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과 신화

그대 내면의 붓다

미송 2021. 4. 25. 16:06

무엇을 찾아 여기에 왔을까?

 

 

온 곳에 대한 기억은 막연하고 갈 곳에 대한 희망은 어디에도 없다. 이렇게 희망도 목적지도없는 상태가 그대로 편안하다. 이제 또 어떤 삶의 길이 기다리고 있을 것인가, 흥미진진하다.

 

오늘, 옆집에 사는 바푸에게 장난감을 사다 주었다. 이것은 나의 어린 시절 신에게 바치는 감사의 선물이다. 그는 가르치는 것 없이 가르친다. 내가 청하지 않아도 많은 것을 준다. 그는 주려고 하는 마음이 없는데 내게로 오는 선물은 그치지 않는다.

 

스승은 우리 앞에 놓인 철책이 아니다. 그는 우리가 통과해야 하는 문이다. 그는 죽은 동시에 언제나 살아 있다. 이 역설을 사랑하는 사람은 스승의 문을 통해 어린 신을 만난다. 길가에 들꽃을 만나고, 반얀나무의 그림자와 만난다. 황색 두건을 쓴 목동과 만나고, 데칸 고원의 먼지 바람과 만난다. 이 만남은 행선지 없는 길 위에서 이루어진다. 그러므로 이 길을 가는 사람은 깨달음이 방편이라고 말할 수 있다. 방편을 통해 깨달음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 방편이 깨달음이고 깨달음이 방편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는 이것이 진정한 이해의 길이라고 말한다.

 

오쇼는 ‘나는 붓다다’라는 전제에서 출발하라고 한다. 이해의 길을 가는 사람에게 이 말은 참으로 놀라운 선언이다. 왜냐 하면 이 말을 듣는 순간 그에게는 이미 출발점도 없고 목적지도 없기 때문이다. 그는 스승의 모든 말이 동어 반복이라는 것을 이해한다. 수많은 모순조차 동어반복이다. 논리학에서는 이것을 오류라고 말할 것이다. 그러나 ‘장미는 장미고 장미다’라는 말이 논리적으로는 오류일지라도 이해의 길에서 이밖에 달리 할 말이 없다.

 

오쇼라즈니쉬 반야심경 강의, 옮긴이의 글- 손민규

 

 

 

pp12~31

 

그대 내면의 붓다

 

나는 그대 안의 붓다에게 절한다. 그대는 미처 모르고 있겠지만, 꿈에도 생각해본 적이 없겠지만 그대는 붓다다. 아무도 붓다 이외의 다른 존재가 될 수 없다. 불성은 그대 존재의 본질적 핵심이다.

 

이것은 미래에 일어날 일이 아니라 이미 일어난 일이다. 그대는 불성으로부터 나왔다. 불성은 원천인 동시에 목적이다. 우리는 불성으로부터 와서 불성으로 되돌아간다. 이 불성이라는 하나의 낱말 안에 모든 것이 다 들어 있다.

 

불성은 삶이라는 원(圓)을 완결짓는다. 불성은 알파에서 오메가까지 일체를 포괄한다. 그러나 지금 그대는 깊이 잠들어 있다. 그대는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 모른다. 그대가 붓다가 되어야 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그대 자신이 이미 붓다라는 사실을 깨닫기만 하면 된다. 그대 자신의 원천으로 되돌아가면 그뿐이다. 그대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기만 하면 된다. 자신의 본래 면목과 직면하면 불성이 드러날 것이다.

 

그대가 자신의 본래 면목을 보게 되는 날, 온 우주 전체가 깨달음을 얻는다. 특정한 한 개인이 깨달음을 얻는 것이 아니다. 어떻게 한 개인이 깨달을 수 있겠는가? 특정한 ‘한 사람’이라는 개념 자체가 깨닫지 못한 마음에서 나온 것이다.

 

‘나’가 깨닫는 것이 아니다. 깨달음을 얻기에 앞서 ‘나’가 떨어져 나가야 한다. 그러니 어떻게 ‘나’가 깨달을 수 있겠는가? 이것은 터무니없는 생각이다.

 

내가 깨닫는 날 우주 전체가 깨달음을 얻었다. 깨달음의 순간 이후로 나는 붓다 이외의 다른 것을 보지 못했다. 이 세상 모든 것이 수많은 형태와 이름을 갖고 있으며 수많은 문제를 안고 있지만 그들 모두가 붓다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우주 삼라만상이 붓다 외에 다른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나는 그대 안의 붓다에게 경의를 표한다.

 

여기 이렇게 많은 붓다가 한 자리에 모인 것을 보니 참으로 기쁘다. 그대가 내가 있는 이곳으로 왔다는 사실 자체가 그대 자신의 불성을 깨닫는 출발점이다.

 

그대의 가슴 속에 자리잡은 나에 대한 존경과 사랑은 그대 자신의 불성에 대한 사랑과 존경 외에 다른 것이 아니다. 나에 대한 신뢰는 그대 외부의 어떤 것에 대한 믿음이 아니다. 그것은 곧 그대 자신에 대한 신뢰이다. 나를 신뢰함으로써 그대는 자신을 신뢰하는 법을 배우게 될 것이다. 나에게 가까이 옴으로써 그대는 그대 자신과 가까워질 것이다.

 

이미 있는 것을 인식하기만 하면 된다. 다이아몬드는 이미 거기에 있다. 다만 그대가 잊고 있을 뿐이다. 또는 애초부터 그 다이아몬드에 대해 전혀 생각도 못하고 있었을 뿐이다.

 

여기 에머슨(1803~1882 : 미국의 사상가이며 시인 영혼의 고향인 자연으로 돌아갈 것을 제창했으며, 청교도적인 인간관을 부정하고 동양의 신비 사상에 영향받았다)의 유명한 말이 있다.

 

“인간은 몰락한 신이다.”

 

나는 한편으로는 이 말에 동의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동의하지 않는다. 그의 통찰력에는 어떤 진리가 담겨 있다. 그것은 인간이 본래 제 모습 그대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진리이다. 이 말에는 분명히 통찰력이 깃들어 있다. 하지만 다소 전도(顚倒)되어 있다.

 

인간은 몰락한 신이 아니라, 만들어지고 있는 신이다. 인간은 움트고 있는 붓다다. 싹은 진작부터 존재했으며, 이 싹은 언제라도 꽃으로 피어날 수 있다. 다만 얼마간의 노력, 약간의 도움만 있으면 이 도움은 애초에 없었던 것을 새로이 만들어 내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이미 거기에 있다. 그대의 노력은 다만 그것을 드러내는 일에 불과하다. 이미 거기 감춰져 있던 것을 밝혀낼 뿐이다. 이것은 발명이 아니라 발견이다. 진리는 이미 거기에 있다. 진리는 영원하다.

 

이 경문들을 주의 깊에 들어라. 이 경문들이야말로 불교 문헌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다. 그래서 이 경문들은 심경이라고 부른다. 이 경전은 불교의 가르침 중에 심장부인 것이다. 나는 아주 처음부터 시작하고자 한다. 이 지점에서부터 출발해야 불교가 의미를 지닐 수 있다.

 

그대 자신이 붓다라는 사실을 가슴 깊이 새겨라. 어쩌면 이 말이 뻔뻔하게 들리거나 허무맹랑한 가설처럼 들릴지도 모른다. 나는 그것을 안다. 그대는 이 말을 전적으로 믿기 힘들 것이다. 당연한 일이다. 나는 그것을 이해한다.

 

(중략)

 

유사 이래 수많은 성직자들이 ‘너는 거지다. 너는 무지하다. 너는 죄인이다’라는 관념을 주입시켜 왔다. 그대는 깊은 최면에 걸려 버렸다. 이 최면 상태에서 깨어나야 한다. 이 최면 상태를 파괴하기 위해 나는 ‘그대 안의 붓다에게 절한다’는 말로 시작하는 것이다.

 

내게는 그대들 모두가 붓다다. 이 기본적인 사실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깨달음을 얻으려는 그대의 모든 노력은 허사이다. 그대는 이미 ‘그것’이다! 이런 이해를 묵시적으로 전제해야 한다. 이것이 올바른 출발점이다. 그렇지 않으면 그대는 길을 잃을 것이다. 이것이 올바른 출발점이다.

 

이런 관점으로부터 출발하라. 이런 관점이 ‘나는 붓다다’라는 일종의 에고를 만들어 낼까 봐 염려하지 말라. 그런 걱정은 필요없다. 이 반야심경의 모든 구절이 에고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밝혀 줄 것이다. 오직 에고만이 실재하지 않는다! 다른 모든 것은 실재한다. 세상은 환상이며 영혼만이 실재한다고 가르치는 사람들이 있다. 오직 ‘나’만이 진실이며 다른 모든 것은 환상이고 마야(마음이 만들어내는 환상의 세계)일 뿐이라고 설교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붓다는 정반대로 말한다. 그의 말에 의하면 ‘나’만이 허위이며 다른 모든 것은 실재다.

나는 붓다의 관점에 동의한다. 붓다의 통찰력은 매우 예리하다. 가장 깊이 꿰뚫어보는 안목이 있다. 지금까지 어느 누구도 붓다의 통찰력을 능가하지 못했다. 그만큼 깊고 높은 차원을 궤뚫어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대는 붓다다. 그대 몸의 세포 하나하나, 마음속의 모든 상념들이 이 사실을 선언하게 하라.

‘나는 붓다다’라는 이 선언이 그대 존재의 구석구석까지 파고들게 하라. 그리고 ‘나’라는 에고에 대해서는 걱정하지 말라. 이 문제는 저절로 사라지게 되어 있다.

 

나와 불성은 공존할 수 없다. 불성이 드러나면 나는 자취를 감춘다. 불을 밝히면 어둠이 사라지듯이. 반야심경의 경문으로 들어가기 전에 약간의 구조에 대해 이해하는 것이 도움이 될 것이다. 고대의 불교 경전은 일곱 가지의 사원에 대해 말한다. 수피(이슬람 신비주의 전통, 직접적 체험을 통한 신과의 합일을 중요시 한다)들이 일곱 개의 골짜기를 언급하고, 힌두교에서 일곱 개의 차크라를 말하는 것과 같다.

 

첫 번째 사원은 육체의 사원, 두 번째는 심리 신체 사원, 세 번째는 심리학적인 사원, 네 번째는 심리 영적인 사원, 다섯 번째는 영적인 사원, 여섯 번째는 영성 초월의 사원, 그리고 일곱 번째로 초월의 사원. 사원 중의 사원은 이 초월의 사원이다.

 

이 반야심경은 일곱 번째 사원에 해당한다. 이 경전은 일곱 번째 사원에 든 자, 초월적이고 절대적인 경지에 오른 자의 선언이다.

 

(중략)

 

공산주의자, 막시스트, 행동주의 심리학자, 무신론자들은 인간은 육체일 뿐이라고 믿는다. 이런 믿음 자체가 더 고차원적인 영역으로 가는 문을 닫아 버리고, 마침내 그들은 장님이 되고 만다. 물론 물질은 분명히 존재한다. 물질적 육체는 분명히 존재하므로 증명하려고 애쓸 필요조차 없다. 그리고 증명할 필요도 없는 이유로 해서 육체만이 유일한 실체로 인정된다. 이것은 완전히 넌센스다.

 

이렇게 되면 인간은 모든 존엄성을 상실한다. 성장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면, 성장해 나아갈 수 있는 가능성이 없다면 삶에는 어떠한 존엄성도 있을 수 없다. 인간은 하나의 사물로 전락한다. 이때 그대는 가능성을 향해 열려 있는 존재가 아니다. 그대에게는 육체 이상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그대는 육체에 불과하다.

 

그대는 먹고 배설하고 섹스하고 아기를 낳을 것이다. 이런 일을 되풀이 하다가 어느 날엔가 덧없이 죽을 것이다. 세속적이고 하찮은 일이 기계적으로 반복될 뿐이다. 그러나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삶에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어떻게 시와 춤이 있을 수 있겠는가?

 

스키너는 자유와 존엄을 넘어서라는 책을 썼다. 그러나 이 책은 넘어서라는 말 대신 자유와 존엄성의 아래로 라고 불러야 옳다. 이 책은 자유와 존엄성 이하의 관점을 나타내고 있다. 인간에 대해 가장 저차원적이고 추악한 관점을 표방하고 있다. 이것을 명심하라. 육체에는 아무 것도 잘못된 게 없다. 나는 육체에 반대하지 않는다. 육체는 아름다운 사원이다. 다만 육체를 전부라고 여기는 그 생각이 추한 것이다.

 

인간은 일곱 개의 칸을 가진 사다리에 비유될 수 있다. 그런데 그대는 첫 번째 칸에 동일시된다. 이렇게 되면 아무데로도 나아가지 못한다. 사다리는 이 세상과 피안의 세계를 이어준다. 이 사다리는 물질과 신을 연결시킨다. 그러므로 사다리 전체와의 관계 속에서 사용되기만 한다면 첫 번째 칸이라고 해도 전혀 문제될 게 없다. 만일 이 첫 번째 칸을 딛고 올라갈 디딤돌로 여긴다면 이것은 말할 수 없이 아름다운 일이다. 이때 그대는 육체에 감사를 표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나 사다리의 나머지 여섯 부분을 잊고 오로지 첫 번째 칸을 숭배하기 시작한다면, 사다리 전체에 대해서는 까맣게 잊고 첫 번째 단계에 갇혀 버린다면, 이때부터 문제가 발생한다. 이때 그 칸은 더 이상 하나의 단계가 아니다. 하나의 단계는 다른 단계와 이어질 때에 한해서 칸이 될 수 있다. 만일 그것이 더 이상 칸이 아니라면 그대는 거기에서 막혀 버린다.

 

물질적인 사람들은 항상 경직되고 고착되어 있다. 그들은 항상 무엇인가 결여되어 있다고 느낀다. 그들은 어디론가 나아가고 있다는 느낌을 갖지 못한다. 그들은 원을 그리고 돌고 있을 뿐이고 매번 같은 곳으로 되돌아온다. 그래서 그들은 지치고 권태를 느낀 나머지 자살을 생각하게 된다. 그들은 뭔가 자극적인 것을 찾는데 혈안이 되어 있다. 뭔가 새롭고 신선한 일이 일어나기를 고대한다.

 

그러나 이런 식의 삶에 무슨 새로운 일이 일어날 수 있겠는가? 우리가 열중하고 있는 모든

것은 장난감 외에 아무것도 아니다.

 

다음과 같은 프랭크 쉬드의 말을 음미해 보라.

 

“인간의 영혼은 삶의 목적과 의미를 희구하며 절규하고 있다. 그런데 과학자들은 ‘여기 전화기가 있다.’ ’봐라, 여기 텔레비전이 있다‘ 하고 말한다. 이것은 엄마를 그리워하며 울고 있는 어린아기에게 사탕을 주거나 우스꽝스러운 표정을 지어 보이면서 달래는 것과 같다. 급격한 발명의 물결이 우리의 정신을 빼앗아 갔다. 그래서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진짜 문제가 무엇인지 잊게 만들었다.”

 

현대 세계가 그대에게 제공한 모든 것은 사탕이나 장난감 외에 아무 것도 아니다.

 

사실, 그대는 엄마를 그리워하며, 사랑을 그리워하며 울고 있었다. 그대는 깨어 있는 의식을 희구했으며 삶의 의미를 찾고 있었다. 그런데 세상은 봐라 여기 전화기가 있고 텔레비전이 있다. 우리는 너를 위해 이렇게 멋진 것들을 많이 가지고 왔다 라고 말한다. 그리하여 그대는 잠시 그것들을 가지고 노는 데 정신을 쏟는다. 하지만 곧 그대는 싫증이 나고 따분해져서 다시 새로운 장난감을 찾기 시작한다.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상황이다. 어떻게 우리가 이런 식으로 계속 살아가는지 믿을 수 없을 정도다. 우리는 첫 번째 칸에 갇혀 버린 것이다. 이것을 명심하라. 그대는 육체 안에 있지만 육체가 그대는 아니다. 그대는 육체가 아니다. 이것을 끊임없이 자각하라. 그대는 육체 안에서 살아간다. 육체는 아름다운 거처다.

 

나는 육체를 반대하는 사람이 되라고 부추기는 게 아니다. 유사 이래 소위 유심론자라는 자들이 그래 왔듯이 그대의 육체를 부정하라고 말하는 게 아니다. 나는 단 한순간도 그런 식으로 말하지 않는다. 유물론자들은 육체가 전부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다른 극단에 서 있는 사람들은 육체가 환상일 뿐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들은 이렇게 말한다.

육체를 부숴라 그래야 환상이 깨지고 그대가 실재가 될 수 있다.

 

이렇게 극단적인 입장은 반작용에 불과하다. 유물론 자체가 유심론이라는 반동을 잉태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서로 다른 사람들이 아니다. 그들은 똑같은 사업을 벌이는 동업자다.

 

육체는 아름답다. 육체는 실재한다. 육체는 삶의 권리가 있으며 사랑받을 자격이 있다. 육체는 신의 선물이다. 그러니 단 한순간이라도 육체에 반대하지 말라. 또한 나는 육체일 뿐이라고도 생각하지 말라. 그대는 육체보다 훨씬 거대한 존재다. 육체를 하나의 도약대로 이용하라.

 

(중략)

 

꿈에 주목하라. 꿈에 대해 분명한 관점을 갖고 꿈이 전해 주는 메시지를 이해하라. 그러면 그대의 꿈을 분석하기 위해 다른 사람을 찾아갈 필요가 없다. 만일 그대가 자신의 꿈을 분석하지 못한다면 어느 누구도 그대의 꿈을 분석해 낼 수 없다. 그대의 꿈은 그대의 것이기 때문이다.

 

그대의 꿈은 철저하게 개인적이다. 어느 누구도 그대와 같은 꿈을 꿀 수 없다. 지금까지 그대와 같은 식으로 꿈꾼 사람은 아무도 없었으며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그대의 꿈을 설명해 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만일 누군가 그대의 꿈을 해석한다 해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그의 해석일 뿐이다. 오직 그대만이 그대 자신의 꿈을 들여다볼 수 있다. 실제로는 꿈을 분석할 필요도 없다. 꿈을 전체적으로 관찰하라. 분명한 눈으로, 주의 깊은 의식으로 보라. 그러면 꿈이 전하는 메시지를 들을 것이다. 꿈은 아주 큰 소리로 외치고 있다. 3년 4년 5년 7년 동안 정신분석을 받으러 다닐 필요가 없다. 밤마다 꿈을 꾸고 낮에는 그 꿈을 분석하기 위해 정신분석가를 찾아가는 사람은 서서히 꿈의 세계에 포위당한다.

 

(중략)

 

프로이드는 화장실 세계의 거장이다. 그는 화장실에 산다. 화장실이 그의 사원이다. 그의 눈으로 보면 모든 예술이 정신질환의 일종이다. 아름다운 시도 정신병이다. 모든 것이 성도착증에 지나지 않는다. 만일 프로이드 식의 정신분석이 득세한다면 세상에는 칼리다사도, 셰익스피어도, 미켈란젤로도, 모차르트도, 바그너도 존재할 수 없을 것이다. 이 사람들은 비정상이다. 프로이드의 관점에서 보면 이 사람들은 정신병 환자이다. 가장 위대한 사람들조차 가장 낮은 차원으로 전락한다.

 

프로이드에 의하면 붓다도 정신병 환자에 불과하다. 붓다의 모든 말이 억압된 성욕 외에 다른 것이 아니다. 이런 접근 방식은 인간의 위대성을 추악함으로 전락시켰다. 이것을 경계하라.

 

붓다는 결코 환자가 아니다. 사실 진짜 환자는 프로이드 자신이다. 붓다의 침묵, 붓다의 기쁨, 붓다의 지복은 병이 아니다. 그것은 최고로 건강한 상태이다.

 

노래하고 춤추지 못하는 사람들, 축제를 즐기지 못하는 사람들, 기도하지도 못하고 명상하지도 못하는 사람들, 창조적인 일이라곤 아무것도 하지 않는 사람들, 프로이드에게는 이런 사람들만이 정상인이다. 직장에 나가고, 집으로 퇴근하고, 먹고, 마시고, 잠자고, 그러다가 창조적인 흔적이라곤 조금도 남기지 못하고 죽어버리는 사람들만이 정상인이다. 이런 정상인들은 아주 평범하고 둔하고 시체처럼 보인다. 어쩌면 프로이드 자신이 비창조적인 인간이었기 때문에 창조성을 정신질환으로 비난했는지도 모른다. 그런 의심이 든다. 그는 평범한 인간이었을 가능성이 짙다. 그 자신이 너무나 평범했기 때문에 세상의 모든 위대한 사람들에 의해 감정적인 상처를 받았던 것이다.

 

세 번째는 심리학적인 단계이다. 아들러는 심리학의 세계에 산다. 권력에의 의지가 그의 세계이다. 뭔가 있어 보이기는 한다. 에고 중심적이기는 하지만 그럴듯한 일면이 있다. 프로이드 보다는 다소 열려 있다. 그러나 여기에도 문제는 있다. 프로이드는 모든 것을 성으로 환원시켰듯이 아들러는 모든 것을 열등 콤플렉스로 돌려 버린다. 아들러의 눈으로 보면, 사람들은 위대한 인물이 되고자 하는 것은 열등감 때문이다. 깨닫고자 노력하는 사람은 열등감을 느끼는 사람이다. 그는 권력 투쟁을 하는 중이다.

 

그러나 이것은 완전히 틀린 시각이다. 우리는 붓다, 그리스도, 크리슈나 같은 사람들을 보아 왔다. 그들은 철저하게 자신을 내맡기고 머리를 숙였다. 그들의 태도를 권력 투쟁이라고 부르는 것은 불가능하다.

 

한 명의 붓다가 피어날 때 그에게는 우월감이라는 개념이 전혀 없다. 그는 존재계 전체에 엎드려 절한다. 그에게는 ‘나는 너보다 성스럽다’는 생각이 없다. 존재하는 모든 것이 성스럽다. 티끌 한 점까지 신성하다. 그는 자신을 우월한 존재로 생각하지 않는다. 애초부터 우월해지기를 열망하지도 않았다.

 

(중략)

 

주위를 둘러보면 그대는 깜짝 놀랄 것이다. 신이 사라졌음에도 불구하고 신앙은 아직 사라지지 않았다. 신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대신 그 자리에 캐딜락이나 링컨이 버티고 있다. 진짜 신은 사라졌지만 인간은 새로운 신을 만들었다. 영화배우들이 신으로 군림한다.

 

역사상 인간의 의식이 이토록 낮은 차원으로 굴러 떨어진 것은 처음 있는 일이다. 설령 그대가 간혹 신을 기억한다 해도 그것은 공허한 단어에 불과하다. 그대는 괴롭거나 절망을 느끼는 경우에만 신을 사용한다. 마치 아픈 사람이 아스피린을 찾듯이 말이다. 소위 종교라고 불리는 것들이 그대에게 이런 식의 믿음을 심어 주었다.

 

그들은 이렇게 말한다.

 

“하루에 세 번씩 신을 복용하라. 그러면 아무 고통도 느끼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그대는 고통을 느낄 때마다 신을 떠올린다. 그러나 신은 아스피린이 아니다. 신은 진통제가 아니다. 습관적으로 신을 떠올리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또 어떤 사람들은 직업적으로 신을 떠올린다. 사실, 그는 신과 아무런 관련도 없다. 그저 이것을 생계수단으로 삼고 있을 뿐이다. 그는 신을 떠올리는데 탁월한 능력을 발휘한다.

 

이렇듯 습관적으로 또는 직업적으로 신을 상기하는 사람들은 있어도 깊은 사랑으로 신을 떠올리는 사람들은 아무도 없는 것 같다.

 

(중략)

 

아침 저녁으로 신을 기억한다 해도 그대는 아무것도 얻지 못한다. 그것은 가슴에서 우러나온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대는 입으로만 신의 이름을 부른다. 이것은 기계적으로 반복되는 심리현상에 불과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을 떠올리지 않으면 그대는 무엇인가 빠졌다고 느끼기 시작한다. 그것은 의례적인 절차가 되었다. 신을 의례적인 형식으로 만들지않도록 주의하라. 신에 관해 전문가가 되지 않도록 주의하라.

 

아주 유명한 이야기가 있다.

 

명성이 자자한 요기가 있었다. 그는 왕과 한 가지 약속을 했다. 그가 깊은 삼매경에 들어 1년 동안 땅 속에 묻혀 있을 수 있다면 왕이 그 나라에서 최고 훌륭한 말을 주기로 했던 것이다. 왕은 그가 말 이야기만 나오면 사족을 못 쓸 만큼 지독한 애마가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요기는 왕의 제안에 동의하고 1년 동안 생매장 당해 있기로 했다.

 

그런데 요기가 묻혀 있는 동안 왕국이 망해 버렸다. 요기를 파내야 한다는 것을 기억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10여 년이 지난 후, 누군가 문득 요기를 기억해 냈다.

 

그 요기는 어떻게 되었을까

왕이 즉시 사람들을 보내 요기가 묻혔던 자리를 파 보도록 했다. 요기는 여전히 깊은 몰아지경에 빠져 있었다. 예전에 약속했던 만트라를 그의 귀에 대고 속삭이자 그가 깨어났다. 그가 눈을 뜨자마자 내뱉은 첫마디는 이 말이었다.

 

내 말은 어디 있는가?

 

10여 년을 땅 속에 묻혀 침묵으로 지냈지만 요기의 마음은 조금도 바뀌지 않았다. 그가 내뱉은 첫마디는 내 말은 어디 있는가? 라는 것이었다.

 

이 사람이 정녕 무아지경에 빠져 있었던 것일까? 그가 진정 삼매경에 들어 있었던 것인가? 그가 신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을까? 아니다, 그는 줄곧 말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다. 그는 아주 숙련된 전문가에 불과하다. 그는 숨을 멈추고 가사 상태로 들어가는 법을 배웠다. 그것은 기술적인 문제에 불과했다. 10년 동안 그렇게 깊은 침묵 속에 있었지만 마음은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만일 그대가 기술적으로 신을 기억한다면, 직업적으로 신을 생각한다면, 습관적이고 기계적으로 신을 생각한다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모든 일이 가능하다. 하지만 일체의 가능성은 가슴을 통해 일어난다. 그래서 이 경전을 가슴의 경전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어떤 일을 하든 깊은 사랑과 몰입 그리고 진지함을 갖고 하지 않는다면, 그대의 존재 전체를 거기에 쏟아붓지 않는다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어떤 사람들에게 종교는 일종의 의족과 다를 바 없다. 의족에는 온기도 없고 생명도 없다. 의족은 그들이 기우뚱거리며 걷는 데는 도움이 되지만 결코 그들의 일부가 되지는 않는다. 그들은 날마다 의족을 몸에 부착해야 한다.

 

수많은 사람들에게 이런 일이 일어났다. 그대에게도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을 명심하라. 의족을 만들지 말라. 진짜 다리가 그대 안에서 자라나도록 하라. 그래야만 그대의 삶이 따스함과 즐거움을 가질 수 있다. 입가에 맴도는 거짓 미소가 아니라, 행복한 척 하는 허세와 가면이 아니라, 진짜 즐거움이 일어날 것이다.

 

흔히 사람들은 여러 가지 허위의 옷을 착용한다. 어떤 사람은 아름다운 미소를 짓고, 어떤 사람은 자비스러운 얼굴 표정을 만들어낸다. 또 어떤 사람들은 사랑이 넘치는 인격을 내보인다. 이것은 모두 의복에 불과하다. 깊은 곳에서 그들은 변함없이 똑같은 인물이다.

 

이 반야심경은 거대한 혁명을 일으킬 수 있다.

 

(중략)

 

이것을 알아야 한다. 여섯 개의 센터를 통과하고 그들이 내놓은 모든 대답이 지워진 다음에는 나는 누구인가 하고 물어도 아무 대답이 나오지 않는다. 전적인 침묵이 있을 뿐이다. 질문 자체가 그대 안에서 메아리칠 것이다. 나는 누구인가. 침묵이 있을 뿐이다.  어디에서도 대답이 나오지 않는다.

 

이 순간에 그대는 절대적으로 현존한다. 절대적으로 침묵한다. 조금의 파문도 일지 않는다. 나는 누구인가. 그저 침묵이 있을 뿐이다.

 

이때 기적이 일어난다. 질문을 던지는 것조차 불가능해지는 것이다. 이제까지 얻은 모든 대답이 터무니없다. 그리고 결국에는 물음을 던지는 일까지 터무니없게 된다. 먼저 대답이 사라지고 그 다음에는 질문 또한 사라진다. 질문과 대답은 공존을 통해서만 살아남을 수 있기 때문이다. 질문과 대답은 동전의 양면과 같다. 동전의 한 쪽 면이 사라지면 다른 쪽 면도 존재할 수 없다. 먼저 대답이 사라지고 그 다음에는 질문이 사라진다. 이렇게 물음과 답이 사라질 때 그대는 진정한 이해에 도달한다. 이것이 초월의 차원이다.

 

이제 그대는 안다. 하지만 그것을 말로 할 수는 없다. 그대는 분명히 알지만 그것을 정확하게 표현할 수 없다. 이제 그대는 자신이 누구인지 안다. 그대의 존재 깊은 곳으로부터 그것을 안다. 그러나 이것을 언어로 옮기기란 불가능하다. 그것은 실존적인 앎이다. 경전에서 얻은 지식이 아니다. 남에게서 빌려온 것이 아니다. 그대 안에서 솟아오른 앎이다.

 

이런 앎이 솟아날 때 그대는 붓다가 된다. 이때 그대는 웃음을 터뜨릴 것이다. 자신이 애초부터 붓다였다는 사실을 깨달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대는 언제나 붓다였다. 다만 그대 자신을 깊이 들여다보지 않았을 뿐이다. 그대는 외곽을 배회하고 있었을 뿐, 자신이 존재라는 집으로 들어가지 않았던 것이다.

 

철학자인 아더 쇼펜하우어가 홀로 거리를 걷고 있었다. 그는 생각에 골몰해 걸음을 옮기다가 다른 보행자와 크게 부딪쳤다. 충격에 놀란 보행자는 쇼펜하우어가 너무나 무심한 얼굴을 하고 있자, 화자 나서 소리쳤다.

 

당신이 뭔데 이따위로 행동하는 거요?

쇼펜하우어는 여전히 생각에 잠겨 말했다.

내가 무엇이냐고? 나도 그것을 알면 좋으련만.

 

아무도 모른다. 나는 내가 누구인지 모른다는 사실을 알아라. 이것이 여행의 시작이다.

 

타이핑 채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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