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 자료실

오세영 <한국 현대시 분석적 읽기>

미송 2013. 8. 26. 21:36

 

임화林和 (1908~1953) 본명은 인식(仁植), 서울 출생. 보성중학(普成中學) 중퇴. 잡지사 기자등을 역임하였음. 일제하에서 프롤레타리아 문학운동을 주도했고 여러차례의 전향 후 정부수립 과도기에 다시 <조선문학가동맹> 중앙집행위원이 되었으나 1947년 미국의 스파이라는 누명으로 북에서 사형 당함. 많은 마르크스주의 평론을 써서 프롤레타리아 문학운동의 이론가로 공인됨. 1926년 [매일신보]에 시<무엇을 찾니>를 발표함으로써 문단에 등단. 시집으로 [현해탄](1938), [찬가](1947), [회상回想 시집](1947) 등이 있음.

임화는 초기에 우리 문단에서 다다이즘이 문제되었을 때 다다이스트로 출발하여 2, 30년대엔 과격한 프롤레타리아 시인으로, 40년대 중반에는 친일 어용 문학평론가로, 40년대 후반에는 다시 공산주의 문인으로 복귀하는 등 시대 상황의 변모에 민감하게 반응했던 시인이다. 그의 시는 당대 프롤레타리아 문인들 가운데서는 비교적 성공을 거둔 편이었으나 한국 문학의 일반적 수준으로 볼 때 매우 미흡한 것이었다. 현실을 계급적 관점에서 파악한 역사 인식, 꼭 바람직하다고 말할 수는 없으나 시를 산문화시킨 것 등이 문학사의 한 관심거리로 남는다.  

 

우리 오빠와 화로 / 임화

 

사랑하는 우리 오빠 어저께 그만 그렇게 위하시던 오빠의 거북무늬

질화로가 깨어졌어요.

언제나 오빠가 우리들의 '피오닐' 조그만 기수라 부르는 영남(永男)

이가

지구에 해가 비친 하루의 모-든 시간을 담배의 독기 속에다 

어린 몸을 잠그고 사온 그 거북무의 화로가 깨어졌어요.

 

그리하여 지금은 화(火)젓가락만이 불쌍한 영남이하구 저 하구처럼

똑 우리 사랑하는 오빠를 잃은 남매와 같이 외롭게 벽에 가 나란히

걸렸어요.

 

오빠-.

저는요 저는요 알았어요.

왜- 그날 오빠가 우리 두 동생을 떠나 그리로 들어가신 그날 밤

연거푸 말은 권연을 세 개씩이나 피우시고 계셨는지

저는요 잘 알았어요. 오빠

언제나 철 없는 제가 오빠가 공장에서 돌아와서 고단한 저녁을 잡수

실 때 오빠 몸에서 신문지 냄새가 난다고 하면

오빠는 파란 얼굴에 피곤한 웃음을 지으시며

-네 몸에선 누에 똥네가 나지 않니- 하시던 세상에서 위대

하고용감한 우리 오빠가 왜 그날만

말 한마디 없이 담배 연기로 방 속을 메워버리시는 우리 우리 용감한

오빠의 마음을 저는 잘 알았어요.

천정을 향하여 기어올라가던 외줄기 담배 연기속에서 - 오빠의 강

철 가슴 속에 박힌 위대한 결정과 성스러운 각오를 저는 분명히 보았어

요.

그리하여 제가 영남이의 버선 하나도 채 못 기웠을 동안에

문지방을 때리는 쇳소리 마루를 밟는 거칠은 구둣소리와 함께-

가버리지 않으셨어요.

 

그러면서도 사랑하는 우리 위대한 오빠는 불쌍한 저의 남매의 근심을

담배 연기에 싸두고 가지 않으셨어요.

오빠 - 그래서 저도 영남이도

오빠와 또 가장 위대한 용감한 오빠 친구들의 이야기가 세상을 뒤집

을 때

저는 제사기를 떠나서 백 장에 일전짜리 봉통(封筒 - 봉투, 필자 주)에 손톱을 부러뜨리고

영남이도 담배 냄새 구렁을 내 쫒겨 봉통 꽁무니를 뭅니다.

지금- 만국지도 같은 누더기 밑에서 코를 골을고 있습니다.

 

오빠- 그러나 염려는 마세요.

저는 용감한 이 나라 청년인 오빠와 핏줄을 같이 한 계집애이고

영남이도 오빠도 늘 칭찬하던 쇠 같은 거북무늬 화로를 사온 오빠의

동생이 아니예요.

그리고 참 오빠 아까 그 젊은 나머지 오빠의 친구들이 왔다갔습니다.

눈물나는 우리 오빠 동무의 소식을 전해주고 갔어요.

사랑스런 용감한 청년들이었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청년들이었습니다.

 

화로는 깨어져도 화젓갈은 깃대처럼 남지 않았어요.

우리 오빠는 가셨어도 귀여운 '피오닐' 영남이가 있고 그리고 모

-든 어린 '피오닐'의 따뜻한 누이 품 제 가슴이 아직도 더웁습니

다.

그리고 오빠....

저 뿐이 사랑하는 오빠를 잃고 영남이 뿐이 굳세인 형님을 보낸 것이

겠습니까.

슳지도 않고 외롭지도 않습니다.

세상에 고마운 청년 오빠의 무수한 위대한 친구가 있고 오빠와 형님

을 잃은 수 없는 계집 아이와 동생

저희들의 귀한 동무가 있습니다.

 

그리하여 이 다음 일은 지금 섭섭한 분한 사건을 안고 있는 우리 동

무 손에서 싸워질 것입니다.

 

오빠 오늘 밤을 새워 이만 장을 붙이면 사흘 뒤엔 새 솜옷이 오빠의

떨리는 몸에 입혀질 것입니다.

 

이렇게 세상의 누이동생과 아우는 건강히 오늘 날마다를 싸움에서 보

냅니다.

영남이는 여태 잡니다. 밤이 늦었어요.

 

                                        - 누이 동생

 

1

임화는 식민지 치하 우리 프롤레타리아트 문학운동의 중심인물이다. 문학비평과 시창작 그리고 실천적 행동 모두를 포함해서 그렇다. 당시 한국의 프롤레타리아트 문학운동은 1세대라 할 김기진(金基鎭 팔봉(八峰)과 박영희(朴英熙)에 의해서 전개되고 있었는데 1920년 후반 소위 제 3 전선파라 불리는 임화, 김남천(金南天), 안막(安漠)등이 일본에서 귀국, 이 운동을 접수함으로써 제 2세대가 등장한다. <중략>

임화의 문학적 일생은 대부분의 프롤레타리아트 문인들이 그랬던 것처럼 끊임없는 변신과 전향의 연속이었다. 이를 두고 논자들 가운데는 당대 이데올로기 운동에 가해지는 일제의 외압에서 그가 부득이 선택한 생존의 방식이라고 해석한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꼭 그렇지만은 않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하나는 그러한 외압에도 불구하고 초연히 붓을 꺽어 자신의 지조를 지켰던 다른 문인들도 상당수 있었음(한용운, 김영랑, 심훈)에 비추어 그의 선택이 과연 필연적이었던 것인가하는 의문이 있기 때문이며 다른 하나는 공교롭게도 그가 항상 그 시대의 시류나 센세이셔널리즘의 중심을 추구했었다는 점 때문이다.<중략>

 

2

<우리 오빠와 화로>는 <네거리의 순이>와 함께 식민지시대의 가장 뛰어난 프롤레타리아트 시인, 임화의 대표작으로 알려져 왔다. 따라서 우리는 한마디로 이 작품을 통해 식민지 시대 프롤레타리아트 시의 수준을 가늠할 수 있게 된다.

<우리 오빠와 화로>가 1929년 2월 [조선지광(朝鮮之光)]에 발표되자 프롤레타리아트 문단의 당시 반응은 대단했다. 그것은 두가지였는데 하나는 작품의 수준에서 지금까지의 그 어느 것에 비해서도 탁월했다는 것이요 다른 하나는 프롤레타리아트 시의 한 형식적 전형을 창안해 냈다는 것이다. 이들의 용어를 빌리면 그것은 소위 '단편 서사시'라는 형식이다. 특히 당대 프롤레타리아트 문학비평의 대가라 할 김기진이 그러했는데 그는 자신이 문학작품을 읽고 눈물을 흘리기는 <벨텔의 슬픔>과 <그 전날 밤>을 제외하면 바로 임화의 <우리 오빠와 화로>와 같은 시의 형식으로 쓰여지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을 역설한다. <중략>

김기진이 말한 바 소위 '단편 서사시'란 다음과 같다.

첫째, 내용은 사건 혹은 네러티브이다.

둘째, 그 중에서도 핵심적인 부분이라 할 극적이고 긴장된 대목을 간결하게

서술해야 한다.

셋째, 디테일이나 성격 묘사같은 것은 생략한다.

넷째, 그 대신 주관적, 순간적인 묘사에 의존한다. 따라서 그 묘사에는 비약

이 있다.

다섯째, 시어는 평이하고 단순하며 소박한 민중의 언어로서 누구나 쉽게 이

해할 수 있어야 한다. 즉 일반 시처럼 은유나 상징과 같은 고답적인 표현은 배

제해야 한다.

여섯째, 프롤레타리아트의 리듬으로서 구어체의 산문 리듬을 갖추어야 한다.

일곱째, 내용이 되는 사건은 프롤레타리아트의 의식, 프롤레타리아의 생활에 

관한 실제적인 것이어야 한다.

여덟째, 기본적으로 사실주의를 지향해야 하는데 그 원칙적인 태도는 소설과 

같이 현실성, 객관성, 실재성, 구체성을 지녀야 한다.

이와같은 관점에서 볼 때 <우리 오빠와 화로>는 김기진이 지적한 제 특성들을 많이 지니고 있어 -용어의 적절성과는 무관하게 - 그가 일컫고 싶어하는 바

소위 '단편 서사시'에 해당하는 것이 사실이다. 우선 <우리 오빠와 화로>는 일반적인 시와는 다르게 사건을 내용으로 담고 있다. 전통적으로 시가 일인칭 독백체로 되는 것과는 판이하게 다른 것이다. 사건의 문학적 형상화는 시보다 오히려 단편 소설이나 콩트 형식에 더 적합 한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우리 오빠와 화로>의 내용이 된 사건은 소설처럼 전체적인 스토리를 담은 것은 아니다. 압축한 것은 더욱 아니다. 스토리의 일부 그중에서도 가장 핵심적이고 극적인 부분만을 선택하여 서술했기 때문이다. <중략>

       

3

전통적으로 서구에서 장르개념의 확립은 고대 그리스의 아리스토텔레스에게서 비롯되는데 서정시(lyric), 서사시(epic), 극시(drama)로 나누는 삼분법이 그 효시였다. 그러나 이와같은 개념들은 중세 이후, 엄밀히 말하자면 알렉산더 대왕의 동방 정복 이후 서서히 해체되기 시작한다. 그리하여 르레상스로부터 17세기에 이르는 동안 서정시는 시로, 서사시는 소설로, 극시는 드라마로 정착하게 된 것이 오늘의 문학 양식이다. 이는 장르적으로 현대에 와서 서사시는 이미 사라져 버렸고 시란 서정성에 그 본질을 두고 있음을 의미한다. 헤겔이 그의 미학에서 소설을 현대 서사시라고 불렀던 이유도 여기에 있었다.

이렇듯 오늘의 문학이 시, 소설, 드라마로 분류된다고 할 때 각각의 장르는 나름의 이념형을 지니고 있다. 예컨대 시가 현개 시제의 일인칭 고백체(monologue)라는 것, 소설이 과거 시제 3인칭 서술체(이야기 narrative)라는 것, 드라마가 현재(혹은 미래)시제의 2인칭 대화체(dialogue)라는 것 등이다. 그러한 관점에서 장르적 순수성을 지닌 시란 일인칭 화자가 현재 시제로 독백하는 내용이라 할 것이다. 이 경우 독자는 엿듣는 역할을 담당한다. 물론 이 때의 '독백'은 '이야기'는 아니며 일종의 직관적인 감정토로라 할 수 있는 것인데 그것은 서술체 즉 이야기가 기본적으로 고대는 서사시, 현대는 소설의 본질을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중략> 

 

4

이상<우리 오빠와 화로>가 보여주는 기법들은 한마디로 시인이 자신의 시작 의도를 효과적으로 실현시키기 위하여 치밀하게 구사한 것들이다. 그것은 모든 프롤레타리아트 문학, 나아가서 사회주의자 리얼리즘의 일관된 태도가 그렇듯 계급투쟁을 통해 프롤레타리아트 혁명을 유발시키려는 데 있다. 이 경우 문학작품이란 민중을 이 혁명의 대열에 참여시켜 사회주의 혹은 공산주의 국가 건설의 일꾼이 되도록 선전 선동하는 수단에 지나지 않는다. 이러한 관점에서  <우리 오빠와 화로>가 보여준 기법들은 시인이 프롤레타리아트 문학의 목적이라 할 선전 선동을 위해 나름대로 모색한 결과라 생각된다. <중략>

한 개의 문학작품이 선전 선동의 수단이 되기 위해서는 어디까지나 내용 중심, 사건이나 이야기 중심이 되지 않으면 안된다. 그런데 이와같은 조건은 장르적으로 소설에는 적합하나 시에서는 그렇지 못하다. 일반적으로 시는 사건이나 이야기가 배제된 일인칭 자기고백체이며 거기다가 은유, 상징, 신화와 같은 것들에 의하여 형상화되기 때문이다. 사회주의자 리얼리즘에 있어서 시가 중요하게 여겨지지 않은 이유도 여기에 있는 것이다. 물론 레닌은 시를 전적으로 부정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가 소위 '당의 문학'론에서 시는 낭만주의적 요소, 신화, 은유적인 요소, 그리고 고급한 어법을 버리고 그대신 산문적, 사실주의적인 태도로 쓰여져야 한다고 강조했던 것은 잘 알려져 있다. 소위 '혁명적 낭만주의' (revolutionary romanticism) 이외에는 없다는 것이 그의 일관된 주장이었다. 

이와같은 모순 속에서 한국의 프롤레타리아트 시가 그 타개책으로 모색한 것이 이른바 '단편 서사시'이다. 앞서 살펴본 바와같이 '단편 서사시'는 사건, 이야기가 중심을 이루고 비록 감정적인 호소에 의존하고 있으나 이미지, 은유, 상징과 같은 것을 철저히 배제하여 직접적, 직설적인 어법으로 사회적인 문제를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이러니컬하게도 시가 사실주의를 지향하게 되면 미적 형상화라는 측면에서 시적 요소는 그와 반비례해 사라지게 된다. <우리 오빠와 화로>가 프롤레타리아트 이데올로기를 그 내용적인 측면에서 얼마나 성실히 반영했는가 하는 문제와는 별개로 그것이 문학적으로 결코 성공할 수 없었던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 작품에서 비교적 시적 형상화에 가까운 것 - 그리하여 시적으로 평가될 수 있는 것을 굳이 들라면 주인공의 과거 행복했던 가정과 현재의 파탄이 영남이가 사온 거북무늬로 매개되는 부분이다. 주인공 삼남매의 단란했던 과거가 영남이가 사온 화롯가의 따뜻한 대화로 상징되고 주인공이 감옥에 붙잡혀감으로써 파탄된 가정이 화로가 깨진 냉동방의 황량한 모습으로 묘사된 이 대립적인 제시야말로 이 작품이 보여줄 수 있었던 최소한 시적 요소였던 것이다. 

 

오세영 <한국 현대시 분석적 읽기> 144~162쪽    

 

타이핑 - 채란

 

 

짐작이지만, 일반인들은 이 평론서를 사지 않을 듯싶다. 물론 자세히 읽지도 않을 듯싶다. 4년 전 이 책을 통해 이용악의 낡은 집과

이상의 오감도를 읽고 지금처럼 타이핑을 하긴 했지만, 두 번 읽으려 했을 때 시시해졌다. 아마 임화에 대한 그의 견해에도 마찬가지

반응을 보일 것 같다. 아무튼 한국문학사의 뿌리를 보다 보면 열악한 토양에서 자란 게 확인이 된다. 한국 문학사는 다시 쓰여야 한다

고 까지 생각이 든다. 이 아침 오타 몇 개 고치지만 평론가의 분석(갈기발기 자기 입맛대로 찢는)에 나 역시 인색한 아쉬움만 남겨 둔다.

죽은 이는 말이 없고, 산 자의 입은 사자死者의 이름을 소재로 든든한 밥벌이를 하고. 악마를 팔아 천사인 냥 배(腹部)를 채우는 이들은 

현재에도 가득하고.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