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누군가 나 대신 여행을 하는 것을 상상도 못 한다.
그런데 삶 속에선 누군가 나 대신 뭐라도 해주길 꿈꾼다.
여행지에서 나는 누군가 나 대신 내 짐을 드는 것을 상상도 못 한다.
그런데 삶 속에선 누군가 나 대신 내 짐을 들어주길 원한다.
여행지에서 나는 길을 잃어도 당황하지 않는다.
그런데 삶 속에선 길을 잃으면 낙담한다.
여행지에서 나는 세상 만물을, 차창 밖을 지나가는 여인의 뒷모습 하나라도 놓치지 않으려 한다.
그런데 삶 속에선 많은 것에 애써 눈감으려 한다.
여행지에서 나는 곧 다시 만나요, 손을 흔들고 헤어질 때 슬픔을 느낀다.
그런데 삶 속에선 작별 인사를 나눌 때 내가 예의에 어긋나 보이지 않았나를 생각한다.
여행지에선 내가 누구인지가 전혀 중요하지 않다.
그런데 삶 속에선 제발 나 좀 알아봐달라고 부질없는 말을 할 때가 있다.
여행지에서 나는 그 고장에서 가장 좋은 것을 찾아낼 줄 안다.
그런데 삶 속에선 내 고장에서 가장 좋은 것을 눈앞에 두고도 몰라본다.
여행지에서 나는 나 자신이 이방인임을 당연시한다.
그런데 삶 속에서 나는 행여라도 이방인이 될까봐 두려워한다.
여행지에서 나는 낯선 사람들에게 포기하지 않고 친절을 베푼다.
여행지에서 나는 거리의 악사들과 가장 자유로운 이들과 가장 슬퍼 보이는 이들과
이제 막 도시에 도착한 여행객들과 같은 소망을 갖는다.
그런데 삶 속에서 나는 친절함을 기대하는 손길을 뿌리치고 타인과 소망을 나누지 않는다.
여행지에서 나는 내가 걷고 있는 길을 오래전 누군가 걸었다는
이유만으로, 내가 앉았던 식당에서 누군가 다른 사람이 커피를
마셨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나의 존재와 남의 존재가 연결됨을 느낀다.
그런데 삶 속에서 나는 연결이 아니라 나와 남의 분리에 대해서만 생각한다.
여행지에서 나는 목표 따위는 생각하지 않고 더 알고 더 느끼는 데서 단순한 기쁨을 느낀다.
그런데 삶 속에서 나는 수많은 것들을 오로지 수단으로 삼는다.
여행지에서 나는 확실한 길만 찾아가지는 않는다. 불확실함이 많은 데 불평하지 않는다.
그런데 삶 속에서 나는 확실한 것만 찾는다.
여행지에서 나는 가장 용기 있는 자들과 가장 말이 잘 통하는 자들과
가장 정이 많은 자들과 가장 고통받는 자들과 친구가 된다.
그런데 삶 속에서 나는 가장 득이 되는 자들과 친구가 된다.
여행지에서 나는 외로울 때 해나 달이나 한 점 불빛과도 친구가 될 수 있다.
그런데 삶 속에서 나는 외로울까봐 자주 타협을 한다.
여행지에 나는 쉼 없이 많은 질문을 던진다.
그런데 삶 속에서 나는 곧잘 지루한 답변만 늘어놓는다.
여행지에서 나는 얼마나 자주 설레고 얼마나 자주 탄성을 지르던가?
그런데 삶 속에서 나는 기쁨에도 슬픔에도 고통에도 얼마나 자주 무감각하던가?
여행지에서 나는 해의 뜨고 짐 같은 가장 단순한 풍경에서도 위대한 지구의 운동 법칙을 느낀다.
그런데 삶 속에서 나는 눈앞의 일에 급급하느라 어떤 법칙에도
진리에도 이르지 못하고 있지 않은가?
로르카의 散文,<인상과 풍경>
페데리코 가르시아 로르카 : 1898년 6월 6일 스페인 남부의 푸엔테바케로스에서 태어났다. 강렬한 태양과 자연의 생명력, 다양한 이민족과 뒤엉킨 피의 역사 등 스페인에서 가장 독보적인 지역인 안달루시아의 신비는 어린 시절부터 줄곧 로르카를 사로잡아 작품 세계에 지속적으로 큰 영향을 미친다. 그라나다 대학에서 법학을 공부하다가 곧 그만둔 뒤 스페인 인문주의의 보고라 표현될 정도로 유수한 예술가와 학자를 배출한 마드리드 대학의 학생 기숙사 ‘레시덴시아 데 에스투디안테스’에 1919년부터 기거한다. 이곳에서 화가 살바도르 달리, 영화감독 루이스 부뉴엘, 시인 후안 라몬 히메네스 등의 문우들과 모임을 함께하며 본격적으로 문학의 기반을 닦는다. 첫 책으로 산문집 『인상과 풍경』을 출간한 이후 문학뿐 아니라 음악과 미술, 연극을 망라하는 예술 전반에 걸친 다양한 활동으로 국제적 명성을 쌓았다. 스페인의 시적 전통에 음악성과 리듬감, 독특한 비유, 신비적 감각 등을 재생시키는 천재성을 발휘하였으며, 극단 라 바카라를 창단해 스페인 전통극을 상연한다. 이러한 노력은 『피의 결혼식』의 대성공으로 이어지고 『예르마』, 『베르나르다 알바의 집』에 이르는 비극 삼부작으로 종결된다. 이밖에도 시집 『칸테 혼도 시집』, 『집시 민요집』 『익나시오 산체스 메히아스를 위한 애도』, 희곡 『대단한 구두장이 여인』, 『독신녀 로시타』 등을 출간했다. 스페인 내전 중인 1936년 8월, 고향 그라나다에서 프랑코 정권의 극우 민족주의자에 의해 사살되어 38세의 짧은 생애를 마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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