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애살수懸崖撒手’의 채찍 / 김백겸
‘불교와 나의 문학’이라는 주제로 청탁했을 때는 ‘뭐 써보지요’라고 간단히 말했으나 막상 원고를 쓸려고 보니 내가 불교를 체계적으로 공부한 적이 없어 난감했다. 내가 읽은 약간의 불교서적과 아마도 내 멋대로 오해했을 불교에 대한 이해를 눈 푸른 납자들이 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청탁수락이 후회스러웠다. 이런 사정이라 비불교도인 나는 불교에 대한 생각을 그저 솔직하게 말하는 수밖에 없다. ‘저자의 죽음과 독자의 부활’이라는 무식한 용감이 통용되는 시대에 살고 있으니 텍스트를 내 식대로 읽었다고 강변하면 되니까.
불교의 교리는 어렵다 그러나 어렵기 때문에 나 같은 지식호사가에게는 매혹적이다. ‘언어도단言語道斷 심행처멸心行處滅’이라는 표현을 보고서다. 언어로 이해할 수 없는 생각(경지)들이 있다니. 근사하지 않은가. 그래 한번 도전해보자. 천재가 아니기에 한번 읽고 깨칠 수는 없겠지만 범재는 두세 배 노력하면 될게 아닌가. 그래도 모르면 ‘독서백편기의자현讀書百遍其義自見’라고 말한 선배들의 경험도 있으니까 자위하고 불교 책들을 접했으나 만만치 않은 과제였다.
『반야심경』과 『금강경』 - 나는 아침에 일어나 운동을 하고 이른 아침을 먹고 남세종 I.C에서 북대전 I.C로 빠져 연구소에 출근한다. 간밤에 도착한 이메일을 읽고 밀린 서류를 검토하고 의사결정을 한다. 전화는 시도 때도 없이 온다. '네 김백겸입니다'라는'라는 멘트를 수없이 해서 생물학으로나 기호학으로도 내가 죽지 않았음을 확인한다. 시인들 밖에는 읽지 않지만 문예지에도 심심치 않게 이름이 올라가서 사회적으로도 아직 살아있는 존재의 기쁨을 누린다.
나는 종교가 없었지만 세상을 창조한 제일원인第一原因으로서의 조물주는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을 가졌던 적이 있다. 그렇지 않고서는 이 세상의 존재를 설명할 수가 없으니까. 그런데 20대말에 우연히 본 금강경과 반야심경의 내용은 충격이었다. 사물에는 실체가 없다는 ‘무아론無我論’을 반복적인 은유와 알레고리로 설명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만물이 실체가 없다니! 그러면 세상이 모두 허깨비란 말인가. 진짜라면 보통 문제가 아니네.’라고 생각했다.
주마간산으로 본 서양철학은 모두 플라톤의 ‘이데아’나 기독교의 신등 모두 형이상학적 실재론實在論에 관한 주장이거나 형이하학적 유물론등의 반대철학이었다. 불교는 실재론을 모두 부정하고 세계의 본질을 ‘공성空性’과 ‘불성佛性’으로 설명하고 있으니 그 때만 해도 새로운 형이상학이구나 생각했다.
『화엄경』- 현대천문학이나 과학 용어와는 다르지만 일종의 불교식 우주론을 말하고 있었다. 삼천대천三千大天이라는 장엄한 표현이 마음에 들었다. 1000개의 하늘이 모여 소천小天, 소천小天 1000개가 모여 중천中天. 중천中天 천개가 모여 대천大天을 구성한다고 써있다. 약 십억 개의 하늘인데 하나의 하늘을 오늘날의 은하로 비유하면 우리 우주가 약 1,250,000,000의 은하로 이루어진 은하단과 은하군의 집합이라는 실제관측과 어느 정도 맞아 들어간다. 우연치고는 흥미롭다.
삼천대천세계의 교주인 비로자나불은 우주의 본체불인데 모든 사물이 이를 근거로 해서 몸을 나툰다고 한다. 비로자나불이 앉아 있는 연화좌대는 1000개의 연꽃으로 이루어져 있고 이 연꽃하나가 100만의 불국토를 표현하므로 결국 10억 개의 불국토를 비로자나불의 법신이 장악하고 있다. 서양의 신플라톤학파가 주장하는 형이상학적 일자一者하고도 같은 맥락을 보여주는 생각이어서 인간의 신화적 원형심상을 떠올리게 한다.
빅뱅가설은 우주의 시작인 태초의 특이점에서 수조도의 빛이 고압에너지와 함께 폭발 하면서 팽창한 것으로 가정한다. 태초에는 시공간과 물질의 재료가 모두 같았으니 본초불인 비로자나불이 법신의 빛으로 우주를 가득 채우고 있다는 불교적 상상과 유사한 구조를 뒷받침 한다. 정각을 이룬 부처들은 어떻게 직관으로 이 우주를 현대과학과 비슷한 모습으로 그려낼 수 있었을까. 깨달음의 상태 즉 완전지完全知에 이르면 태초의 빛인 우주복사파에 의식을 맞추어 우주전체의 모습을 그려낼 수 있는 것일까. 신비로운 생각이 든다.
『열반경』- 석가모니의 일생이 생생히 드러나 있어 전기를 읽는 기분이 드는 책이다. 기독교도 예수의 일생이 그려진 사복음서가 결국 기본텍스트이듯 불교도 석가모니의 실제 삶이 그려진 장면이 더 감동이 있다. 후세의 미화와 과장이 덜 들어가기 때문이다.
역사적 인간인 석가모니가 온갖 고행과 시행착오를 거쳐 보리수나무아래서 죽기를 각오하고 선정에 들어 완전지完全知에 이르는 장면이 있다. 석가는‘마라mara(욕망과 죽음)'의 군대와 세 딸의 유혹을 물리치고 정각을 얻는다. 경에 의하면 석가모니는 첫 번째 응시에서 모든 전생에 대한 앎을, 두 번째 응시에서 신성한 눈을, 세 번째 응시에서 십이연기十二緣起를 얻고 동틀 무렵 완전지完全知를 얻었다고 되어있다.
이 대목에서 석가모니는 ‘내가 깨달은 이 법法은 참으로 증득하기가 어렵다. 정적靜寂에 넘친 것이어서 보통의 도리로는 도달하기 어렵다. 참으로 심오하여 오직 현자만이 알 수 있는 것이다. 어찌 애욕에 빠져 있는 세상 사람들에게 연기의 이치나 열반의 경지를 알릴 수 있겠는가. 이 법을 설한다고 해도 그들은 깨달을 수 없을 것이고 나는 그저 피로를 더 함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라고 고민했다고 적혀있다.
중생에 대한 연민으로 마음을 돌린 석가모니는 그 후 수많은 일화를 남긴 비유와 설법으로 제자들을 지도했으나 내가 주목한 점은 석가모니의 임종 시에 자신은 한마디의 법도 설하지 않았다고 밝혀 불법佛法의 언표가능성을 부정한 점이다. 얼마나 심오한 경지이기에 자신의 평생의 설법을 부정했을까. 우주의 실상은 불가지不可知의 모습인데 석가만이 유일하게 스스로 앎에 이른 것으로 생각했으니 이 대목이 진실이라면 그 후의 모든 조사와 불제자와 중생들은 불법이라는 미로를 헤매고 있는 개미들이라는 결론이 된다.
용수의 『중론中論』- 불법佛法의 언표가능성에 대한 부정은 용수의 『중론中論』에 관한 해설서들에 자세히 나와 있다. 반야般若는 공空에 관한 지혜인데 결국 사물은 실체가 없다는 주장을 위한 이중부정으로 반야를 설명한다. 중론中論은 사물은 존재도 아니고(非有) 비존재도 아니기(非無) 때문에 중中인데 가운데가 아닌 양변兩邊을 한꺼번에 부정하는 논리이다. 중론은 ‘발생하지도 않고(不生), 소멸하지도 않으며(不滅), 항상하지도 않고(不常), 단절되지도 않고(不斷), 동일하지도 않고(不一), 상이하지도 않고(不異), 오지도 않고(不來), 가지도 않는다(不去)’는 팔불八不의 논리로 공성空性을 표현하고 있다.
그럼 뭐란 말인가. 이렇게 어려운 실체가 아닌 실체를 무슨 도리로 만져보거나 이해할 수 있단 말인가. 결국 말로 할 수 없으니 수행으로서 스스로 깨달아라 하는 논지인데 이 논리대로라면 불성에 대한 실제의 체험은 석가모니만이 아는 비밀이 된다. (개인 생각에 석가모니 이상의 경지를 보여준 불제자가 그 후 없었다고 생각한다.)
처음에는 위에 언급한 언어도단言語道斷 심행처멸心行處滅이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불성의 신비를 말하는 줄 알았다. 이 표현이 언어가 공空하고 마음의 작용도 空하기에 언어와 개념으로 이루어진 분별의식을 부정하는 인식론적 개념인 것을 나중에 알았다. 선가의 화두도 수행자의 분별을 철저히 부수는 몽둥이 일뿐, 불성을 직접 드러내 보여주지는 않는다. 사유 게임으로는 재미있으나 중론中論같은 공관불교는 어쩐지 어렵기만 하고 매력이 없다.
세계의 본질이 비실체로서의 공성과 연기로 이루어진 불성佛性이니 석가모니 같은 천재가 전도를 고민한 점이 이해된다. (‘세계의 본질’이라는 말도 공空으로 부정을 해야 하니 불성佛性은 비유적 언어로 유추는 가능하나 감각이나 이해로 획득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하물며 오욕에 물든 범재가 무슨 재주와 인연으로 팔정도八正道를 지켜 깨달은 자가 되겠다는 야심을 내겠는가. 이 대목에서 나 같은 중생은 무조건 항복, 출가出家와 성불成佛의 어려운 길을 선택한 납자衲子들에게 과연 가능한 길일까 하는 의문과 함께 존경을 표하는 수밖에 없다.
『밀린다왕문경』-니르바나nirvana라고 알려진 깨달음의 상태는 의식과 물질, 주체와 객체, 영혼과 신성을 부정하는데 이를 놓고 토론하는 희랍계 왕 밀린다Manandros와 나가세나Nagasena존자의 대론對論이 재미있다. 피타고라스나 플라톤이 믿었던 그리스식 영혼불멸과 불교의 무아론과 인도식의 윤회에 대한 차이가 이 대목에서 드러난다.
마난드로스: 존자 나가세나여. 다시 태어난 자는 사멸한 자와 동일합니까. 혹은 다릅니까?
나가세나 : 대왕이시여, 그것은 동일한 것도 다른 것도 아닙니다, 가령 어떤 사람이 등불을 점화했을 경우 그것은 밤새 탈 것입니다.
마난드로스: 존자여, 그렇습니다. 밤새도록 탈 것입니다
나가세나 : 대왕이시여, 초저녁의 불꽃과 한밤중의 불꽃은 동일한 것입니까?
마난드로스: 존자여, 그렇지 않습니다.
나가세나 : 대왕이시여 한밤중의 불꽃과 새벽녘의 불꽃은 동일한 것입니까?
마난드로스: 존자여, 그렇지 않습니다
나가세나 : 대왕이시여, 그러면 초저녘의 불꽃과 한밤중의 불꽃과 새벽녘의 불꽃은 제각기 다른 것입니까?
마난드로스: 존자여, 그렇지 않습니다. 동일한 등불에 의하여 불꽃은 밤새도록 타고 있는 것입니다.
나가세나 : 대왕이시여 사물의 연속(개체)은 그와 같이 계속하는 것입니다. 생겨나는 것과 소멸하는 것은 다른 것이지만 동시적인 것으로 계속되고 있습니다. 이런 이유로 생성과 소멸은 같지도 않고 다르지도 않은 것으로서 최후의 의식에 포섭됩니다.
이 대목은 윤회하는 주체로서의 영혼이나 실체는 없지만(무아론) 연기緣起하는 사물로서의 죽음과 탄생은 있기에 연기緣起작용을 끊어 윤회를 벗어나고자 하는 불교의 수행론을 보여준다. 석가모니는 정각을 얻어 지혜를 얻었을 때 왜 바로 윤회하는 삶을 끊고 니르바나(적멸)의 지복으로 향하지 않았을까. 경전들은 중생의 삶에 대한 연민과 자비로 열반을 미루었다고 설명하지만 내 생각은 연기緣起에 의한 육신으로서의 숙업이 아직 남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몸이 가죽부대처럼 말라 적멸에 이르기까지 불법을 전도하는 삶을 살아야 하지 않았을까.
내 사견으로는 석가도 배고프면 탁발을 하고 졸리면 잠을 잤으니 육신의 한계를 초월한 것은 아니다. 불교식 깨달음이란 환상으로서의 삶을 살되 삶이 실체가 없기에 수행자가 집착과 욕망을 모두 지운 것이라 정의된다. 이런 관점에서 석가는 마음의 평화를 이루고 선정과 적멸의 즐거움 속에 살며 죽음에 대한 공포를 초월했으리라 여겨진다. 사후에 생사의 윤회를 끊고 영원한 적멸인 니르바나에 도달했는지는 석가만이 아는 수수께끼.
대승불교의 양대 산맥인 공관空觀불교와 유식唯識불교의 입장을 비교해 볼 때 나는 보다 인간적인 유식唯識불교의 해석이 더 마음에 든다. 용수의 『中論』으로 대표되는 공관空觀불교는 너무 추상적인 논리에 기대고 있다. 비유가 적절한지는 모르겠으나 용수의 사구부정四句不定같은 판단논리는 순수수학의 방정식 같은 기분이 드는 것이다. 수학적 논리라는 게 수학적 공준아래서는 반박할 수 없는 명쾌한 답을 주지만 이 역시 공준이라는 사고의 전제 때문에 실제세계보다 강력하지 않다.
용수의 논리도 인간의 사유와 언어에 기대고 있기 때문에 ‘불성佛性은 공성空性이다’라는 논증과 주장이 언어적 논리에 갇힌다. 용수는 이런 약점을 언어에 대한 해체와 부정으로 극복하고자 하지만 언어의 사다리를 치우는 행위는 자신의 주장도 동시에 해체한다. 결국 몸으로 부딪혀서 언어적 한계와 논증을 초월해야 하는데 이 과정에서 선종의 조사들이 보여주는 선입관 깨기의 화두는 다소 무지막지하다. 석가모니의 설법처럼 넓고 우아하지가 않다. 조사들의 근기根氣가 석가모니에는 못 미쳤기 때문일까.
중국식불교인 선종禪宗이 원시불교와 달라진 이유를 당시 중국인들의 문맹률로 설명하는 견해도 있다. 불교자체의 교리가 어려운데다 중세의 라틴어에 비유할 수 있는 산스크리트어의 관념 언어를 한문으로 번역한 불경은 당대의 지식인들만 이해하는 책들이었다. 당시의 문맹률이 90%에 이르는 수준을 감안하면 교종敎宗의 전파는 한계가 있었다. 경전에 의지하지 않는 선종이 대중의 인기를 얻었는데 선종을 중흥시킨 유명한 육조혜능도 문맹자였다 한다.
『해심밀경海深密經』과『대승기신론大乘起信論』-유식唯識사상은 요가수행자들의 체험을 체계적으로 설명한 교리이다. 마음에 의해 현상계가 일어나고 정신계와 물질계의 연기를 통해 세계를 설명한 유식唯識불교가 더 마음에 와 닿았다. 유식불교는 인간의 마음은 안이비설신의眼耳鼻舌身意의 여섯 가지 감각적 기관으로 이루어진 존재로 본다. 앞의 다섯 가지를 전5식前五識이라 하고, 여섯 번 째의 의식을 제6식識으로 부른다. 전5식은 자체로서 판단과 유추와 비판의 능력이 있을 수 없다. 전5식은 제6식識에 의하여 통괄된다. 요가행파의 요기(명상가)들은 마음의 명상을 통해 말나식末那識과 아려야식阿黎耶識을 추가로 발견한다. 현대 심리학으로 보면 제6식은 의식의 세계에 제7식 말나식은 무의식에 아려야식은 심층의식에 비유된다. 프로이드와 칼 융등의 현대 심리학자들이 인간의 무의식을 발견하기 전에 불교의 요가행파는 이미 인간의 마음을 깊이 들여다보았다는 얘기다.
대승기신론大乘起信論은 ‘마음이 생기고 소멸함이란 여래장如來藏에 의해 생기고 소멸함이 있게 되니 이른바 생기지 않거나 소멸하지 않는 것이, 생기고 소멸하는 것으로 더불어 화합하여 하나로 볼 수 없고 다르다 볼 수 없는 것을 아려야식阿黎耶識이라 한다’고 말한다. 아려야식이란 과거의 인식. 행위. 경험. 학습에 의해 형성된 인상印象의 잠재력, 종자種子를 저장하고 육근六根의 지각작용을 가능하게 하는 가장 근원적인 심층의식을 말한다. 유식불교는 육체가 멸해도 아려야식은 멸하지 않고 세세연년 유전하면서 다음 세대의 사물이 존재하는 근본적인 원인이 되는 것으로 간주한다. 마음을 포함한 사물이 서로 연기하면서 시공간의 운동 내에서 윤회하는 유식불교의 해석이 공관 불교보다는 고달픈 인생에 좀 더 비전을 준다.
현대물리학은 수학과 방정식을 통해 물질과 에너지의 인과운동인 세계의 모습을 그린다. 현대 물리학은 실제우주를 에너지와 시공간의 상호작용으로 설명하지만 부분이 전체를 구성하는 시스템의 복잡계 질서를 이루는 정보의 연기緣起에 대해서는 침묵한다. 이에 비해 불교의 유식론은 아뢰야식이라는 정보의 바다에서 모든 사물이 발현한다고 말하므로 결국 화엄의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와 맥락이 같은 유심론이 된다. 현대물리학과 유식불교는 각각 유물론과 유심론이 배경이지만 그 논리적 귀결인 인과因果와 연기緣起에 있어서는 방법이 같다.
불교의 유식론을 접하고서 나는 마음이 편해졌다. 세세연년 공부해서 더 나은 상태로 갈 수 있으리라는 희망이 있기 때문이다. 이에 비해 공관불교의 수행은 즉각적인 천재의 깨달음이 아니고는 돈오하기가 어려운 방법론이다. 부처의 본생담本生談에는 석가가 긴 시간에 이르는 전생의 수행을 거쳐 부처에 이른 것으로 설명한다. 화두 하나로 즉각卽覺에 이른다는 선종의 가르침은 매우 매력적이기는 하나 실효성은 어떨지.
『혜명경慧命經』- 40대 초에 직장생활의 스트레스가 오면서 책들의 내용이 다 공소空疎해졌다. 별 이론들을 다 붙여보았자 지식이란 세계에 대한 지도地圖에 불과했다. ‘불성佛性( 당시에는 불교식 형이상학으로 생각함)이란 언어言語 밖에 있다고 선사들이 그랬으니 몸으로 부딪혀 보자’라고 생각하고 수련서修練書들을 찾다가 만난 책이다. .
혜명경慧命經』은 ‘성명쌍수性命雙修’를 주장한 유화양柳華陽의 저작이다. 선종의 견성見性을 위한 ‘성性’ 위주의 수련을 비판하고 견성見性을 이루기 위해서는 ‘명命’도 같이 수련해야 함을 강조한다. 도교의 『태을금화종지太乙金花宗旨』, 서양의 연금술Archemy과 영지주의Gnosis비전과도 맥락이 닿아있다.
연단煙丹수련은 크게 보면 요가의 딴뜨라수행을 통한 몸과 정신의 각성과 내용이 같다. 몸 안의 ‘쿤달리니Kundalini’ 에너지를 각성시켜 ‘본성本性의 빛’을 보거나 불교식 견성見性을 이루고자 한다. 소승과 대승이 모두 수행자의 금욕을 강조하는데 비해 티벳 밀교는 성 에너지로 정신의 상승을 꾀하기도 한다. 티벳의 금강계밀교의 ‘한마음’에 대한 교리가 있다. 법신불인 대일여래大日如來가 현상계의 상징인 반야모와 성적인 결합으로 나타난 횐희불歡喜佛을 보고 나는 깊은 충격을 받은 적이 있다.
개인생각에 우도右道인 청정수행법과 좌도左道밀교인 딴뜨리즘의 수행 모두 인간의 성적 잠재력을 극대화해서 정각正覺을 이루고자 하는 목표는 같다. 성 에너지의 정신적 활성화는 상승과 초월의 비의에 의해 일상의 시간을 벗어나는 체험에 이르는 길을 안내한다. 사람마다 스타일이 다르기에 수행자들도 모두 자신의 인연에 의해 선택하거나 선택되는데 문헌상으로만 보면 좌도밀교가 효과가 빠르다고 한다. 청정수행법으로는 석가모니가 딴뜨리즘으로는 파드마삼마바의 성취가 경전 속에 남아있는데 이 분들 외에는 요가식 수련으로 제대로 된 각성에 성공한 분들이 극히 드문 것 같다. 문헌상으로 볼 때 그렇다는 얘기다. 드러나지 않은 각자覺者가 있을 수도 있겠지만 인류의 의식과 행동에 영향을 주지 못한 개인적 각성이 의미 있는 일인지는 모르겠다.
생전의 석가는 알레르기처럼 격한 반응으로 수행자의 금욕을 강조한 부분이 있다. 불가의 엄격한 계율은 수행자가 외부 사건으로부터 초월해서 내부에너지를 모두 마음이라는 심해를 탐사하는 명상에 바칠 것을 요구한다. 속인의 판단으로는 수행자가 이십사 시간 전심 수련해도 타고난 근기와 인연이 없으면 몸 안의 차크라를 모두 여는 요가식 불교 각성은 어렵다. 이에 반해 근래의 대승수행은 평상심平常心이 불성佛性이라는 논리에 의해 일상인과 똑같은 환경에서 비교적 편하게 수행한다. 요즈음의 선가수행이 정말 석가가 이룬 정각의 경지를 통과해서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다’라는 말을 자신 있게 할 수 있는 방법론일까 하는 개인적인 의문이 있다.
쓰다 보니 이 원고가 불경에 대한 내 독후감처럼 되 버렸다. 불교 신자가 아닌 비교적 자유로운 입장에서 불교에 대한 희론戱論을 독자의 재미를 위해 늘어놓았다. 시인의 자유를 내세워 비약과 상상에 의한 생각을 섞었으니 사견과 오독의 결과는 전적으로 나에게 귀속됨을 밝혀둔다. 『안반수의경』의 위빠사나 수행법이나 『능엄경』의 밀교영향 등 불교의 요가식 수행을 더 말해보고 싶으나 이미 원고제한을 한참 초과해서 생략한다. 이 경전들이 내 사유에 미친 영향들을 말해야 ‘불교와 나의 문학’이라는 주제에 맞을 것 같다.
사십대에 폭풍이 치는 고해에서 허우적거리면서 나는 『반야심경』과 『금강경』 의 공空사상에 의지해 현실의 어려움과 질곡을 이겨냈다. 공관불교로는 연기緣起로 이루어진 세상속의 삶이란 일종의 꿈이자 마야maya였다. 나라는 실체가 없다면 무언가 나를 넘어선 존재가 인생이라는 꿈을 꾸고 있는 것이라 생각하기도 했다. 그 당시에는 삶이란 희극과 비극을 경험하는 사차원입체영화인데 벨이 울리면 영화관의 문을 나설 것이니 시간이 해결하리라는 위안으로 살았다 (시간이 해결 못하면 죽음이 해결한다는 비장한 생각도 현실적으로 한 적이 있다).
연출자와 관객이 같은 이상한 삶이자 꿈에 관한 주제는 보르헤스의 소설에서도 등장한다. 이 세상을 ‘바벨의 도서관’으로 본 보르헤스도 불교의 인생관으로 자신의 삶을 구원받았다고 고백하고 있다. 그 후에 다시 이해한 공空사상은 나를 넘어선 존재도 없다고 말하지만 당시에는 공空이라는 형이상학적 실체가 있는 줄 알았다. 내 불교이해를 돌이켜보니 인생에 대한 아전인수식 도움을 위한 합리화의 범주를 넘지 못한다. 그렇지만 불교적 세계관이 내 문학적 상상력에 미친 영향은 작지 않다. 경전의 게송 같은 시적표현과 석가의 본생담 같은 환상문학의 문학적 보고가 불경에는 무궁무진하기 때문이다.
서양은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실체론에 무게를 두고 이데아Idea, 신God, 일자一者, 절대정신, 물질과 에너지로 해석해 왔다. 20세기 이후에 니체를 필두로 실체로서의 ‘진리란 없다’라는 해체철학자들이 나타났는데 내 판단에는 모두 불교의 세계관에 영향을 받았다고 보여 진다. 불교의 사상들과 내용이 거의 같은데도 아이디어의 출처를 지운 채 자신만의 새로운 해석인 것처럼 포장하는 게 요즈음 프랑스 해체 철학자들의 사유이다. 그들이 해체한 것은 서구의 실재론을 지지하는 관념철학인데도 세계자체의 진실을 해체한 것처럼 생각하는 해석과잉의 추종자들이 있다. 실재론과 해체론의 생각과 상관없이 현실에는 일월성신의 순환이 이루어지고 지구에는 초목금수의 생사가 순환한다. 인간의 문명과 삶도 복잡한 역사의 파문을 만들며 복잡계의 질서 속을 살아간다. 불교가 공空사상으로 인간의 무지와 관념을 해체했을지는 모르나 세계의 실상實相을 해체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불교식으로 드러냈다고 보아야 한다. 불교와 해체라는 코드는 방법상 비슷한 것 같아도 자세히 보면 내용은 전혀 딴판의 얘기이다.
이런 저런 이유로 종교와 철학이라는 모호한 주장대신 나는 요즈음 현대과학을 열심히 쳐다보고 있다. 과학적 해석이라는 것도 인간의 의식모델의 하나라는 회귀적 사고의 한계가 있기는 하다. 그러나 과학은 과거에는 꿈도 못 꾸었던 지식의 반사망원경을 거대한 바벨탑처럼 세워 의식의 확장을 꾀하고 있다. 현대의 바벨탑은 이미 하늘에 대한 지식을 일백오십억 광년의 크기로 확장해서 빛보다 빠른 속도로 팽창하는 은하들을 보여주고 생명의 복잡한 과거를 삼십억 년의 크기로 확장해서 생태 그물의 복잡계複雜界 질서를 보여주고 있다. 이 거대한 정보로서의 거울지식들이 우주의 실상實相을 환히 밝혀 주리라는 기대가 있다.
객체로서의 우주는 과거에도 현재에도 실상實相의 모습대로 있었다. 제법諸法으로서의 현상은 불교의 학설이나 과학적 지식 이전에도 세계운동을 지금처럼 유지해 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뉴튼 공간이나 상대성이론의 세계, 힘들의 양자역학적 확률도약과 앞으로 밝혀질 통일장에 대한 그림도 모두 우주질서의 한 그림들이다. 확장하는 인간의식들이 우주의 실상實相을 새롭게 발견한 것이지 발명한 것이 아니다. 물리학에서 핵력과 전자기력의 상호관계는 밝혀졌지만 아직 중력과의 통일은 이루지 못했다. 아인슈타인이 생전에 그토록 열망했던 통일장이론은 밝혀지지 않았다. 그러나 이 또한 지식의 확장속도로 볼 때 시간문제라 생각한다.
현재까지 그려진 과학적 우주는 시공간의 하위차원과 상위차원이 서로를 반영하는 시공간 연속체이다. 실제현상이 그러한데 에너지와 힘들과 정보의 결합과 구성이 따로 놀 수는 없다. 인간의 지력이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기에 곧 우주의 암흑물질과 암흑에너지의 작용, 에너지장場들의 구성을 촉매 하는 우주정보(불교에서 아려야식과 여래장으로 표현하는 상태)의 작용이 드러나리라는 기대가 있다. 내가 죽기 전에 통일장이론에 의한 현대과학으로 마음을 포함한 세상의 연기緣起 프로세스를 이해해보고 싶다. 물론 불교식수행의 체험으로도 가능하다고 불경은 말하지만 너무 어려운 프로세스라 몸 안의 지혜를 닦아 견성見性하는 과업은 내생의 인연으로 미루기로 한다.
불교의 세계해석은 현대과학의 관점과 여로 모로 유사하기에 불교와 과학의 통합적 해석이라는 행복한 그림을 그려보기도 한다. 이 대목에서는 플라톤의 상기론想起論이 의미를 제공 한다. 속인의 작은 견해로 볼 때 제법諸法의 진리는 이미 이 세계에 구족具足해 있다. 구석기와 신석기의 어둠을 지나 인류는 약 오천년 전에 문자세계와 청동기문명을 이루고 의식의 화려한 등불을 켰다. 불교와 과학은 의식의 내면과 외부세계에 대한 탐사를 통해 각자 나름대로의 거대한 진리의 거울을 만들어 냈다.
현재의 나는 불교식 관점으로는 무한한 전생의 인연의 공덕으로 불교와 현대과학 양자를 인간의 몸을 받아 공부하는 행운을 누리고 있다. 이 대목에서 석가가 임종 시에 제자들에게 말했다는 ‘자등명自燈明 법등명法燈明 제행무상불방일諸行無常不放逸’의 마지막 가르침이 생각난다. 요즈음 식으로 말하면 ‘죽을 때 까지 공부하라’는 카피로 요약된다. 방대하고 심원한 불교와 현대과학의 지식들은 근기가 모자란 학인에게 ‘현애살수懸崖撒手’의 채찍으로 두 눈을 똑바로 뜨고 죽기 전에 세계의 실상實相을 볼 것을 요구한다.
懸崖撒手(현애살수)
매달릴 懸자에 벼랑 끝 崖자, 놓을 撒자에 손 手자. 벼랑 끝에서 잡고 있는 손을 내려놓는다는 뜻.
내 자리가 아니고 때가 아니라고 생각하면 과감하게 내려놓는 것이 결국 새로운 것을 얻을 수 있는 방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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