 이론에 따르면, 이미 실제 존재들이 의미하는 곳이 아니고 남겨진 흔적들로 새롭게 만들어진 적(跡)일 뿐이다. 허구의 세계, 가상의 세계이다. 그곳은 시뮬라크르들이 완벽하게 행위 하는 환영의 유희 공간으로서 소비 공간일 뿐이다. 그럼에도 사람들이 세계 유명 관광지를 찾고 그 환영을 기억하기 위해 인증 샷을 찍고 하는 행위는 현대 세계 자체가 환영으로 가득 찬 소비 공간이라는 사실 속에 이미 함몰되어 그 실체를 파악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아니 더 확실하게 말하자면, 그러한 환영의 세계의 실체를 은닉하기 위하여 그 위에 굳건히 선 자본과 정치 권력이 온갖 이미지와 기호로 만들어진 광고를 총동원 하여 관광지를 실재 공간으로, 나아가 이 세계 전체를 실재 세계로 믿게 만들기 때문이다. 결국, 현대 사회인은 환영 안에서 춤추는 유령인 셈이다.

 

캄보디아 앙코르와트를 가장 많이 찾는 사람들이 한국 사람들이란다. 그런데 한국에는 캄보디아를 전공으로 하는 대학의 학과나 교수가 단 한 사람도 없다. 캄보디아에 대해 깊이 있게 배워 본 적도 없고, 별반 관심도 없다. 그렇다면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왜 그렇게 캄보디아 앙코르와트를 찾는 것일까? 한국 사회가 보드리야르가 말하는 초실재의 사회에 가장 잘 맞아 떨어지는 곳이기 때문일 것이다. 단언컨대, 한국 사회에 이미지보다 더 강력한 담론은 결코 없다. 정치도 이미지고, 경제도 이미지다. 그렇게 보면, 심지어는 북한의 연평도 포격도 이미지일 뿐이다. 연평도 포격 직후 남북 두 나라에서의 변화는 아무 것도 없이 그 이전과 똑같은 일만 되풀이 되고 있다. 그렇게 보니 정말 그 사건은 이미지였을 뿐이다, 마치 보드리야르가 설파한 미국의 이라크 전쟁과 같이.

 

 

 

박정수 2010

 

보드리야르가 말하는 일상의 생활 속에 흔히 접하는 대중 예술은 일반적으로 인식되는 기호의 질서를 전복시키는 것들이다. 그 가장 좋은 예를 보드리야르는 낙서화(graffiti)에서 찾는다. 낙서란 숫자나 문자, 부호 등을 이용하여 가치 없이, 무질서하게 표현하는 것으로 그 언어는 고전적 의미의 언어 구조론이나 의미론에 전혀 맞지 않다. 구조와 질서에서 일탈한 암호, 은어, 구호, 신조어 등이 아무렇게나 남발할 뿐이다. 그것을 표현하는 공간도 전통적인 재료에서 벗어난다. 지하철 통로, 무너진 문짝, 담벼락, 재개발 공간 등의 공공 공간에다 여러 가지 색의 스프레이를 뿌리는 식으로 여러 기표들을 무질서하게 그리는 것이다. 보드리야르는 이러한 낙서화를 현대 소비 사회의 질서를 파기할 수 있는 상징으로 파악하였다.

 

박정수의 낙서화 ‘쥐20’은 기존의 사진으로 제작된 포스터에 작가가 개입하여 질서를 전복한 예술 작품이다. 더 이상 실재하는 것의 재현이 아닌 시뮬라크르로서의 사진에 물리적으로 개입하여 그 위에 기의를 갈겨 대는 것으로 그 행위 자체부터가 전통적 가치의 전복이다. 그 언어 또한 기존의 질서에 대한 반항이라서 그 안에는 결국 기의는 일정하게 존재하지 않고 그 바깥에 다양한 형태의 단순한 기표들만 존재할 뿐이다. 그 안 기존의 이미지는 이미 원본성이 존재하지 않는 기호에 불과한 것으로 처리되었기 때문에 표절이나 합성 또는 전사 등의 행위는 이 예술 행위 안에서는 아무런 의미도, 문제도 되지 않는다. 이는 보드리야르가 말하는 일상생활의 이미지 그 자체다. 이 흔하디흔한 대중 예술 행위를 한국에서는 권력이 규제하였다. 무지와 천박, 그 외에 더 이상 할 말이 없다.

 

 

 

 

시뮬라크르

들뢰즈, 복제가 반복적으로 발생하는 변화에서 생긴 차이

 

공포 영화에 나올 법한 장면이지만, 사방이 거울로 된 유리방에 들어가 있다고 생각해보자. 그곳에서 자기 자신은 몇 명이나 되는 것으로 생각하는가? 어느 거울 하나에 비친 자신의 모습은 다른 거울을 통해 복제되고, 그것은 다시 반사되어 또 복제를 한다. 무한 복제가 이루어지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무한히 복제를 하는 행위를 시뮬라시옹(simulation)이라 부르고, 그 시뮬라시옹 과정에 포함되어 있는 사람이나 사물을 모두 시뮬라크르(simulacre)라 한다. 그 거울 방 속 시뮬라크르로 가득 찬 세계에서는 모든 것이 서로를 비추기 때문에 무엇이 실재고 무엇이 복제인지 알 수가 없다. 모두가 모사의 모사로 되어 있기 때문에 그 안에서 세상은 완전한 시뮬라크르인 것이다.

 

들뢰즈는 플라톤의 이데아 개념을 빌려 복제본과 시뮬라크르의 차이를 말한다. 플라톤에 의하면 빛의 영역에서 벗어난 어둠의 영역에는 파악할 수 없는 어떤 것들이 존재하는데, 그것들은 아주 미세한 감각적 진동에 의해서만 우리에게 그 존재가 전달되는 것이다. 따라서 그것들은 인식의 영역 너머에 있는 미지의 세계로 은닉된 존재이기 때문에 오로지 감각에 의해서만 추측될 뿐이다. 이것이 시뮬라크르의 세계다. 그런데 플라톤의 시뮬라크르는 이데아라고 하는 본질에 대한 저급 존재이다. 따라서 플라톤이 말하는 시뮬라크르와 들뢰즈가 말하는 시뮬라크르의 가장 큰 차이는 이데아라는 존재 근거를 가지고 있느냐의 여부이다. 들뢰즈의 시뮬라크르는 이데아라고 하는 원본 자체를 두지 않는 복제본이다. 그래서 시뮬라크르의 성격은 차이 그 자체일 뿐이다. 원본을 갖지 않으므로 시뮬라크르는 어떤 기준 아래 그 가치가 결정되지 않는다. 따라서 시뮬라크르는 생성과 창조, 차이와 다양성을 강조하는 면에서 원본과 다르다. 원본은 존재하는 것이기에 변화하지 않고, 변화할 수도 없는 존재다. 그렇지만 들뢰즈의 시뮬라크르는 끊임없이 위장하고 변신한다.

 

들뢰즈가 보기에 정치적으로 혹은 경제적으로 혹은 사회적으로 일정한 목표를 정해 놓고 끊임없이 변화에 매진하는 인간은 천상 시뮬라크르다. 그래서 들뢰즈가 보기에 근대의 합리적이고 이성적이며 진보적이고 역사적인 인간은 이데아에 의거하여 기준이 세워져 있는 위계에 매달리는 각박한 허깨비일 뿐이다. 결국 들뢰즈에게 중요한 것은 세계에서 차이와 다양성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 시대의 예술 또한 끝없는 변화 속에서 차이와 다양성을 인정하는 것 위에 있는 것이어야 한다. 이는 들뢰즈가 감각이 이성에 대해 우위라는 말을 하는 것이다. 들뢰즈에게 그 감각은 이성에 선행하는 것이다. 그것은 감각 기관을 통해 받아들인 정보를 정신으로 퍼 올리는 인식론적 현상이 아니고, 감각 기관에서 직접 몸으로 내려가는 존재론적 사건이다. 그에게 만질 수 없는 관념은 허상일 뿐이다. 그 안에서 깨달음은 오로지 만질 수 있는 물질을 통해서만 구현할 수 있는 것이다. 관념론을 부정하고 물질론 위에 우뚝 선 포스트 모던의 사건이다.

 

그 물질론적 세계에서 인간은 사물을 어떻게 지각하는가? 보는 것은 보이는 것이고, 보이는 것은 보는 것인가? 사물을 지각할 때 인간의 눈은 쉴 새 없이 부지런히 움직인다. 사물은 눈의 각막을 통하고 시신경을 거쳐 뇌로 전달되는 동안 수없이 많은 변화하는 것들을 포착해 전달한다. 그런 가운데 지각되는 세계는 최종 결과인 사진처럼 일목요연하지 않고 산만할 뿐이다. 그런데 우리는 학습된 지각의 결과에 따라 그 대상을 질서정연하고 일목요연한 상(像)으로 인식한다. ‘정신’이라는 고정된 눈 때문이다. 움직이는 육체의 눈에 따라 표상하지 못하는 것이다.

 

따라서 들뢰즈가 의미하는 회화나 사진의 재현은 모더니즘이 규정하는 근대 그림의 규칙 즉 원본에 대한 모사를 파기하는 것에서부터 출발한다. 그 안에서는 모더니즘이 그 모사의 결과로 만들어낸 이미지와 다른 이미지들과의 사이에 맺어진 서사적 관계 또한 응당 파기해야 한다. 그림은 ‘눈에 보이지 않는 에너지’를 보이게 해야 하는 것이어야 한다. 이 에너지는 여러 기관으로 분화되기 전 미분화된 원초적 감각에서 나온다. 거기에서 청각, 시각, 촉각 등 다양한 개별 감각들이 나타난다. 그 개별 감각들은 각각 하나의 자극을 여럿으로 느끼게 한다. 바로 ‘착란’이다. 들뢰즈는 이 ‘착란’이야말로 예술에서 창조성의 근원이 되는 것이라 한다.

 

여기에서 들뢰즈의 미학은 심리학 용어로 잘 알려진 게슈탈트 전환과 연계된다. 게슈탈트 전환이란 이미지나 형태가 변하지 않는데도 보는 사람의 시각에 따라 어떤 것에서 다른 것으로 바뀌는 것을 말한다. 하늘의 구름을 쳐다보고 있는데 구름이 갑자기 탱크나 비행기와 같이 보일 때, 보는 지각 행위의 대상인 구름의 전체 형상이 바뀌는 것이다. 이것을 게슈탈트가 전환된다고 말한다. 과학에서는 패러다임이 바뀌면 이전의 패러다임은 잘못 된 것 혹은 극복해야 할 대상이 되어 용도 폐기 되는 것이 보통이지만, 들뢰즈가 보는 예술에서는, 게슈탈트의 전환에서와 같이, 전혀 그렇지 않다. 사물은 옳고 그른 것 없이 하나의 상(像)에서 다른 상으로 끊임없이 변화하는 것이다. 들뢰즈가 사과의 성격을 모방할 수 없다고 한 것은 이런 맥락에서이다. 세잔느가 그린 사과와 배고픈 거지가 먹으려고 하는 사과는 과학적으로는 같은 사과일지 모르나 감각적으로는 전혀 다른 사과이기 때문이다.

 

들뢰즈에게 예술이란 바로 그 차이를 표현하는 것이다. 그래서 예술은 모두 다 새로운 것, 다른 것, 변화하는 것을 창조하는 것이어야 한다. 그래서 들뢰즈에게 예술은 주체의 정체성을 부인하면서 대상의 일률적인 재현을 거부하는 것이다. 정체성이 외부의 어떤 것과 만난 후 생긴 변화하는 상태를 표현하는 것이다.

 

따라서 예술이란 정해진 옳고 그름의 잣대에 따라 평가를 하는 것이 아니고, 그 대신 그 변화하는 외형의 차이를 즐기며 끊임없이 이동하는 것이어야 한다. 그러한 이동이야말로 독자 개개인에게 해석의 다양성을 주고 그래서 더욱 풍부한 감정을 생성시키는 것이다. 결국, 그에게 예술은 의미 작용을 무효화하고, 주체를 해체함으로써 얻어지는 것이면서 동시에 이미 존재하는 상투성의 틀을 전복하고 끝없이 새로운 것을 생성해내는 것일 뿐이다. 따라서 우리가 감각으로 만나는 진실은 이미 존재하는 일반적 형태나 틀이 아니다. 여기에는 어떤 종류의 모범도 없다. 표현된 것들 사이에는 어떠한 동일성도, 유사성도 있을 수 없다. 이것이 들뢰즈 예술론의 가장 중요한 개념 가운데 하나인 ‘차이’다.

 

‘차이’는 두 사물들 사이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반복적으로 발생한 변화에서 생긴 불일치이다. 그것은 정체성과 아무 관련을 갖지 않는 것으로 차이 그 자체일 뿐이다. 따라서 차이를 표현하는 예술은 결국 비재현적인 것이고, 개념 파기적인 것이다. 그것은 무한질주의 시간 속에서 반복되는 연속물이다. 따라서 예술 작품은 원본과 정체성을 전혀 찾을 수 없는 시뮬라크르에서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차이들이 연속물로 생성되는 것이다. 모든 대상은 각 순간마다 달리 지각되기 때문에 예술의 표현 또한 달라져야 하는 것이다.

 

난다, 2007

 

‘난다’ 이미지는 난다 그 자신이 아니다. 그것은 자신이라는 원본의 정체성과는 아무런 관계를 갖지 않는 시뮬라크르다. 사진 속 난다 이미지는 원본이 없는 복제본이다. 무한질주의 시간 속에서 불쑥 불쑥 튀어나오는 들뢰즈의 ‘차이’를 표상한 것이다. 이것도 되고, 저것도 되는 이중 존재의 모호성, 그래서 발생하는 ‘차이’, 그로 인한 생성과 소멸, 끝없는 운동에 대한 감각적 이미지화다. 이는 고전주의와 근대주의가 표방하는 전범의 존재, 그로 인한 가치의 발생 그리고 다시 그로 인한 위계의 질서라는 영역에 대한 통렬한 비웃음이다. 그래서 난다의 사진은 사진에 대한 부정이다. 더 분명히 말하자면, 사진이 사실의 기록이라는 믿음을 전복시키는 것이고 동시에 세계가 사실로 이루어져 있다는 사실을 부인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의 시뮬라크르들은 사진 파괴다.

 

작가 난다의 사진은 마그리트의 그림〈겨울비>의 시뮬라크르다. 마그리트의〈겨울비〉의 중절모 신사가 난다 안에 이주해 있다. 들뢰즈 세계관의 인간인 그 유목민을 표상한 것이다. 그것은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라는 시간 흐름의 허무함에 대한 표상이다. 그래서 이 사진은 시공을 초월한 끊임없는 시뮬라크르의 허망함과 두려움에 대한 감각적 표상이자, 재현과 이미지 사이에 존재하는 서사라는 근대적 구조의 파괴를 노린 물질적 표상이다. 그래서 그의 사진은 통렬하지만, 고독하다. 현대인의 세계가 그 안에 있다.

 

 

김홍희, 2009

 

무엇으로 보이는가? 작가는 분명히 몽골의 고비 사막을 찍었다. 그렇지만 독자의 눈에 보이는 것은 꼭 사막만은 아니다. 바로 게슈탈트의 전환 때문에 그렇다. 사진에서 게슈탈트의 전환을 읽는다는 것은 창조적 읽기이다. 그것은 작가의 의도와는 관계없이 자신의 시선을 통해 사진을 읽는 것이다. 게슈탈트의 전환이 들뢰즈가 말하는 시뮬라크르의 형성과 그 때문에 발생한 차이와 뗄 수 없는 현상이기 때문이다. 현대 세계에서는 무엇이 실재이고, 무엇이 환상인지 알 수 없다. 영화 매트릭스나 인셉션에 나타나는 세계다. 장자의 호접지몽이나 인도의 우빠니샤드 세계에 나타난 신비주의다. 그것이 산 속 깊이에 존재하는 것이 아닌 일상의 티브이와 인터넷 그리고 이미지의 홍수 속에서 퍼져 있는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볼 때 김홍희의 사진은 우리가 사는 실재보다 더 실재 같은 복제 세계의 표상이다. 그 사진은 그 대상의 실재와는 무관한 시뮬라크르로 계속 만들어지는 기호로서 기능할 뿐이다. 사진을 읽는 사람에게 여인의 벗은 몸을 보여주고 싶었든 그렇지 않든, 그것은 아무런 의미를 갖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사진이 몽골의 고비 사막을 찍었는지의 사실 여부 또한 아무런 의미를 갖지 않는다. 그럼에도 사진에는 고비사막이라는 가치가 강제적으로 개입되어 있다. 지구위성항법장치(GPS) 표시라는 의미를 과시하는 기의 때문에 그렇다. 따라서 김홍희의 사진은 포스트 모던의 세계관을 재현하면서 포스트 모던으로 가지 못한 채 근대 전통의 증언적 가치를 드러내고자 하는 강박증이다. 결국 모더니즘의 미학을 탈피하려 하나 하지 못하고 다시 모던의 다큐멘터리 세계로 돌아가는 행보다. 아니라면 모더니즘과 포스트 모더니즘이 어색하게 공존하는 또 다른 장(場)에 대한 시도일까?

 

 

 

올렉 도우, 2007

 

무한한 재생 안에 새로운 것이란 있을 수 없다. 생성과 소멸 사이에 변화라는 이름의 운동이 끊임없이 반복되는 무의미한 순환만 있을 뿐이다. 그래서 현실은 식별할 수 없는 것들로 섞여 단지 허(墟)한 것들로만 채워진 것이다. 세계는 이미 이미지를 둘러싼 것으로만 구성되어, 그 안에 남은 것은 단편적이고 찰나적인 시뮬라크르만 있기 때문에 궁극적 생명이 존재할 수 없다. 지향하는 의미들로 꽉 차 있으나 속은 텅 비어 있는 공의 세계. 비어 있으나 운동력을 가지고 또 새로운 뭔가를 생성하는 그 이미지, 이것은 아무 것도 존재하지 않는 무(無)는 아니다. 세계가 무가 될 수 없는 허탄함은 그 공으로부터 생성되는 무한한 것들이 현대 사회가 생성하는 생명과 물질의 본질이 된다. 이제 들뢰즈에게 와서 예술은 외형이나 행위 혹은 의미와 같은 대상이나 어떤 종류의 감성이나 이성 혹은 이데올로기를 재현하는 것이 아니다. 예술이란 변화를 통해 차이를 일으키고 종국에는 파멸로 이끄는 운동들을 포착하는 것일 뿐이다.

 

올렉 도우의 연작 인물 사진이 보여주는 것은 감각이 바깥 세계와 충돌하여 발생하는 운동력의 결과다. 그 감각은 대상에 내재하는 (혹은 내재하는 것으로 인식하는) 그 어떤 성격과 감각을 통해 나타나는 대상을 구별하려 하는 것을 지울 뿐이다. 아니, 또 다른 형상을 재현 생성할 뿐이다. 이전의 것을 파괴하고 그 위에 군림하면서 만들어내는 것이다. 그래서 도우의 눈은 들뢰즈의 눈과 같이 운동적이고, 감각적이고, 그래서 다기능적이다. 그래서 그 눈은 전환적인 감각 기관이 된다. 도우의 연작 사진은 이런 눈의 변화, 몸의 변화를 포착한다. 그 감각의 운동이 무상(無常)하다. 그러면서 그 안에서 존재는 소멸될 뿐이다.

 

 

이혁준, 2008

 

눈으로 보는 것은 과연 실재하는 것인가? 혹시 보이는 것이 허구라면, 보는 주체나 보이는 대상 또한 허구는 아닐까? 들뢰즈에 의하면 보고 인식하는데 필요한 여러 구성 요소 즉 눈, 시신경, 뇌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본다’는 행위가 일어나지만 사실 그것은 눈이 이동하면서 잡다하게 보는 것을 뇌가 일목요연하게 정리하여 나타내는 행위에 불과하다고 했다. 그래서 눈으로 보이지 않는 그 감춰진 것을 드러내야 하는 것이야 말로 예술이라고 했다. 무엇이라고 인식하는 것은 이미 눈으로 본다는 작용 이전에 발생한 상태이며, 본다고 생각하는 것은 인식의 현상을 해석하여 객체로 구분하려는 자아의 착각일 뿐이다.

 

이혁준의 사진《포레스트 에덴》은 우발적이고 감각적인 방법을 통하여 닮아 있다는 점에서 들뢰즈의 예술론에 충실하다. 그는 사진이라는 예술이 갖는 기계성을 지워버리고, 그 자리에 창조성을 위치시킨다. 그렇지만 철저히 물질론 위에서 만들어낸 것이다. ‘잃어버린 숲’을 구성하는 하나하나의 조각은 현실에서 존재하는 분명한 형상이지만 사진은 시뮬라크르라는 파편들을 모아 놓은 것에 불과하다. 그 시뮬라크르들이 한데 모여 보여주는 전체는 뭔가 닮은 흔적일 뿐, 결코 실존이 아니다. 그 둘의 사이에 닮음은 있지만, 결국은 극복해야 할 대상이다. 이혁준의 사진에서 붓다를 만나는 것은 이 지점에서다. 만물의 생성과 소멸은 어떤 인(因)이 있고, 그것에 다른 조건이 연(緣)하여 일어나(起)는 어떤 과(果)의 세계, 그 부질없는 윤회의 세계, 끝내 극복해야 할 길고 긴 시간. 이혁준은 그 끝없는 변화의 두려움을 기계에서 감각으로, 재현에서 창조의 예술로 만들었을 것이다.

 

 

출처: 아시아 평화 이광수

 

 

 

장 보드리야르 1929년 7월 29일 프랑스 북동부 지방 렝에서 태어났고, 소르본 대학에서 수학하였다. 장 보드리야르는 '포스트모더니즘의 큰 별' 혹은 '하이테크 사회이론가'라고 불리운다. 프랑스의 대표적인 사상가 중 한 명으로써 ‘시뮬라시옹(가장, 위장)’이론은 그를 유명하게 만들었다. 쉽게 이해하자면, 영화 '매트릭스'의 가상현실을 생각해 볼 수 있다. 실재가 실재가 아닌 것으로 전환되는 과정을 설명한 '쉬뮐라시옹 이론'은 현대를 풀이하는 독창적인 이론으로 평가받는다. 사물을 복제한 이미지, 기호들로 분석한 그의 이론은 당시로는 매우 파격적인 것들이었다. 원본과 복사본, 현실과 가상현실의 경계와 구분이 없어진 현대사회를 '복제의 시대'라고 말한 그의 평가는 현대사회에 대한 가장 단적인 해석이라고 평가받으며 "현대사회가 곧 시뮬라시옹이다"라는 명제가 유행하게 된다.

그의 급진적인 성향은 그를 도발적이면서도 독특한 이론가로 자리매김시켰다. 그는 사회학과 철학의 테두리를 거부하며 끊임없이 전통 사회이론을 거부하며 독자적인 행보를 걸어왔다. 철학, 문화, 사회 등 영역을 넘나드는 그의 활동으로 인하여 그의 스타일은 다양해졌다. 그가 제시했던 화두는 늘 논란의 소용돌이에 있었다. 1991년 그를 유명하게 만든 『걸프 전쟁은 일어나지 않았다』에서 그는, 걸프전쟁은 TV 이미지에 의한 것이었을 뿐 실제로 정치적 변화는 없었다는 견해를 제시했고 영미권의 질타를 받았다. 또한 미국 뉴욕 9.11 테러에서는 테러와 그것을 야기한 세계화를 동시에 부도덕한 것으로 비판해 또 한차례 설전을 벌이게 했으며, 한국에 대한 지적에서는 분단이라는 갈등 경계가 해결되면 문화적이고 비물질적인 분쟁이 또 다른 문제가 될 것이라고 지적한 바 있다.

 

주요저서로 『소비의 사회』(1970), 『기호의 정치경제학 비판을 위하여』(1972), 『생산의 거울』(1973), 『시뮬라크르와 시뮬라시옹』(1981), 『완전범죄』(1995), 『아메리카』(1997), 『사진에 관하여』(1999), 『테러리즘의 정신』(2002) 등이 있다.

 

 

20130717-20210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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