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문학평론 당선작
"없음"이라는 표상 / 이선경
배수아론
1. 없음의 시대, 없음의 문학
2000년대의 문학은 ‘없음’의 문학이다. 완성하거나 바꿔야 할 현실이 없고, 지켜야 하거나 구성되어야 하는 주체가 없고, 부채의식이나 짊어져야 할 상처도 없다. 그래서 문학은 견고한 현실에 균열을 가할 수 있는 정치성을 형성하거나, 자신만의 윤리를 만들거나, 아예 이 모두를 무시하고 환상이나 비현실적 질서로 일탈한다. 이제 문학은, 총체성 신화의 붕괴에도 여전히 ‘있음’의 자리를 상정해 시장주의에 맞서는 유일한 진정성의 노선을 만들거나, 스스로 존재를 증명할 수 있는 주체(self-presence)를 확립하거나, 단 하나의 올바른 유토피아적 역사를 향한 후일담을 쓰던, 90년대의 시대와는 완전히 결별한 듯 보인다. 데리다식으로 보자면 ‘없음’이란, 순수하고 오염되지 않은 초월적 ‘있음(presence)’의 세계를 상정하는 것에 대한 해체이다. 있음의 세계를 부정하고 없음의 세계를 인정하는 것에서 2000년대의 문학은 시작된다.
이러한 2000년대 문학의 흐름에 배수아의 최근작 장편 『북쪽거실』과 소설집 『올빼미의 없음』이 놓여 있다.1) 사실 배수아의 소설에서 ‘없음’으로 표상될 수 있는 주제의식은 그간 부재, 상실, 결핍, 소멸, 죽음 등의 다양한 형태로 이어져왔다. 실체가 부재하는 이미지들의 부유, 꿈을 상실한 아이들의 고아의식과 불안, 무산(無産)과 빈곤이라는 결핍에의 자처, 이전의 자신을 소멸하기 위해 여행을 떠나는 이방인들, 성장 없이 노인이 된 자들에게서 나는 죽음의 냄새, 미완(未完)과 불완(不完)의 언어를 대신하는 음악 등으로 이어지는 주제의식은 최근 “없음”이라는 표상으로 그 자리를 찾았다.
2000년대식 ‘없음’의 흐름에 놓여있으나 배수아식 “없음”이 독특한 것은, 그것이 ‘있음’ 이후의 “없음”을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없음”이 가장 표면적으로 드러나는 다음의 예들을 보자.
“그 무엇과도 비교불가한 상실, ‘외르그 없음’의 상태인 것이다.”
“베르너와는 달리 한국어로만 글을 쓰는 나는, 네가 언젠가 내 작품을 읽게 되리라 기대한 적은 단 한번도 없었다. 너무나 당연하지 않은가. 그러나 이것을 네가 결코 읽지 못하게 되리라, 하는 아이러니한 확신은 언제나 가지고 있었다. 어떤 의미에서 너의 문학적 아이라고 할 수 있는 베르너와 나는, 그런 대조적인 방식으로 스스로의 글쓰기와 너를 연관시켜나갔다. 너와의 연관 속에서 우리는 계속해서 글을 썼다.”
- 「올빼미의 없음」, pp.120~121, p.122
“없음은 네거티브이다.”
“십이년 동안 목소리가 없는 수니. 벽에 매달린 수니의 혀...(중략)...그들이 나에게 부과한 처형의 이름은 ‘없음’이었기에 나는 없는 채로 없음을 살았다....(중략)...나는 오직 말을 갖지 않은 물고기의 언어로 말할 수 있을 뿐이다. 어떤 사람들은 새가 되어 솟구친 다음 날아갔다. 자기 자신의 보이지 않는 목숨과 부딪치기.” - 「밤이 염세적이다」p.290, p.298
“없음”이라는 단어의 출처이기도 하고 소설집의 표제작이기도 한 「올빼미의 없음」에서 “없음”이 구체적으로 가리키는 것은 “외르그 없음”이다. 외르그의 없음은 상실감이나 애도의 차원을 넘어서 보다 근본적인 의미를 내포하고 있고, 이것이 배수아의 “없음”의 세계를 설명하는 단서가 된다. 역으로 외르그의 있음은 무엇을 뜻하는가? “나”는 외르그라는 전달 불가능한 독자가 있을 때에만 글을 쓸 수 있다. 어떤 매체를 통한 전달방식이든 그 안에는 전달에 실패할 가능성이 내재해 있다. 듣는 이인 타자가 말하는 이인 주체와 같을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두 집합 간의 균질성을 전제하는 허위적인 균질언어적 말걸기(homolingual address)보다 양자 간의 이질성을 인정하는 이언어적 말걸기(heterolingual address)가 역설적으로 정직한 방식이다. 2) 외르그가 결코 읽지 못할 것이라는 아이러니한 확신 속에 “내”가 글을 쓸 수 있는 것은 그것이 미지의 타자를 상정하게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외르그가 없는 세계는 이언어적 말걸기가 어려워진 세계를 뜻한다. 또한 「밤이 염세적이다」에서 보는 것처럼, “없음”은 부정(否定)의 표상이자 형벌의 표상이다. 인간에게 주어진 굴레인 “없음”이라는 형벌을 받아들이면 말과 혀를 잃게 된다. 그것은 소멸에 이르는 길이기에 인간은 “없음”에 저항할 수밖에 없다. 소멸의 길은 아직 가지 않은 길이기에 친숙하지 않은 절대적인 낯섦의 세계이다. 그러나 그것은 아이러니하게도 그것에 저항하지 않을 때 춤출 수 있는 자유와 물고기의 언어나 새의 날개를 얻을 수 있다는 역설적 표상이기도 하다. “자기 자신의 보이지 않는 목숨과 부딪”칠 때, 즉 자기 안에 내재한 낯섦과 차이 혹은 타자성을 인정할 때에만 얻을 수 있는 자유를 “없음”의 표상은 드러내는 것이다. 이처럼 말걸기의 측면에서, 언어적 측면에서, 존재적 측면에서 ‘있음’과 ‘없음’의 표지를 따라가면 배수아의 소설은 해결의 실마리를 보여준다.
2. 바벨이후의 세계, 그리고 번역
‘있음’ 이후의 “없음”, 상실로서의 “없음”, 형벌로서의 “없음”의 기원이 드러나는 것은 「무종」에서이다. 무종의 탑을 둘러싸고 세 이방인이 갈등하는 서사는 바벨탑(Babel)의 붕괴 이후 이산(離散)된 세계의 모습을 표상한다. 바벨이후 세계에 존재하는 예술과 문학, 역사와 현실은 공통언어와 사유를 잃은 인류가 끊임없이 무의식적으로 시도하는 번역행위에 다름 아니다.3) 또한 바벨은 하나의 존재를 완전하고 완벽하게 표상할 수 있는 기표의 기원이기에 번역이 필요 없는 ‘있음’의 세계에 속하는 고유명사이면서, 모든 언어에 내재한 혼돈 즉 근원적 불완(不完)과 미완(未完)의 속성을 만들어냈기에 ‘없음’의 세계를 나타내는 보통명사이기도 하다.4) 배수아의 “없음”이 “그들이 나에게 부과한 처형”일 수밖에 없는 것은 근본적으로 인간이 이러한 절대적이고 순수한 ‘있음’의 세계로부터 자의든 타의든 이산되어 나왔기 때문이다. 「무종」에 나타나는 무종의 탑은 바벨탑의 해체 이후 만들어진 ‘의사(pseudo)-바벨’이다.
“무종의 탑은 예나 지금이나 이 도시의 거의 모든 사람들에게 알려진 존재이고, 특히 택시운전사들에게는 마치 백악관이나 자금성과도 같은, 의혹 한점 없는 명백한 명칭이어서” “다른 운전자는 너무도 간단하게 탑 입구가 있는 거리를 가르쳐주었으므로, 그렇게 하여 마침내는 원하던 장소에 도착하게 되었으나”
“나는 무종의 탑이 어디 있는지 알지 못하고, 그 이름조차도 들어본 적이 없으니까. 그리고 실제로 그 탑을 눈앞에 본 다음에도 그런 탑이 있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았고, 심지어 무종이라는 이름의 탑이 이 세상에 존재한다는 것이 현실로 느껴지지 않았으며.”
- 「무종」, p.160, p.168, p.186
“무종의 탑”은 분명 “의혹 한점 없는 명백한” 고유명사이다. 그러나 그것은 지역적ㆍ 습관적인 영역에 한해서이고, 무종의 탑을 알고 있는지 아닌지의 여부가 현지인과 이방인을 가르는 기준이 된다는 데에서 그것은 폐쇄적이다. 즉 무종의 탑은 현지인에게는 바벨의 상징과도 같은 고유명사일 수 있으나 이방인에게는 수많은 다른 탑들과 다르지 않은 보통명사 혹은 “세상에 존재한다는 것이 현실로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단절적인 소외의 공간에 불과한 것이다. 이처럼 지역적 고유명사로서만 존재하는 없음의 세계에 세워진 의사-바벨은 필연적으로 분쟁과 갈등과 충돌을 내포하고 있다. 따라서 인명(人名)이기는 하지만 어떠한 표지도 없어 무종(無終)으로도 읽을 수 있는 “무종”은, 없음을 강조해 ‘있음의 세계’의 종말을 뜻하는 고유명사인 동시에 ‘없음의 세계’가 끝없이 지속됨을 암시하는 보통명사일 수도 있는 것이다.
「무종」의 근본적인 갈등은 낭독회가 열리는 무종의 탑을 찾다가 길을 잃은 세 이방인 사이의 민족적ㆍ인종적 대립 양상이다. 이미 몇 번이나 무종의 탑에 가본 적이 있지만 다른 도시에서 왔기에 정확한 경로를 알지 못하는 “독일인 모형비행기수집가”, 그 도시의 “택시운전사”이지만 외국인이기에 주소와 내비게이터에만 의존해야하는 러시아인으로 추정되는 인물, 독일인 모형비행기수집가를 따라 우연히 그 도시에 방문한 한국인 소설가 “나”의 조합은 모두가 “예외의 섬”(p.175)에 갇힌 타자임을 암시한다. “헤매고 다니던 그 휘어진 골목에서 겨우 한 블록 떨어진 모퉁이를 가볍게 살짝 돌기만 하면 나타나는 장소”인 무종의 탑은 내비게이터나 주소 혹은 “쎈터”로부터 제공받는 등록된 정보 즉 공식적 법의 질서에서는 찾을 수 없는, 법의 텅 빈 공간이자 위상학적으로 식별 불가능한 예외상태(state of exception)5)이다. 그러나 모두가 이방인이자 타자인 상황에서도 위계질서는 존재하고 그것이 충돌되어 드러나는 지점은 언어의 사용에 의해서이다. “교육받은 지식인의 흠잡을 데 없는 발음”을 가진 모형비행기수집가와 “믿기 어려울 만큼 풍부한 모음”으로 이루어진 “구멍투성이 언어”를 구사하는 택시운전사의 갈등은 없음의 세계에서 타자의 타자를 만들어 가중된 부자유와 불평등의 상황을 만드는 원인이 된다.
이러한 근원적 ‘없음’의 세계에서 타자 혹은 타자의 타자인 인간이 택할 수 있는 길은 무엇인가? 그것은 다름 아닌 “바벨적 수행(babelian performance)” 즉 번역이다. 아버지이자 신(神)인 바벨에의 접근은 금기에 대한 도전이다. 그리고 바벨 이후에도 소통을 위해 번역을 시도하는 일은 해체와 저항에의 의지이다. 언급했듯 배수아의 바벨적 수행은 전달의 실패 가능성을 상정하는 이언어적 말걸기의 자세로 나타난다. 2000년대에 들어오면서 배수아의 글쓰기는 물리적으로도 독일이라는 이국적 공간을 중심으로 전개되기 시작했고, 「올빼미의 없음」에 등장하는 실명의 평론가들과 작가들은 배수아 글쓰기의 문학적 국경이 확장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리고 이것은 고립되고 균질적인 언어공동체를 가정하는 것이 아니라, 본질적으로 이질적이고 뒤섞인 복수의 언어 속에서 말걸기를 시도하는 번역적 수행이 된다. 독일어로 인한 사고와 내면의 확장이 글쓰기에 대한 새로운 동력이 되었고, 작가는 가상의 독일어권의 독자를 의식하면서도 실상은 한국어로 한국어권 독자에게 전달할 수밖에 없다. “『독학자』는 그 동안의 내 작문숙제에 대해서 내가 독일어로 제출할 수 없었던 보충 부분이자 한국어 주석”(p.243)이라는 <작가의 말>에서부터 이미 이러한 이언어적 말걸기의 자세는 시작되었다. “너의 문학적 아이”이지만 “나”는 “네(외르그)”가 “내” 글을 볼 수 없으리란 확신, 그 영도(零度)의 경우를 상정함에도 불구하고 혹은 상정해야만 글을 쓸 수 있다. 영도라는 절대적 무(無)에 대한 아이러니한 확신은 말걸기와 전달 사이의 어떤 틈새나 잉여의 부분으로 자신의 글쓰기를 밀어 넣는 행위이다. 이러한 말걸기의 자세는 극단적으로는 각자의 모국어로 인하여 의사소통할 수 없는 인물 사이에서도, 언어라는 경계 안에서는 소통할 수 없는 인간과 동식물 사이에서도 이루어진다.
“내 언어는 아주 오래전부터 말을 더듬는다...(중략)...그러므로 당신은 내 말을 뿌리내리지 못한 외국어로 이해해야 하리라...(중략)...혹은, 오해를 피하기 위해서라면, 근본적으로는 전혀 이해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결국은, 내 말은 마침내는 내 말이 아니고 말 것이다. 혹은, 마침내는 나의 외부에서야 비로소 내 말로 새로이 태어나게 될 것이다.”
“십수년이 지난 후 우리는 ‘님펜’ 호텔에서 만나기로 되어 있었을 것이다. 잊지 않기 위해서 우리는 그 이름을 각자의 수첩에 기록했다. 님펜. 뉨펜, 님?, 님휀, 님?, 님헨, 뉨헨, 뉘므퓨엔. 뉘므프흐헨. 뉘므헨. 니이흐. 니만드. 닉스.”
-「밤이 염세적이다」, p.287, p.289
“당신의 난초나 새에게 당신의 언어로 이름을 붙이고 아침마다 말을 걸어도 난 조금도 상관하지 않겠어요. 나도 몇시간이고 난초와 새와 나란히 앉아 당신이 모국어로 말을 걸어주기를 기다리고 있겠어요. 당신은 난초에게 물을. 새에게 모이를, 그리고 내게는 당신의 언어를 주는 거죠.”
-「올빼미」, p.68
번역의 세계는 소통을 의미하지만 그것이 언제나 고정된 언어 혹은 인간의 언어라는 한계 안에서만 이루어져야 하는 법은 없다. 오히려 그러한 한계를 지우는 것 자체가 불가능한 상상의 공동체를 만드는 허위이다. 그리하여 근본적으로 “내 말을 뿌리내리지 못 한 외국어로 이해”해야 하는 세계, “당신의 모국어”로 말을 걸어도 “난 조금도 상관하지 않”는 세계, 그리하여 나에겐 “님펜”으로 말해져야 하는 것이 상대에게 “뉨펜, 님?, 님휀, 님?, 님헨, 뉨헨, 뉘므퓨엔, 뉘므프흐헨, 뉘므헨, 니이흐, 니만드, 닉스.”가 되어도 괜찮은 세계가 번역의 세계이다. 나아가 그것은 각자가 서로의 모국어를 사용하면서도 소통할 수 있는 세계, 그것이 난초나 새에게도 전달될 수 있는 세계가 된다. 상대의 잉여와 여분을 인정하는 번역적 세계는 전달보다 해체 혹은 변형으로서의 세계이다. 따라서 번역은 변경(變更/邊境)이다. 번역이란 모국어의 문법적, 표현적, 사고적 한계를 끝까지 밀어붙여 모국어를 변경(變更)하여 그것의 변경(邊境)을 넓히는 일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작가 배수아의 최근 움직임은 그녀가 에스페란토어의 세계에서 번역의 세계로 이행하고 있음을 드러내는 부분이다. 「회색時」나 「훌」 등에서 나타나는 에스페란토어의 세계는 “서사의 비타협적 금욕주의”라고 말해질 정도로 “의미의 잉여”를 인정하지 않는, 6) 상상의 균일한 공동체가 있음을 가정하는 것이다. 즉 에스페란토어의 세계 역시 ‘의사-바벨’에 다름 아니다. 그러나 이제 독학자의 에스페란토어의 세계는 바벨의 붕괴를 인정함으로써 번역의 세계로 나아가게 된다.
3. 번역하는 목소리와 유령
이러한 바벨적 수행, 번역의 수행은 어떤 방식으로 이루어지는가? 최근의 배수아 소설에는 낭독, 낭송, 구술, 대화 등 음성적 측면이 부각된다. 범람하는 음성적 측면 중 가장 중요한 것은 목소리이다. 목소리는 모든 사물과 대상을 전달하며 말, 소리, 침묵 등의 음성적 측면 뿐 아니라 문자나 텍스트와도 관계한다. 『북쪽거실』의 다음 부분은 목소리의 가장 본질적 부분을 시사한다.
“수니의 목소리가 이 세상에 존재하는 그 모든 초월 현실을 증명한다. 수많은 공명을 소유한 태생의 목소리...(중략)...수니의 목소리는 텍스트를 다시 쓴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보통의 구술과는 역순으로, 글에서 목소리로 텍스트를 받아쓰는 것이다...(중략)...수니의 목소리는 텍스트와 결혼하며 그 안에서 그들은 아기로 다시 태어난다. 그리하여 함께 흘러간다. 어딘가의 먼 강으로, 멀어져간다.”
-『북쪽거실』 pp.78~79
목소리는 텍스트와 결합하여 그 근본적 방향을 역행하고 글을 소리로 옮기는 과정에서 전혀 새로운 형태로 다시 태어나게 한다. 변경(變更/邊境) 즉 번역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만이 “초월 현실을 증명”할 수 있기 때문이다. ‘재현’이 아니라 “증명”이다. 목소리는 더 이상 고정된 주체의 정신을 모사하거나 전달하지 않는다. 미메시스의 세계에서 벗어난 것이다. 그래서 목소리는 수동적인 것이 아니라 그 자체가 능동적 주체가 되어 텍스트를 교정하고 변형하며 재창조한다. 이처럼 재현을 증명으로, 수동적 목소리를 능동적으로 바꾸어 놓는 것이 번역하는 목소리의 역할이다. 번역하는 목소리는 필연적으로 분열될 수밖에 없다. 목소리가 소유한 “수많은 공명(共鳴)”은 그것이 수많은 대상들 고유의 진동수와 공명(共鳴)할 수 있음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것은 때로는 “정착형 목소리”여서 “배타적 근원”(『북쪽거실』, p.105)이 되기도 하고, “실제로는 들리지 않는 죽은 사령관의 목소리”(『북쪽거실』, p.30)이기도 하며, “내 것이 아닌 채로 나에게서 흘러나오는 목소리, 내 것이 아닌 의지를 가진”(『북쪽거실』, p.86) 것이 되기도 한다. 즉 번역적 주체의 분열적 존재방식이 목소리로 나타나는 것이다.
“①밤이 염세적이다. 밤이 무거운 신음을 토한다. 벽의 몸으로 둘러싸인 밤의 내부와 외부, 내부의 외부, 내부에 둘러싸인 외부, 그 밤에 관해서 이제 이야기한다. ②내가 살던 나라는 벽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③그들이 살던 나라, 수니가 살던 나라를 말하는 것이다. ④책에서 바다에 관한 이야기를 읽는 순간부터 그들은 표류하기 시작한다.”
- 「밤이 염세적이다」, p.282 (번호, 인용자)
「밤이 염세적이다」의 시작부분은 이러한 목소리의 분열적 양상을 명확히 드러낸다. 주어와 주체와 주제가 미분화된 목소리의 덩어리를 의도적으로 분절해보면, ①은 서술하는 목소리가 주제인 “밤”에 대해 이야기하는 부분이고, ②에서는 “나”라는 목소리가 그 “밤”을 구성하는 “벽”에 대해 말하며, ③에서는 다시 서술하는 목소리가 “나”의 주제(“나라”)에 부연설명을 하고, ④에서는 누구의 것인지 알 수 없는 목소리가 다시 새로운 주제(“표류”)를 꺼내는 것이 된다. 이 네 문장이 연결될 수 있는 것은 각각이 가진 주제가 연쇄적으로 앞문장의 일부에서 비롯되었다는 것밖에는 없다. 주어와 주체가 일치하지도 않고 주체들끼리 소통하고 있지도 않으며 단지 각자의 목소리만을 내고 있다. 여기서 목소리의 주체로 명확히 골라낼 수 있는 것은 ①, ③의 서술적 주체와 ②의 행동하는 주체 “나(수니)”이다. 중첩과 빙의로 인해 서로의 도플갱어임이 분명하지만, 행동하는 주체 “나(수니)”는 서술적 주체로부터 달아나려하고 한다. “나”는 여러 번 서술적 주체에게 “내가 말하고자 하는 모든 것 중에서 그 어떤 것도 내가 당신을 떠나는 이유를 직접 설명해줄 수 있는 건 하나도 없을 것이다”(p.282, p.286, p.289, p.297)라고 말하는데, 이는 주체가 여러 갈래로 갈라져있음을 보여주는 것인 동시에 의도적인 주체의 분리를 의미하기도 한다. 그리고 결국 이들이 “언믹스드 컴파운드(unmixed compound)”, “언믹서블(unmixble)”(p.305)이라는 것, “모든 이들의(정확히 말하자면 모든 삶의) 도플갱어”이며 “온갖 몸, 온-것들의 전체 몸”이라는 것이 증명되는 것으로 서사는 마무리 되고 목소리는 “더이상 말이 없”게 된다.
왜 이처럼 분열된 목소리는 서로가 서로의 존재를 증명하고 상대가 있어야만 자신을 정의할 수 있는 데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갈라지고 서로에게서 분리되려 하는가? 그간 배수아 소설에서 다중(多重)적 주체의 양상은 여러 번 논의되어 왔던 사항이다. 「훌」의 도플갱어적 주체, 『에세이스트의 책상』의 무성(無性)적 혹은 양성(兩性)적 주체는 자기 안/밖의 타자를 발견하지만 결국 이들과 단절된 채 자신만의 윤리를 세우고자 하는 주체의 모습으로 파악되었다. 이러한 의미에서 『독학자』의 “얽매여 있지 않음(Unabh?ngigkeit, 다른 것에 의해서 그 성질이 규정되지 않는, 타자에 의존하지 않는, 독립적인, 개의치 않는, 별개의 독자적 세계인, 존재의 전제조건을 가지지 않은, 오직 스스로 결정하기에 조금도 주저함이 없는 것)”(p.209)은 상징적이다. 그러나 배수아의 최근작에서 관찰되는 목소리는 분열되고 공명하고 파장을 일으키지만 궁극적으로 외부의 타자 혹은 자기 안의 타자와 통합되려는 모습을 보여준다. 위에서 살펴본 「밤이 염세적이다」의 시간과 공간을 넘나드는 목소리가 결국 차이를 인정하는 통합으로 귀착되었듯이 말이다(언믹스드 컴파운드(unmixed compound)). 이 소설과 주제, 주체를 공유하며 대리보충(the supplement)적 관계에 놓여있는 『북쪽거실』은 이러한 목소리의 분열과 공명과 파장이 궁극적으로 향하는 지점을 보여준다.
『북쪽거실』의 서사는 ‘수용소에서 석방된 수니가 “a여인”을 만나기 위해 희태를 떠나다’로 요약될 수 있다. 소설의 전반부에서는 희태와 그 주변을 둘러싼 여인들(린, 사촌 강은희)의 목소리가 강조되고 후반부에서는 수니가 “a여인”을 만나게 되는 것과 수니의 목소리가 주를 차지한다. 그래서 이 소설 역시 『에세이스트의 책상』을 보는 관점처럼 주체의 성차에 의한 향유(jouissance)방식의 차이로 볼 수도 있다. 7) 여성을 대상화하여 환상 안에서 불완전한 향유를 누리는 남성주체와는 달리, 근원적 결여와 직접 교통하는 여성주체의 향유라는 틀에서 보면, 여성주체인 “수니”가 ‘대상 a’(objet a)의 상징인 “a여인”을 만나 궁극의 향유를 달성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수니와 “a여인”의 만남은 그 이상이다. “a여인”의 상징은, 표상 불가한 근원적 결여인 ‘대상 a’(objet a)를 포함하는 것은 물론 그 이상인 ‘차연(diff?rance)의 a’에 가깝기 때문이다.
“나는 a여인의 옷자락 속으로 손을 넣고 그녀의 입술에 입맞춘다. 얼마나 오랫동안 이 해안에 도달하기를 꿈꾸었던가. 나는 마침내 소망을 이루었고, 그 무엇도 드물게 찾아온 이 미성년적 열락의 상태, 이 한없이 열린 들뜸을 파괴하지는 못할 것이라는 예감을 갖는다. a여인은 내 어깨를 부여잡고 끊임없이 자신의 꿈에 대해서 속삭인다.”
“우리는, a여인의 이름이 a여인이라는 것을 제외하고는 그녀에 대해서 아무것도 아는 게 없다,..(중략)...a여인의 울음소리를 듣는다. 내가 일생동안 한 번도 울어본 적이 없는 그런 방식으로, a여인은 운다. 아마도 저 여인은 다른 문화권에서 온 외국인이리라.”
“a여인이 나를 쳐다보는데, 사방에 깔린, 수면처럼 검게 번득이는 어둠에 눈이 익고 나자, 나는 비로소 깨닫게 된다. 그것이 나의 얼굴임을...(중략)...그것이 나와 a여인의 첫 만남이었는데."
""여인은 계속해서 말한다. 내가 떡갈나무 뿌리가 되어 땅 밑으로 내려갈 당시, 파묻힌 벽돌의 도시와 무덤들을 지나...(중략)...내가 떡갈나무 뿌리가 되어 땅 밑으로 내려간 이후 나는 보이지 않는 부족의 늙은 여자샤먼이 되었는데...“
-『북쪽거실』 p.190, p.256, pp.257~258, pp.259~260 (강조, 인용자)
수니가 찾아 나서는 “a여인”은 분명 근원적 결여이자 자신 안의 타자인 ‘대상 a’여서 만나는 순간 상실되었던 “나의 얼굴”과 대면하게 되고 “미성년적 열락”을 누릴 수 있다. 하지만 “a여인”은 울음소리조차 이해할 수 없는 “외국인”이며, “떡갈나무 뿌리”가 되기도 하고 “늙은 여자샤먼”이 되기도 하는 몸바꾸기의 귀재이기도 하다. 즉 “a여인”은 비결정적이고 고정적인 방식으로는 정의될 수 없는 떠도는 기호이다. 발음은 같지만 difference를 differance로 바꾸어놓음으로써 “a”라는 표지는, 들리지 않지만 씌어지거나 읽혀지는 것으로 고정된 의미에 차이와 지연을 만들어낸다. 즉 “a”는 충만되지 않은, 단순하지 않은, 구성되며 변화하는, 다른 것이 될 수 있는 무엇이다. 8) 이러한 “a”의 표상이 있기에 목소리는 더 자유롭게 이동하며 자기 밖의 다른 대상들과 고유의 진동수로 공명하며 번역적 수행을 실천할 수 있다. 『주홍글씨』의 헤스터 프린이 가슴에 달고 있는 A가 간음(adultery)도, 천사(angel)도, 애정(affection)도, 예술(art)도, 한 남자(Arthur)도 될 수 있는 것처럼, 수니가 만나는 “a여인”도 충만되지 않은, 단순하지 않은, 구성되며 변화하는 원천으로 존재한다.
그리하여 목소리는 있음 속에 없음이, 없음 속에 있음이 포함되는 유령이 된다. 살아 있는 것도 죽어있는 것도 아닌 유령은 결코 소멸되지 않으며 언제든지 귀환한다. 목소리의 배우이자 라디오 방송극의 성우인 수니는 듣는 이에게 “목소리의 환영을 빌려”(p.160)주어 “은밀하고 사적인 회상”(p.158)을 불러일으키게 한다. 그럼으로써 듣는 이가 “동시에 수많은 삶을 갖고 있”(p.170)다는 것을 알게 하며 “타인과 사물의 꿈들로 연결되는” “꿈의 유령 혹은 꿈의 환각”(p.185)으로 안내하는 것이다. 따라서 번역하는 목소리는 유령이 되어 타자와의 만남과 소통을 가능하게 해준다. 프랑스어 ‘hoste’라는 말에는 주인과 손님이라는 두 가지 뜻이 있어, 주인이 손님이 되고 손님이 주인이 되는 치환이 가능하고 이것이 자기 안/밖의 타자에 대한 환대(hospitality)의 기본 조건이 된다. 9) 최근 배수아 소설에 반복되는 방/벽의 이미지는 10) 이러한 유령의 존재를 가능하게 한다. 데리다의 처녀막(hymen)이 대립들 사이의 혼란을 만들면서도 그 사이에 위치하는 작용인 것처럼11) 방/벽의 이미지는 고립의 원인이면서 타자와의 만남을 가능하게 하는 유령의 존재 기반인 것이다.
배수아의 2000년대는 사실 개인의 단자적 윤리를 세우는 데에 치중해 있었다. 자신만의 상아탑을 세우려는 독학자, 자기충족적이고 자기지시적인 음악에의 함몰 등 고립되고 단절된 “얽매여 있지 않음(Unabhngigkeit)”을 쌓아 온 것이다. 그러나 이제 배수아의 소설들은 타자를 환대하기 시작했다. 「양의 첫눈」은 이러한 환대를 가장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작품이다.
"양은 단지 기다릴 뿐이었으며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어떤 막연한 대상에게 순종하는 자세를 취하면서도 자신의 수줍은 영혼의 세계에 침략자를 받아들일 준비를 하고 있었다...(중략)...미라가 자리에서 일어서서 양에게 다가왔다. 그리고 양은 마침내 자신이 눈물을 흘릴 시간이 다가왔음을 알았다.“
- 「양의 첫눈」, pp.32~35
“그토록 아름다우나 그토록 아름다웠던 다른 존재들과 마찬가지로 접근과 소유의 욕망을 일으키지는 않았던, 그 잠든 비너스”만을 사랑했던 “양”은, “아름다움이란 친밀과 교제의 대상이 아니라 단지 관조의 대상”(p.23)이라 말했던 「회색時」의 “나”와 닮았다. 그러나 “양”은 이제 자기의 세계 안에 타인을 허락한다. 여기서 “첫눈”이란, “그해의 첫눈” (p.16)이기도 하고 “첫눈에 이끌림”(p.34)을 말하기도 한다. 갑자기 내려 겨울의 시작을 알리는 첫눈이나 예상치 못 한 상태에서 일어나는 상대에 대한 끌림은 모두 무방비의 상태에서 갑자기 자아에 침투하는 타자의 유령이다. 그리고 “양”이 “침략자를 받아들일 준비”를 하는 것, “마침내 눈물을 흘릴 시간이 다가왔음”을 알게 되는 것은 손님을 환대하는 주인, 주인을 맞이하는 손님의 모습이다.
4. 투명한 꿈의 에크리튀르
배수아의 소설은 “없음”의 세계에서 번역하는 목소리가 유령이 되어 타자를 환대하는 것에서 끝나지 않는다. 목소리들의 흔적(痕迹)과 잔향(殘響)은 어떤 “엘리시움(Elysium -이상향)”의 일부이다. 다시 한 번 앞장에서 제시했던 목소리의 역할에 주목해보자. “목소리는 텍스트를 다시 쓴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보통의 구술과는 역순으로, 글에서 목소리로 텍스트를 받아쓰는 것이다”. 이 문장에서 지적 혹은 비판하고 있는 구술과 텍스트에 대한 일반적인 전제는 텍스트가 목소리를 받아쓴다는 것이다. 하지만 역으로 목소리가 텍스트를 다시 쓰게 함으로써 전복을 시도하고 있다는 의미가 된다. 철학의 이성중심주의와 음성중심주의는 텍스트를 단순히 목소리를 재현하는 미메시스(창작적 모방)라 치부해왔다. 초월적 목소리가 이를 재현하는 텍스트보다 우위에 있는 세계는 ‘있음의 세계’이다. 그래서 없음의 세계에서 형이상학적 목소리는 자기현전 즉 초월적 위엄을 가진 존재이기에 비판되기도 한다. 12) 있음의 세계에 종말을 고하고 이를 전복하기 위해 없음의 세계에서는 에크리튀르(e'criture)가 필요하다. 단순히 ‘글쓰기’로 번역될 수 없는 에크리튀르는 이질적인 것들이 끊임없이 주고받기를 반복하는 표상들의 유희이다. 이는 문자뿐 아니라 영화, 회화, 음악 등 표기를 가능하게 하는 모든 것을 지칭하며 기호의 한계를 지우고 모든 논리를 파괴한다.13) 따라서 배수아는 목소리가 텍스트를 받아쓰게 하는 역전적 과정을 통해 오히려 특유의 독자적인 에크리튀르를 창조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북쪽거실』 각 장의 제목과 구성은 이 소설이 목소리로 이루어진 에크리튀르라는 것을 알 수 있게 한다. 1장인 “목소리의 내부”는 외부의 기표과 내부의 기의로 구분될 수 없는 에크리튀르의 세계에서 목소리의 내부가 의미가 아니라는 것을 보여준다. 오히려 “텍스트 바깥에는 아무것도 없다”는 데리다의 해체선언을 연상시키듯 목소리는 해체되어 있고 “린”, “수니”, “순이”등의 이름은 그에 해당하는 대상이 여럿이거나 한 대상에 이름이 복수인 분열적 구성을 보여준다. 2장인 “목소리의 콜라주”는 콜라주의 형식이 그러하듯 다양한 목소리의 범람과 이들이 계층, 국적, 인종 등에 의해 각자의 차이를 유지한 채 통합되지 않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래서 그들이 막힌 현실을 극복할 수 있는 방법은 “린의 국어교사”처럼 퇴폐적이고 몽환적 환상을 유지하는 수밖에는 없다. 3장인 “목소리의 유령”에 가서야 유령적 존재론을 통해 타자와 소통할 수 있게 된 목소리가 제시된다. 그리하여 수니의 목소리는 시간과 공간을 넘어 신화시대의 “헬레네”나 “a여인”과도 소통할 수 있게 된다. 4장의 “북쪽 거실에서 온 여인”은 목소리가 궁극적으로 만들어 낸 언어적 에크리튀르의 세계를 보여준다. “a여인”이 몸바꾸기의 귀재인 차연적 존재인 것과 더불어 소설의 제목이기도 한 “북쪽거실”의 떠도는 기호로서의 특징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수니”가 외국어를 잘 못 알아들어 출신지 대신 머물고 있는 숙소의 상호명을 답한 데에서 “북쪽거실”은 등장한다. “북쪽거실”은 잘 못 전달된 외국어이자, 수니를 이방인으로 만드는 표지이며, “우리의 약속 장소”였지만 “결코 지킬 수 없는 마지막 약속”(p.266)의 장소이기에 근원적으로 떠도는 기표의 상징이자 기표의 자율적 부유를 뜻한다. 배수아는 최근 소설들에서 “북(北)”이라는 떠도는 기표를 만들어내는데, “세상의 모든 기차가 하나의 주소로만 향하는 그 북역”(「북역」, p.96)에서도 “북(北)”은 구성되며 변화하는 원천이 된다.
그렇다면 번역하는 에크리튀르 전체의 모습은 무엇인가? 그것은 꿈-양식이다. 「올빼미」, 「올빼미의 없음」, 『북쪽거실』은 배수아의 ‘꿈 삼부작’이다. 배수아에게 꿈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프로이트적 백일몽이나 몽환적 환상보다 더 근원적인 인간 마음의 투명한 전체이다. 「올빼미」와 「올빼미의 없음」에서 “나(배수아)”는 “너(외르그)”와 꿈에 대한 논쟁을 벌인다. “너”에게 꿈이 “해석”되어야 할 대상, 현실의 결핍을 나타내는 “심리적 의미”이기에 그것은 “프로이트의 시작(詩作)”으로 불릴 만큼 고정되고 정리된 미학적 형식이다. 그러나 “의식 속에서 고정되고 자리를 찾은” “꿈은 꿈 아닌 것으로 변질”된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그래서 “나”에게 “쌍둥이와 같은 동질의 마음”을 느끼게 하는 것은 “카프카의 일기와 메모, 편지와 산문 등의 글에서 꿈과 관련된 부분만을 따로 모아 편찬한” 카프카의 『꿈』이다. 그것이야말로 인간의 마음 그 자체를 가감 없이 보여주는 형식이기 때문이다. 즉 투명성(transparence)에의 추구가 “꿈”이라는 형식을 추구하는 이유가 된다. 투명성이란 사물의 반짝임을 그 자체 안에서 경험하는 것, 있는 그대로의 사물을 경험하는 것이다. 14) 그리고 이러한 투명성을 총체적인 필연성 안에서 느끼기 위해서는 말로 표현되지 않는 것을 다루는 스타일 즉 특정한 형식이 필요하다. 15) 따라서 배수아의 투명한 꿈으로 이루어진 에크리튀르는 꿈-양식이라는 형식으로 정의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꿈-양식으로 투명성을 실천하는 것이 문학이다.
“꿈은 어쩌면 문학일 거예요...(중략)...우리는 꿈을 해독할 필요가 없어요. 당신이 그 편지를 읽고 내가 곁에 있었던 것처럼, 그렇게 읽고 그렇게 듣는 것으로 너무나 충분하겠죠.”
“그리고 무조건 아는 거예요. 그들은 해변으로 가는구나. 그것이 꿈의 전부이자 본질이죠. 그렇듯 꿈은 자체의 무한한 투명성으로 인해 불완전한 샤먼이랍니다. 우리는 꿈의 해안으로 흘러가는데, 꿈은 투명한 경계를 활짝 열고 우리를 타인의 꿈속으로, 꿈속의 상상으로, 타인이 꾸는 우리의 꿈속으로 인도해버리기도 하니까요.”
- 『북쪽거실』, p.194, p.240
『북쪽거실』은 배수아식으로 쓰여진 꿈을 통한 투명한 에크리튀르이다. “단지 나 자신의 꿈으로만 이루어진 책을 쓰고 싶다”(「올빼미의 없음」, p.119)는 목적으로 쓰여진 것임에도 “타인의 꿈속으로, 꿈속의 상상으로, 타인이 꾸는 우리의 꿈속으로 인도”될 수 있는 것은 꿈이라는 형식이 투명성의 보편적 존재방식을 보여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즉 배수아가 만들어낸 꿈-양식은 목소리의 분열, 공명, 파장으로 이루어진 투명한 에크리튀르의 형식이다.
이러한 투명한 꿈이 에크리튀르로 정립될 수 있는 것은, 그것이 끊임없이 기표들 사이의 주고받기 운동을 반복하는 유희이며 초월적 기의와 음성언어로부터 해방된 기표를 구현함과 동시에, 보다 근원적이고 정신적인 차원에서 문자 자체에 대해 고려하는 그라마톨로지 즉 문자학의 차원으로까지 확장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올빼미”를 문자로 만드는 것에서 시작된다.
“항공우편이란 글자 위에 찍혀 있는 그것은 올빼미의 왼쪽 날개로, 거리와 연속성을 한꺼번에 의미하는 근대의 상형문자로 보였다.”
- 「올빼미」, p.73
“올빼미는 우리들의 어느 한순간의 자서전이었고, 이미 씌어진 자서전의 시간을 되돌릴 수는 없으므로, 나는 올빼미를 그곳, 사라진 나무에 못박은 셈이다. 올빼미와 함께 나를 못박았다. 그러나 너는, 과거에도 그랬지만 앞으로도 영원히, 우리가 사랑한 올빼미의 글, 그것을 읽지 못하게 되리라.”
-「올빼미의 없음」, p.128
“네”(외르그)가 보내준 “육체의 정적”을 간직한 “올빼미의 왼쪽 날개” 사진은 “나”에게 “상형문자”가 된다. 앞에서 이언어적 말걸기라는 도식을 통해 언급했듯, “나”는 “너”라는 영도(零度)의 독자를 상정할 때에만 글을 쓸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아이러니한 소통은 올빼미라는 상형문자로 새로운 차원의 소통방식을 마련하게 된다. 전세계적으로 통용되는 항공우편의 마크와 영도의 독자인 “네”가 나에게 보내준 올빼미의 사진은 소통/불통, 연속/불연속이라는 양 극단적 차원에 놓인 것들의 상징이다. 그러나 이 둘을 병치시켜 “거리와 연속성을 한꺼번에 의미하는 근대의 상형문자”로 인식하는 것은 올빼미라는 매개체를 나름의 방식으로 변경(變更/邊境)해 새로운 기호 혹은 표상으로 만드는, 번역적 에크리튀르의 문맥에 놓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소통은 “너”의 집 앞 전나무가 베어지면서 “올빼미”가 오지 않게 되고, “너”의 죽음으로 또다시 불연속과 불통의 차원으로 떨어진다. 따라서 처음에 외르그의 죽음으로 언급한 “올빼미의 없음”의 의미는 단순한 죽음이나 상실의 차원이 아니게 된다. 그것은 이언어적 말걸기의 공간에서 겨우 찾아낸 상형문자의 세계가 또다시 불연속과 불통의 차원에 놓여 고립된 공간으로 전락함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래서 필연적으로 또 다른 번역적 에크리튀르의 형식이 필요하게 된 것이고, 그것이 꿈-양식이다.
“우리는 본능적으로 알게 되는 거죠, 유일하게 꿈을 통해서, 우리의 쌍둥이 삶, 거울의 삶이면서 주인인 삶으로 들어가게 되는 것임을. 슬라이스된 단편과 깊고 불연속적인 인상들로 이루어진, 우리 자신의 꿈경험이면서 동시에 우리 밖의 다른 누군가의 경험-꿈이기도 한 것. 당신의 꿈속에 나타난 당신은 누구인가요? 당신은 어디로, 누구의 꿈속으로 흘러간 걸까요? 그리고 당신을 뒤돌아보지 않았던 그 사람들은 누구인가요? 그게 정말로 나라면, 나는 또 누구의 꿈속에 있었던 것일까요?”
“나는 어느덧 알타이 샤먼의 옷차림을 하고 있는데, 나는 마지막까지 가방을 끌고 가며, 내 몸이 마침내 흙 속에 머리만 남기고 스며든 후, 그제야 나는 일생 동안 나를 지켜보고 있었으며, 내 육신의 낯모르는 주인이었고, 최후의 순간에도 노점의 천막 그늘 아래 나란히 서서 나를 응시하고 있는, 그러나 그동안은 내가 단 한 번도 사랑스럽게 돌보지 못했던, 사라져버린, 사라져가고 있는 수많은 꿈의 유령들을 잠시 동안 친근하게 바라보게 된다.”
- 『북쪽거실』, pp.241~242, pp.270~271
꿈-양식이라는 에크리튀르를 통해 “나” 혹은 “수니”는 안/밖의 타자와 소통할 수 있는 방법을 터득하게 된다. 그것은 주체/타자의 꿈을 샤먼적 존재로 흘러 다니는 것을 통해서 이루어지고 결국 꿈-양식은 배수아의 번역적 에크리튀르가 다다른 궁극의 지점이 된다. 『북쪽거실』의 꿈-양식이 타자와 소통하면서도 주체의 투명한 마음의 전체일 수 있는 것은 그 형식적 특징 때문이다. 『북쪽거실』에는 주인공 수니의 꿈뿐만이 아니라 “강희태”, “강은희”, “린”과 같은 다양한 타자들의 꿈이 목소리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분열, 공명, 파장하며 서술된다. 최근 배수아 소설에 많이 등장하는 콜론(:)의 사용은 주체/타자의 꿈이 소통하고 있음을 나타내는 변경(變更/邊境)하는 번역적 에크리튀르의 흔적이다. 콜론(:)은 “질문:” 대 “답변:”이나 “나:” 대 “마오”(「빠리 거리의 점잖은 입맞춤」)의 경우나 “수니”, “중국인 요한의 머리:”, “오리온의 사람들(합창):”(「밤이 염세적이다」)의 경우처럼 목소리임을 강조해 대화형식이나 연극적 형식을 만드는 것뿐만 아니라, “2008년 12월 2일, 빌레펠트:”, “2006년 10월 26일의 내 자서전에서:”, “2008년 9월 어느날 베를린 슈프레 강변에서의 일기:”(「올빼미의 없음」)나 “이어지는 희태의 일기:”, “린의 메모, 의문부호가 없는 질문들:”, “2002년 서울, 린의 꿈:”, “2002년 베를린, 희태의 꿈:”(『북쪽거실』)의 경우처럼 소제목이나 인용 혹은 부연설명의 기능으로도 쓰인다. 이는 서양식 글쓰기의 방식을 차용해 콜라주적이지만 서로의 꿈을 넘나들며 소통할 수 있는 배수아식 에크리튀르의 방식이다. 따라서 꿈-양식이라는 에크리튀르는 “올빼미의 없음” 이후에 찾아낸 새로운 문자의 세계, 이언어적 말걸기의 방식인 것이다.
이러한 모든 의미에서 『북쪽거실』의 표지로 쓰인 조르지오 데 키리코의 《거리의 신비와 우울》은 회화적인 방식으로도 에크리튀르를 보여주는 작가 배수아의 결의이다. 무수한 열주(列柱)로 이루어진 두 개의 건물 사이에 거리가 놓여있고, 여기엔 문이 열려져 검은 내부를 드러내는 화물칸과 맞바람에 굴렁쇠를 굴리는 소녀가 있다. 어두운 거리 저편에 보이는 광활할 것 같은 빛의 세계는 소녀를 위협하는 것처럼 보이는 한 그림자로만 유추할 수 있다. 이 그림이 어디에나 있을 법한 풍경처럼 보이지만 어느 곳에도 존재하지 않는 장소처럼 보이기도 하는 것은 원근법의 무시, 여러 개의 소실점, 태양계의 법칙을 따르지 않는 빛과 어둠의 인위적 구분, 노란 거리와 파란 하늘의 과장된 보색 대비 등의 전위적 기법 때문이다. 이성의 지배로부터 멀어져 무의식의 세계를 재현하고자 한 초현실주의의 회화와 배수아의 에크리튀르가 만나는 지점은 이전까지 증명하지 못 했던 인간의 부분을 이전까지 없던 방식으로 표상해낸다는 데에 있다.
1) 이 글에서 인용되는 배수아의 소설은 다음의 판본을 기준으로 한다: 『올빼미의 없음』, 창비, 2010; 『북쪽거실』, 문학과 지성사, 2009;
『훌』, 문학동네, 2006; 『독학자』, 열림원, 2004
2) 사카이 나오키, 『번역과 주체』, 후지이 다케시 역, 이산, 2005, pp.55~56
3) George Steiner, After Babel: Aspects of Language and Translation, Oxford University Press, 1998, p.31
4) Jacques Derrida, 'Des Tours de Babel', in Acts of Religion, ed. Gil Anidjar, Routledge, 2002, pp.104~106
5) 조르조 아감벤, 『호모사케르』, 박진우 역, 새물결, 2008, p. 97
6) 서영채, 「서사의 비타협적 금욕주의」, 『문화예술』 통권 319호, 2006년 2월호, p.52
7) 신형철, 「당신의 X, 그것은 에티카- 김영하의 90년대와 배수아의 2000년대」, 『몰락의 에티카』, 문학동네, 2008, pp.156~161
8) 자크 데리다, 『입장들』, 박성창 역, 솔, 1992, pp.31~32, p.50; Jaques Derrida, 'Differance', in Margins of Philosophy,
trans. Alan Bass, Chicago: Chicago University Press, 1982, pp.3~4
9) 자크 데리다, 『환대에 대하여』, 남수인 역, 동문선, 2004, p.135
10) “어느 순간에 방들은 모두 바닥이 놋쇠빛으로 번쩍이는, 어디가 끝인지 알 수 없는 기다란 유리의 갤러리로 변한 듯했다...(중략)...
김씨의 부인이 걸음을 옮길 때마다 빛은 스스로 형체를 바꾸면서, 마치 그녀의 몸이 물로 이루어진 양, 수면에서 어른거리는 햇살처럼
무수한 그물과 창살을 만들며 헛되이 그녀를 가두려고 했다. 투명하고 밀도가 없는 빛의 몸이 그녀와 뒤섞였다. 그러나 김씨의 부인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 스스로 물이 되어 그 사이를 빠져 흘러나갔다.”
- 「어느 하루가 다르다면, 그것은 왜일까」, pp.262~263
“벽과 벽을 통과해서 일생에 걸친 산책을 하다 보면, 어느 날인가는 벽 안쪽의 땅을 디딘 네 발자국을 벽 바깥쪽에서 발견하게 될 거야.
아무도 살지 않는 해변의 단 하나의 발자국, 시간도 장소도 암시하지 않는 어느 날의 발자국, 혼자이면서 혼자가 아닌 발자국, 로빈슨의
것이 아닌, 로빈슨의 발자국을.”- 『북쪽거실』, p.103
12) 자크 데리다, 『목소리와 현상』, 김상록 역, 인간사랑, 2006, pp.116~117
13) 자크 데리다, 『그라마톨로지에 대하여』, 김웅권 역, 동문선, 2004, pp.20~27
14) 수전 손택, 「해석에 반대한다」, 『해석에 반대한다』, 이민아 역, 이후, 2002, p.33
15) 수전 손택, 「스타일에 대해」, 위의 책, p.63, p.67
* 참 노력해서 쓴 글이다 싶어 눈물겹다. 감기열때문도 그렇고 눈시울이 뻘게지고 있다. 거울 속에 뻘건 눈자위를 들여다본다. 그건 잠시
누우면 사라질 빛이다. 이곳저곳 찾아다니지 않아도 저 많은 참고서적들을 모아서 지어 놓은 글을 쉽게 읽는다. 맹렬한, 독자獨自적인, 집요하게
고뇌스런, 글에 경의와 고마움을 표한다. 두 번 이상 읽게 만들고 밑줄까지 긋게 만든 저들의 노력에 박수한다. <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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