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미
한때는 물 찬 제비였으나 이제는 비만 오면 관절 욱씬거린다는
전직 노제비가 인생사 참 춤처럼 알듯 모르겠다고, 알면 알수록
점점 더 모르겠다고, 지난날 그 현란한 춤빨로도 작업은 늘상 막
판에 패 뒤집어지듯 파토 나고 갈수록 한탕 대신 허탕 치는 날들
이 많아 실상 허기진 날들이 더 많았다고 그래서 그 바닥 청산하
리라 수시로 다짐했다고 헌데 정작 그렇게 작정하고 몸도 마음도
다 비운 채 추는 마지막 춤엔 이상하게도 꼭 한 여자씩 스스로 넘
어 오더라고 그래서 그 바닥 떠날 수 없었다고 그러나 그 지하 세
계의 먹이 순환 법칙은 물고 물리는 사이 점점 더 맹독성만 커져
결국 돌이킬 수 없는 절망에 죽음까지 생각했다고 그렇게 때늦은
후회와 회한으로 각혈하듯 뜨거운 눈물 쏟으며 추었던 그 밤 그
마지막 부르스에 어쩌자고 또다시 동숙의 노래처럼 젖어
온 한 여자 있어 그 여자, 사무치는
순정 있어 비로소 그 어둔 바닥 벗어날 수 있었다고
다 늦은 봄날, 마디마디 관절 우두둑 불거나온 노거미 한 마리
오늘도 쿨룩쿨룩 허공을 밟고 있다 휘청이는 스텝으로 거미줄을
치고 있다 바람은 잽싸게 눈치 채고 비켜 지나고 햇살은 빤질빤
질 빠져 나가고 나는 이래저래 걸릴 수가 없는데
박이화
경북 의성에서 출생. 대구가톨릭대학교 국문과와 경운대학교 사회체육학과 대학원 졸업.
1998년 《현대시학》을 통해 등단. 시집으로 『그리운 연어』(애지, 2006)와『흐드러지다』(천년의시작, 2013)가 있음.
인생사 새옹지마塞翁之馬. 모든 일은 한 때의 일. 내가 아직 들어본 적 없는 동숙의 노래가 본문에 나온다. 梨花는 흐드러졌다 사라졌다. 다시 한 번 걸쳐 보고픈 거미줄 혹은 쇠잔해진 다리. 그러나 세월의 얄미운 외면外面. 그렇다. 누구도 최초의 모습으로 건재할 순 없다. 바람이나 햇살만큼은 남겨진 자들의 소유로 존재해 주면 좋으련만 말이다. <오>
'내가 읽은 시' 카테고리의 다른 글
로맹가리,『유럽의 교육』중에서 (0) | 2013.09.06 |
---|---|
백석,「북관(北關)」 (0) | 2013.09.03 |
강희안<나탈리 망세*의 첼로> (0) | 2013.08.31 |
이형기 <돌의 환타지아> (0) | 2013.08.28 |
이정문 <저 안전해요> (0) | 2013.08.1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