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을 주장하여 바람을 움직이게 할 사람도 없고 죽는 날을 주장할 사람도 없으며 전쟁할 때는 모면할 사람도 없으니 악이 그의 주민들을 건져낼 수는 없느니라”
- 전도서 8장-
로맹가리,『유럽의 교육』중에서
“날 떠나지마, 야네크. 그리고 날 용서해. 마을에서……”(여자)
“네 모든 걸 용서해. 언제나 네 모든 걸 용서할 거야.”
“그게 뭔지 난 몰랐어. 내가 뭘 하는 건지 난 몰랐어. 야네크……”
“말해.”
“난 더이상 그들과 그걸 하고 싶지 않아.”
“이젠 하지 않게 될거야.”
“이젠 너 말고는 어느 누구하고도 그걸 하고 싶지 않아. 너하고만 하고 싶어. 약속해줘.”
“약속할게.”
“난 그 저속한 말과 고통밖에는 모르고 있었어. 이젠 날 그들에게 가도록 내버려두지 않을 거지?”
“내버려두지 않을게.”
(중략)
“나는 널 원망하지 않아. 그들 때문에 사람들이 얼마나 많이 죽고, 맞고, 굶주렸는데. 그건 정말 더할 것도 없고 덜할 것도 없이 다 나쁜 일이야. 다 마찬가지야. 다 독일군 때문에 생긴 일이잖아.”
“그건 그들 잘못도 아니야. 그들이 인간인 이상 그건 그들 잘못이 아니야. 단지 그들의 손이 혼자서 움직였던 거야.”
“그건 인간의 잘못이 아니야. 신의 잘못이야.”
“그런 말 하지 마.”
“신은 우리한테 너무 가혹해.”
“그런 말 하면 안 돼.”
“신이 독일군을 이용해 마을을 불태웠어.”
“아마 신의 잘못은 아닐 거야. 아마 신이 자제하지 못하는 것일 거야.”
“신이 우리에게 굶주림과 추위, 독일군과 전쟁을 주었어.”
“아마 신도 매우 불행할 거야. 아마 그건 신과는 상관없는 일일거야. 아마 신이 너무 허약하고, 늙고, 병들었나보지. 나도 모르겠다.”
“아무도 몰라.”
“어쩌면 신은 우리를 돕고 싶은데 누군가 신을 방해하는 건지도 모르지. 어쩌면 신이 애쓰고 있는지도 모르고. 어쩌면, 사람들이 조금만 도와준다면 장차 신이 성공을 거두게 될지도 몰라.”
“어쩌면 그럴지도 모르지. 그런데 왜 한숨을 쉬니?”
“한숨을 쉬는 게 아니야. 행복해서 그러는 거야.”
“머리를 여기다 기대.”
“기댔어.”
“눈 감아.”
“자.”
“잘게······”
(중략)
“곰인형이구나. 귀엽다.”
“그래?”
“어릴 때 나한테도 곰 인형이 하나 있었어. 블라데크라는 이름을 붙였지.”
“내 건 이름이 미하스야. 간직한지 오래됐어. 어렸을 때 항상 이 인형과 함께 잤어. 내가 부모님의 흔적으로 간직하고 있는 건 이것뿐이야. 난 지금도 이 인형과 같이 자. 그렇지, 미하스?”
반쯤은 잠든 그녀의 목소리가 어둠 속에서 부드럽게 말했다.
“이게 내 마스코트야.”
로맹가리 – 러시아 출신으로 프랑스에서 주로 활동한 소설가. 군인, 외교관으로도 활동. 에밀 아자르라는 또 다른 필명으로 콩쿠르상을 받은 것이 사후에 밝혀져 화제를 모음. 지은 책으로 『유럽의 교육』『하늘의 뿌리』『대 아첨꾼』등이 있음.
로맹가리의 첫 번째 소설입니다. 장편소설 제목으로는 좀 어색하죠? 1962년 처음 출간할 때는 『분노의 숲』이라는 제목이었답니다. 독일 점령 치하에서 목숨을 유지하고 있는, 레지스탕스를 돕기 위해 몸을 팔고 스파이 노릇까지 하고 있는 어린 남녀의 대화입니다. 야네크는 열네 살, 여자인 조지아는 열여섯 살이죠. 장소는 야네크의 아버지가 만들어준 덤불 속의 비밀 구덩이입니다. 구태여 설명을 더 붙이지 않아도 좋을 듯합니다. 전쟁은 아이들을 이 지경까지 만들고 그리고 이런 대화를 하게도 만듭니다. 세상에 전쟁이 없어야 하는 이유 중 하나입니다.
문학집배원 한창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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