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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럴드 블룸 <세계문학의 천재들> 中

미송 2013. 8. 10. 20:52

 

니체가 소크라테스나 햄릿과 함께 언어에 대해 깊은 불신감을 공유하고 있다는 사실을 모른다면 우리는 정말 니체를 오해할지도 모른다.

 

대화할 때 우리는 더 이상 스스로를 충분히 고려하지 않는다. 우리의 참된 경험은 결코 말이 많지 않은 법이다. 경험은 아무리 노력을 해도 스스로를 드러낼 방도가 없다. 그 이유는 적절한 단어들이 너무도 부족하기 때문이다. 단어로 표현할 수 있는 모든 것들을 우리는 이미 넘어서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모든 말에는 어느 정도의 경멸이 포함되어 있다.

 

니체의 천재성은 가슴속에서 이미 죽어버린 것을 표현하는 우리에게 경고를 보낼 때 가장 강렬하게 표출된다. 우리가 다른 사람의 천재성에 치르는 대가에 대해 그토록 강렬하게 경고했던 천재로는 니체가 유일하다.

 

위대한 인물과 시대에 놓여 있는 위험성은 좀 유별나다. 온갖 종류의 소진과 메마름이 그 뒤를 따른다. 위대한 인물은 종점이다. 예를 들어 르네상스와 같은 위대한 시대도 역시 종점이다. 천재는 자신의 작업과 행적에서 필연적으로 소진하는 자일 수 밖에 없다. 천재는 자신을 남김없이 소진하며, 그게 바로 천재의 위대성이다. 말하자면 자기 보존의 본능이 멈춰 있으며, 넘쳐흐르는 힘의 거스를 수 없는 강제력으로 말미암아 그런 배려를 하거나 주의를 기울일 여력이 전혀 없다. 사람들은 이것을 '자기 희생' 이라고 부르며 그의 '영웅적 행위', 자신의 안위에 대한 무관심, 그리고 사상, 대의, 조국에 대한 헌신을 찬미한다. 예외도 없고 오해도 없다. 그는 충만하고 넘쳐 흐르며, 자신을 소진하고 자신을 아끼지 않는다. 이건 마치 강물이 범람하듯이 비참하면서도 무의지적인 숙명이다. 그러나 그러한 파괴력은 커다란 보상도 주었다. 높은 도덕성이 그런 예다. 결국 인간이 감사를 표하는 방식은 배은망덕이다. 

 

확실히 우리는 우리의 은인인 니체를 계속해서 오해하고 있지만, 그가 우리에게 알려주었듯이 올바른 이해 자체가 애초부터 가능하지 않다. 마지막 1년 반 동안의 정신 착란 속에서 니체는 자신이 변용되었으며 십자가에서 부활했다고 생각했다. 아마 그랬을지도 모른다. 디오니소스와의 동일시는 점점 철저해졌다. 그의 내부에서, 그리고 그와 함께 무엇인가가 끝났으며 우리는 부분적으로는 그의 영향력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셈이다. <중략>

 

니체는 괴테에 대해 "그는 스스로를 창조했다" 라고 말했다. 그러나 신에 대해서 니체는 신이 권력의지이거나 아니면 선으로 전향한다고 언급했다.

우리는 사라마구의 뛰어난 소설 '예수의 제2복음' 에 나오는 니체적 신에 대해 생각한다. 그는 매우 사악하며 오로지 자신의 권력을 키우는 데에만 관심을 둔다. 사라마구의 예수 그리스도, 즉 니체의 유일한 기독교인은 우리에게 신을 용서하라고 역설하며 십자가에서 숨을 거둔다. "인간이여, 신을 용서하소서. 자신이 하는 짓을 알지 못함이니다." 니체적 전통이 계속 유지된다면, 아마도 사라마구 혹은 캐나다 시인 앤 카슨과 같은 작가의 상상력에서 그 전통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앤 카슨의 '유리, 아이러니 그리고 신Glass, Irony, and God' 은 신에 대한 일반적 고정관념에 대해 비판한 작품으로서 사라마구의 '예수의 제 2복음'과 쌍벽을 이루고 있다. 어쩌면 니체는 이와 같은 심미적 전통의 아이러니를 받아들였을 것이다. "현세를 생각하라!" 니체의 가장 설득력 있는 충고인 이 말은 우리의 귓가에서 꽤 오랫동안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238 ~ 242쪽 

 

넘실거리며 엄습해오는 은백색 바다, 거대한 서릿발들의 무리가 음산하게 철썩거리는 소리, 대초원의 눈 덮인 건초들의 적막한 움직임. 이 모든 광경을 바라보면서 이스마엘은 자신이 흡사 들소 때가 지축을 뒤흔들면서 이동하는 것을 놀라서 바라보고 있는 당나귀인 듯 초라하게 느껴졌다!

신비로운 자취가 암시해주는 형언할 수 없는 그 무엇이 어디에 놓여 있는지는 아무도 알 길이 없지만, 당나귀에게는 어느 곳에서나 이러한 그 무엇이 존재해야 한다. 그 다양한 모습을 통해서이긴 하지만, 어렴풋하게나마 눈에 보이는 이 세계는 사랑으로 만들어졌으며,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는 두려움으로 만들어진 것 같이 느껴진다. 

 

그러나 아직까지는 이 흰색의 실체를 파악하지 못했으며, 이 실체가 그런 강렬함으로 영혼에 호소하는 이유를 알지 못한다. 더욱 이상하고 더더욱 놀라운 것은 이미 보아왔듯이, 이 실체가 영적인 그 무엇의 가장 의미 있는 상징, 아니 기독교의 신을 차단하는 장막, 혹은 그 자체를 인정하더라도 인간에게 가장 두려운 존재인 그 무엇의 강렬한 매개체로서 왜 이토록 가까이 다가서는가 하는 점이다.

 

우주의 무심한 공허함과 광대함이 언뜻 내비치는 막연함 때문일까? 은하수의 투명한 깊이를 바라볼 때 불현듯 소멸의 관념이 등 뒤를 칼처럼 찌르기 때문일까? 아니면 희다는 것은 본질적으로 특정한 색이라기보다는 가시적인 색의 부재이자 온갖 색들의 집합이기 때문일까? 이런 이유 때문에 눈 덮인 드넓은 풍경, 우리가 꺼리는 무신론의 무색조 속에 의미로 가득한 침묵의 검은색이 존재하는 걸까? 또한 자연철학자들의 여러 이론을 고려해볼 때 흰색이 아닌 지상의 모든 색조, 즉 장엄하고 아름다운 색채로 장식한 해질녘 하늘과 숲의 향긋한 색조, 화려한 금빛 우단 같은 나비의 날개, 어린 소녀들의 화사한 뺨, 이 모두는 포착하기가  어려운 속임수로 사물에 고유하게 내재되어 있지 않으며 단지 외부로부터 입혀진 색깔에 불과하다. 이렇듯 신격화되어 있는 자연도 모두 다 매춘부처럼 화장을 하며, 그렇게 유혹함으로써 단지 자신의 내부에 있는 납골당을 가리고 있을 뿐이다. 좀 더 깊이 생각해보면, 자연의 온갖 색조를 만들어내는 그 신비로운 화장품, 즉 위대한 빛은 영원히 흰색이나 무색으로 남아 있다. 이 빛이 매개체가 없이 작용하는 경우, 튤립이건 장미건 모든 사물을 자신의 텅 빈 색조로 물들이게 될 것이다. 이 모든 것을 깊이 생각해보면 마비된 우주는 나환자와 다름없다. 색안경을 고집스럽게 거부하는 라플란드(늘 눈에 덮인 유럽 최북단)의 여행자처럼, 불쌍한 이교도는 사방에 가득한 엄청난 흰색 풍경에 압되되어 멍하니 서 있다. 이 모든 것들 중에서도 알비노 고래가 바로 그 상징이다. 그런데도 여러분은 이 격렬한 사냥을 그저 놀라서 바라보고만 있을 것인가? 

 

허먼 멜빌의 '고래의 흰색'에 나오는 묵상

362~363쪽   

 

타이핑 - 채란

 

번역서 읽기의 어려움에 봉착하면 번번 당황하다 그친다. 외국 작가가 쓴 문학 평론은 어떨까 도 궁금하고, 책값이 아깝기도 하여 읽기 시작하지만 사실 아무 내용도 기억에 남진 않는다. 힘써 타이핑도 해 보나 그럴수록 졸린다. 짜증나는 일. 번역자는 어째서 900페이지나 넘는 분량을 거의 직역했을까, 돈 때문에? 이렇게라도 번역해주는 사람이 있으니 감사해라 자만까지 했을지 모르겠으나, 세상 매력 없는 것 중 하나가 바로 번역서다. 셰익스피어든 엘리엇이든 세르반테스든 교수들은 설상가상 작가들을 신비화까지 하여 번역으로 평생 우려먹었을지 모르지만, 독자는 안 그렇다. 영어를 잘 모르면 한국어나 제대로 하자 하면서 번역서를 차츰 외면할 것이다. 어차피 선택권은 자신에게 있으니까. 내가 산 건 아니지만 인터파크에서 3-4만원은 결제했을 테니 유감스러울 뿐이다.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