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문과 산문

정일근 <1초가 길 때> 外 2편

미송 2013. 8. 11. 10:35

     

     

     

    1초가 길 때 

     

     

     

     

    사랑이 위대한 것은

    번쩍, 빛의 속도보다 더 빠르게

    나를 찌르기 때문이다

    서정시가 위대한 건

    시 한 편을 읽는 그 짧은 순간

    사람의 영혼, 자연의 색깔로

    달궈지기 때문이다

    나를 찔러 쓰러뜨리지 못하는 사랑은

    나를 달구지 못하는 서정시는

    그건 실패한 암살범과 같다

    사랑은 목표를 향해 이미 당겨진 방아쇠

    서정시는 전부를 쓰러뜨리는 한순간의 감염

    테러리스트여 번개처럼 나를 찔러라

    당신의 칼끝 나를 치명상 입히는 데

    1초도 긴 시간이니

     

     

     

    은현리 홀아비바람꽃

     

    산다는 것은 버리는 일이다

    내 심장 꺼내고 그 자리에 채워 넣었던

    첫사랑 했으나, 그해 가을

    진해 바다로 투신하고 싶었던

    여린 나이에 감당할 수 없었던 심장의 통증까지

    추억에서 꺼내 내버린 지 오래다

     

    詩에 목숨 걸었으나, 당선을 알려주던 노란 전보

    첫 청탁서, 첫 지면, 첫 팬레터...詩로 하여 내 전부를 뛰게 했던

    무엇 하나 온전하게 남아 있지 않다

    가슴 설레며 읽은 신간 서적 책장에 꽂아둔 채

    표지가 낡기도 전에 잊히듯이

    산다는 것은 또 그렇게 잊어버리는 일이다

     

    만남보다 이별이 익숙한 나이가 되면

    전화번호 잊어버리고 주소 잊어버리고

    사람 잊어버리고, 나를 슬프게 하는 것 모두

    주머니 뒤집어 탈탈 털어 잊어버린다

    행여 당신이 남긴 사랑의 나머지를

    내가 애틋하게 기억해주길 바란다면

    그건 당신의 검산이 틀렸다

     

    솔발산 깊은 산길에 홀아비바람꽃 피었다

    잎 버리고 꽃잎 버리고 홀아비바람꽃 피었다

    나도 홀로 피어 있을 뿐이다

     

    그것이 내 인생이다

    내가 나를 인정하고부터 편안하다

    편안해서 혼자 우는 날이 많아 좋다

    다시 바람 불지 않아도 좋다

    혼자 왔으니 혼자 돌아갈 뿐이다

     

     

     

     

    *미나리아재빗과의 다년생 야생초. 이른 봄에 꽃이 핀다.

     

     

     

     

    가을 새벽의 연금술

     

     

     

    풀꽃의 마지막 詩는 붉은 바람이 거둬가신다

    들판의 나머지 문장은 푸른 어둠이 풀어놓으신다

    하늘이 제 눈물 받아 사람의 맨발 씻어드리는 새벽

    북쪽에서 돌아오는 시간의 찬 몸에서 찬 이슬 돋아날 때

    조용히 무릎 꿇고 마는 가을의 저 낮은 고해성사

    누가 물과 바람의 꿈을 연금술사의 적바림에 기록해 놓으셨나

    뜨거워지는 내 핏속으로 또르르 맺히는 한 방을 저 맑은 순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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