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문장

신영복의 <감옥으로부터의 사색> 中

미송 2013. 12. 2. 08:32

 

 

 

꿈마저 징역살이

-계수님께

 

꿈에 서방 만난 홀어미가 이튼날 내내 머리 빗을 기력도 없이 뒤숭숭한 마음이 되듯이, 교도소의 꿈은 자고 난 아침까지도 피로를

남겨놓는 꿈이 많습니다. 급히 가야겠는데 고무신 한 짝이 없어 애타게 찾다가 깬다든가, 거울을 들여다보면 거울마다 거기 모르는

얼굴이 버티고 섰다든가, 다른 사람들은 닭이나 오리, 염소, 사슴같이 얌전한 짐승들을 앞세우고 가는데 나만 유독 고삐도 없는 사자

한 마리를 끌고 가야하는 난감한 입장에 놓이기도 하고. 교도소의 꿈은 대개 피곤한 아침을 남겨놓습니다. 뿐만 아니라 양지 바른

시냇가를 두고 입방(入房)시간에 늦을까봐 부랴부랴 교도소로 돌아 오는 꿈이라든가......,

 

징역살이 10년을 넘으면 꿈에도 교도소의 그 거대한 인력(引力)을 벗지 못하고 꿈마저 징역을 사는가 봅니다. 우리는 먼저 꿈에서부터

출소해야 하는 이중의 벽 속에 있는 셈이 됩니다.

 

겨울 밤 단 한 명의 거지가 떨고 있다고 할지라도 우리에겐 행복한 잠의 권리는 없다던 친구의 글귀를 생각합니다.

우리들의 불행이란 양의 대부분이 가까운 사람들의 아픔으로 이루어져 있는 것이리라 믿습니다.

 

함께 계신 분들의 건강을 빕니다. 1980. 2. 27.

 

 

 

빼어남보다 장중함을 사랑한 우리 정신사의 '지리산'

-남명 조식을 찾아서

 

금강산은 빼어나긴 하나 장중하지 못하고(秀而不壯) 지리산은 장중하나 빼어나지 못하다(壯而不秀)고 합니다.

금강산은 그 수려한 봉우리들이 하늘에 빼어나 있되 장중한 무게가 없고, 반면에 지리산은 태산부동의 너른

품으로 대지를 안고 있되 빼어난 자태가 없어 안타깝다는 뜻이라 할 수 있습니다. 물론 빼어나기도 하고 장중하기도

하다면 더 할 나위가 없겠지만 산의 경우이든 사람의 경우이든 이 둘을 모두 갖추고 있기란 매우 드물다고 할 수 있습니다.

 

수(秀)와 장(壯)은 서로 양립할 수 없는 속성인지도 모릅니다. 이 둘 가운데 하나만을 택하라고 한다면 나는 단연

수(秀)보다는 장(壯)을 택하고 싶습니다.

 

장중함은 얼른 눈에 띄지도 않고 그것에서 오는 감동도 매우 더딘 것이기는 하지만 그것이 '있음'이 크고 그 감동이

구원(久遠)하여 가히 '근본'을 경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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