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진이의 성불기
-홍석중의 '황진이'론
이경재
1. 사건으로서의 황진이
홍석중의 황진이는 문학사적 사건이다. 북한 작가에 의해 북한에서 창작된 소설이 남한에서도 출판되어 수많은 대중들의 주목을 받았으며, 남한의 권위 있는 문학상까지 받은 사례는 분단 이후 처음 있는 일이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황진이는 '살아 있는 신화, 황진이' 라는 평론집이 나올 정도로 전문적인 독자 집단의 뜨거운 관심을 받았다. (중략)
황진이에 대한 논의는 기존 북한문학의 맥락에서 그 소설사적 의미를 찾는 것에서부터 시작된다. 논의의 방향은 두 가지인데, 첫째는 이전의 소설과 다른 변별점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이전 소설과의 연속성에 맞춘 것들이다. 변별성으로 가장 주목되는 것은 남녀간의 성애에 대하여 긍정적이며, 그것을 적극적으로 다루고 있다는 점이다. (중략)
황도경은 홍석중과 전경린의 황진이를 비교하면서, 전경린의 황진이는 “억압적이고 권위적인 사회 속에서 여성이자 기생의 딸이라는 이중적 굴레를 온 몸으로 맞서 대면하면서 자유롭고 주체적인 여성으로 살아가기 위해 몸부림친 인물, 이라고 보고 있다. 이에 반해 홍석중의 황진이는 ”황진이가 민중적으로 영웅으로 설정된 놈이에게서 진정한 사랑을 발견하기까지의 과정을 보여주면서, 그 과정이 위선적이고 탐욕적인 양반 사대부들의 애정 행각과 대비되면서 양반사회에 대한 비판의 성격이 강조 되어 있다고 보고 있다. (중략)
전경린의 황진이는 조선 시대의 제도 그 자체로부터의 탈피를 통한 완전한 자유를 꿈꾸는 “기생이자 예술가 그리고 자유인 황진이의 삶은 유목민적 삶을 닮았다” 고 보고 있다. 홍석중이 그려낸 황진이는 아버지의 세계와 놈이와의 세계를 분열된 존재로 보고 있으며, 이러한 “분열적 면모를 통해 인간의 욕망을 발견함으로써 사회주의 문학의 이데올로기적 경직성을 탈피한 것은 홍석중의 황진이가 가져온 큰 수확으로 평가하고 있다. (중략)
2. 관례화된 현실종교로서의 불교 비판
홍석중의 황진이는 일반적인 북한문학이 그러하듯이 선명한 윤리적 이분법의 바탕 위에 서 있다. 지배 계급과 피지배계급의 성격과 행위를 끊임없이 대비시키며 전자를 악으로 후자를 선의 표상으로 절대화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 작품에서 승려들은 위선과 허위에 바탕한 삶을 산다는 점에서 당대의 양반 사대부들과 같은 차원의 존재들로 그려지고 있다. 황진이의 생각을 나타낸 다음의 인용문에 잘 드러나듯이, 황진이는 불교자체에 대하여 부정적인 입장이다.
결국은 불교나 유교나 피장파장이라는 소리이니 진이로서도 덧붙일 말은 없지만 구태여 자기더러 부처님에 대한 이야기를 꼭 하라면 불상 그 자체보다도 그 불상의 표정을 가지고 한마디 따끔하게 꼬집고 싶었다. 밤낮 불상 위에 가부좌를 하고 앉아서 바보처럼 빙그레 웃고 있는 꼬락서니를 보면 마치 이승의 모든 것이 자기 때문에 행복한 극락으로 변한 줄 아는지 자못 만족한 웃음인데 렴치가 있으면 한번 세상을 둘러보라. 아무리 흙으로 빚은 우상이라도 얼굴 표정에 론리가 있어야 하지 않는가. 밥통 같은 것. (중략)
3. 신분제를 뛰어넘는 인간평등의 선언
이 작품이 기존의 북한소설과 여러 가지 측면에서 다른 점이 발견되는 것은 사실이지만, 기본적으로 민중적 계급성이라는 시각을 밑바탕에 깔고 있음은 부인할 수 없다. 인물의 설정에 있어서도 피지배층과 지배층을 선악의 윤리적 이분법으로 나누어 살펴보는 경향이 뚜렷하기 때문이다. 작품의 후반부로 갈수록 그러한 시각은 뚜렷해서 2편까지만 해도 풍류남아로 그려지던 송도유슈 김희열은 3편에 이르러 그 어떤 인물보다도 부정적인 인물로 형상화된다. 진이와 혼담이 오고갔으며, 기녀가 된 후에도 은밀한 내적 고백의 상상적 수신자가 되어주곤 하던 윤승지 댁 도령 역시 작품의 마지막에 역모죄로 잡혀와 의연하게 죽음을 기다리는 놈이 옆에서 아이 같은 모습을 연출하는 것으로 그려지고 있다. 이 작품에서 신분에 따른 인간의 차별을 정당화할 만한 근거는 조금도 찾아볼 수 없다. 모든 인간은 단지 그의 인격과 행위에 의하여 그 가치가 인정될뿐이지 타고난 신분은 어떠한 영향도 미칠 수 없다.
붓다가 생존시에 주장했던 현실 중시 사상 가운데 가장 적극적이고 혁신적인 사상은 모든 인간의 평등을 분명하게 주장했다는 점이다. “천상천하 유아독존(天上天下 唯我獨尊)”은 인간은 누구나 다 귀하고 평등한 존재라는 것을 온 세상에 선언한 것이다. 당시 불교교단 내에서는 사성계급의 차별이 존재하지 않았다. 숫타니파타에서 “출생에 의해 천민이 아니며, 출생에 의해 바라문이 아니다. 행위에 의해 천민이 되고, 행위에 의해 바라문이 된다” 고 말한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인간의 귀천은 출생이 아닌 마음가짐이나 선악의 행위에 의해 그 가치가 결정될 뿐이라고 보았다. 홍석중의 황진이에서 놈이를 통해 강렬하게 드러나는 신분제에 대한 문제의식이나 인물 형상화의 기본방식은 생존시에 붓다가 주장한 인간평등 사상과 상통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4. 공(空)의 사상
황진이의 주요 인물들은 거의 모두 극적인 정체성의 변화를 겪는다. 주인공인 황진이만 해도 양반가의 별당 아씨에서 기생이 되고, 놈이 역시 종의 신분에서 나중에는 황진이의 사랑을 독차지하는 숭고한 인물이 되기 때문이다. 놈이는 양반 사대부들의 위선과 거짓 그리고 악함을 증거하는 일종의 시험대 역할까지 한다. 놈이는 처음 “무지막지하고 우악스러운 무뢰배”로 황진이에 의해서 규정되지만, 마지막 대목에서는 “인의례지를 갖춘 출중한 인물이요 불같은 사랑과 열정을 지닌 사내 중의 사내”로까지 표상된다. 이외에도 황진사는 효자문이 설 정도의 양반에 ‘낙락장송 독야청정’이라는 족자를 걸어놓을 정도의 인물인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사실은 “기광스러운 기집질”로 평생을 보낸 색마에 불과함이 드러난다. 황진사의 부인 역시도 그러한 남편의 구린 뒤를 감추며 가문의 허세를 유지하기 위해 평생을 바친 인물이었음이 밝혀진다. 결국 황진이는 사람들의 우러름을 받던 황씨댁이란 “허울 좋은 상두복색”이 단청 찬란한 효자문을 대문 앞에다가 높다랗게 세워놓은“ 것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닫고, 세상 모든 위인이나 성현들의 우상과 신비가 거짓에 불과하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다음과 같이 분명하게 표현되고 있다.
진이는 이제야 비로서 세상에서 그렇듯 요란하게 떠들고 받드는 위인이나 성현들의 신비한 우상이 꾸며지고 만들어지는 단순한 리치와 비밀을 깨달은 듯했다. 신비한 것이 시작되는 곳에서 진실이 끝나버린다. 절대적인 것이 선언되는 곳에서 진리는 죽어버린다. 위인이나 성현들이 보여준 아름다운 선행과 놀라운 덕행과 신비한 기적들, 사실은 그것들 모두가 아버지 황진사의 현란한 ‘상두복색’처럼 위선과 거짓에 불과한 것이요 사당에 배향된 그들의 거룩한 모습도 실상 흙이 빚어 만든 불상이나 다름없는 것이라고 생각하면 간단히 풀이되는 일인데
황진이는 이러한 극적인 일들을 겪으며 거짓과 위선에 대한 극심한 혐오의 마음을 품게 된다.
작품 속에는 “진이가 미워하는 것은 이런 거짓과 위선이였고 그가 벗겨내려는 것은 이런 거짓과 위선의 허울이였다”는 식의 문장이 반복해서 등장한다. 이 소설의 2편 ‘송도삼절’은 황진이와 김희열이 한 패가 되어 도학군자이거나 생불인 척하는 자들의 위선과 거짓을 까발리는 것에 할애되어 있다. 진이의 미모와 능력 앞에서 벽계수나 지족선사 역시도 보통의 인간에 불과함이 드러난다. 3편 ‘달빛 속에 촉혼은 운다’에서는 2편까지 황진이와 보조를 맞추었던 송도유수 김희열마저도 그 누구보다 탐욕과 이기심이 가득한 위선 덩어리의 인물로 전락하고 만다. 처음에는 “수컷의 허세는 있지만 거짓과 위선이 없는” 인물로 황진이와 함께 사대부들의 위선을 풍자하는 호걸인 듯하지만, 나중에는 그 어떤 사대부보다 더한 “혐오감을 자아내는 위선자”이자 수컷의 교만성으로 가득 찬 인물로 진이에게 인식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 작품에서 누구보다도 가장 큰 정체성의 변화를 겪는 인물은 황진이 자신이다. 황진이는 이 소설 속에서 상징적인 죽음을 당했다가 다시 태어난 인물이다. 황진이의 신분이 밝혀지고 싸전거리 총각이 상사병으로 죽자, 진이는 사람들이 지켜보는 앞에서 죽은 혼백과 저승의 사랑을 약속한다. 그리해서 진이는 “자신이 지니고 있던 사랑의 감정을 송두리째 죽은 혼백한테 바쳐버렸으니 이제부터 자기는 이승의 목숨이 다할 때까지 사랑이라는 감정은 전혀 있을 수 없는 목석과 같은 녀인”이 되었다고 생각한다. 싸전거리 총각의 죽음을 겪고 진이는 황진사댁의 고명딸에서 명월이라는 기생으로 다시 태어나며, 별당 아씨로서의 삶을 ‘전생’이라 칭하고 기생으로의 삶을 ‘금생’이라 칭한다. 황진이는 파혼이라는 하나의 조건을 만나자 별당 아씨에서 기생이라는 극에서 극에 이르는 신분상의 변화를 겪는 것이다. 황진사의 고명딸인 황진이와 현금이의 딸인 황진이 모두 같은 인물이지만, 전자의 경우에 황진이는 양반으로 극진한 대우를 받았던 반면 후자의 경우에 황진이는 첩실에 들어앉거나 황진사댁 종이 되거나 청루에 몸을 던져야 하는 길만이 주어진다. 변치 않는 황진이라고 부를 수 있는 본질은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다. (중략)
불교에서는 자기라는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다. 자기란 무한한 확대 가능성을 갖고 연쇄적으로 일어나는 일들(연기)이 마주치는 작은 점에 순간적으로 생기는 ‘매듭’ 같은 것에 불과하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것은 묶였다가는 풀리고 풀렸다가는 다시 묶이는 끝없는 반복과정 중에 생긴 순간적인 ‘매듭’에 불과하다고 보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것을 영속하는 실재로 착각하고 그에 바탕한 온갖 착각이나 환상을 만들어낼 뿐이다. 황진이는 스스로가 체험한 정체성의 극심한 변화와 자신을 둘러싼 주변 사람들의 허깨비와도 같은 거짓 모습을 체험하면서, 불교에서 말하는 존재의 근본적인 진리인 ‘삼법인 [諸行無常, 諸法無我, 一切皆苦]’을 깨닫게 된 것이다.
결국 황진이의 짧지만 격렬한 삶의 여정(별당아씨- 송도기생- 유랑가인)이 보여주는 것은 양반과 상놈, 잘남과 못남, 더러움과 깨끗함을 구별하고 주장하는 부질없는 분별지를 초월하는, 즉 공(空)의 사상을 온몸으로 깨닫게 되는 과정이라고 말할 수 있다.
5. 놈이가 보여준 순수증여의 보살행
이 작품에서 또 하나 눈여겨보아야 할 것은 놈이의 성격이다. 그동안의 연구에서 놈이는 황진이의 에로티시즘적 표상과 더불어 계급적 문제의식을 표상하는 인물로 설명되어 왔다. 하지만 놈이는 그러한 논의에서처럼 민중주의적 표상으로 이해하기에는 여러 가지 문제가 있는 인물이다. 작품 속에서 놈이의 머릿속을 채우는 것은 온총 진이에 대한 연정이며, 놈이를 화적으로 이끈 근본원인도 사회적 자각이라기보다는 진이와의 사랑에서 비롯된 것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나아가 화적패 두목인 놈이가 졸개인 괴똥이를 살리기 위해 자신의 목숨을 내놓는 모습 역시 심각한 문제를 지닌 화적패의 모습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괴똥이를 위해 자신을 송두리째 던지는 놈이의 모습은 사회적 차원을 넘어 근본적인 차원에서 살펴볼 때 그 의미가 제대로 드러날 수 있다. 놈이가 괴똥이를 살리기 위해 자신의 목숨을 내놓는 행위는 불교에서 말하는 보살행에 해당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놈이의 행위는 아무런 대가를 바라지 않을 뿐만 아니라 바랄 수도 없다는 점에서 바타이유가 지고성이라 말한 순수증여에 해당하는 것이다.
자신의 목숨을 내놓는 놈이의 행위는 같은 시기에 이루어지는 황진이와 송도유수 김희열의 섹스와 대비되어 더욱 뚜렷한 의미를 얻게 된다. 김희열은 얼마든지 물건을 취하듯 기생인 황진이를 취할 수 있는 권세를 지니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풍류남아이자 호걸이라는 자신의 이미지를 지키기 위해 황진이가 자발적으로 자신의 품에 들어오기를 기다린다. 그러나 일이 뜻대로 되지 않자 김희열은 괴똥이의 석방과 황진이의 몸을 맞바꾸고자 한다. 김희열과 황진이의 섹스는 비대칭성에 바탕한 철저한 교환 행위에 불과한 것이다.
놈이나 진이 모두 괴똥이를 살린다는 목적을 위해 자신의 소중한 것을 내놓는다는 점에 있어서 윤리적인 실천이라 부를 수 있다. 그러나 놈이의 행위는 다시는 되돌릴 수 없는 자신의 목숨을 대신 내놓는다는 점에서, 보살행의 차원으로까지 승격된다. 늘 ‘아씨’의 호칭을 받았던 황진이가 효수를 앞둔 놈이에게 큰절을 올리는 것은, 사랑의 완성을 의미한다기보다는 놈이의 보살행에 대한 존경의 의미로 이해하는 것이 타당하다.
이러한 놈이의 행동은 붓다의 전생담을 연상시킬 정도로 감동적인 대목이다. 붓다는 전생에 나모붓다라는 곳에서 굶주린 어미 호랑이에게 자신의 생명을 내던지는 놀라운 행위를 한 바 있다. 이 숭고한 행위에 의해 전생의 붓다는 최후의 벽을 돌파해, 자신의 신체에 대한 집착마저도 버릴 수 있었던 것이다. 이 이야기는 ‘먹는 자’와 ‘먹히는 자’의 구별이 없다. 그렇게 되면 생명 연쇄의 고리 자체가 의미를 잃게 되는 것이다. 붓다로 환생하기 위한 수행은 이러한 순수증여의 실천으로 완성되었던 것이다.
다음의 인용은 황진이가 효수를 앞둔 놈이를 찾아가서 “사랑의 즐거운 합환과 우리 사랑의 슬픈 고별을 함께”하는 술을 올리러 찾아갔을 때 보이는 놈이의 모습이다.
놈이는 눈을 감았다. 어제와 오늘과 래일이 없고 우와 아래와 옆이 없는 선정삼배의 평온한 표정이 돌처럼 굳어져버렸다. 그는 이미 보지도 듣지도 생각하지도 않는 무한량, 무한대의 고요일 뿐이였다.
진이는 간에서 나왔다. 그는 죽음을 앞둔 놈이의 침착한 태도에서 깊은 감명을 받았다. 이제 날이 밝으면 참형을 당할 놈이의 얼굴에 깃든 그 평온과 그 고요의 뜻을 리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참으로 사람은 죽어도 그 넋은 가지도 않고 오지도 않으며, 또 머무르지도 않는 무거무래역무주한 것이 아닐까. 어쨌든 놈이는 진이, 자신보다 훨씬 큰사람이였다.
자신이 피할 수도 있는 죽음을 맞닥뜨려서 “선정삼매의 평온한 표정”을 지을 수 있다는 것은 분명 깨달은 자만이 보여줄 수 있는 경지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러한 놈이의 모습을 보며 황진이는 “사람은 죽어도 그 넋은 가지도 않고 오지도 않으며, 또 머무르지도 않는 무거무래역무주한 것”이라는 깨달음을 얻는다. 이러한 인식 속에 자기라는 존재는 실재하지 않는다. 자기와 타자의 구별이 없고 개념에 의한 세계의 분리도 없으며, 온갖 사물의 교환의 고리를 탈출한 증여의 공간에서 교류하는, 바로 그것이 무망상, 즉 망상이 없는 상태에서 포착되는 세계의 적나라한 실상이라는 불교의 진리를 깨우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이유로 황진이에서 놈이는 황진이만큼이나 우뚝한 주인공이라고 할 수 있다. 놈이는 임꺽정이나 장길산과 같은 이전의 의적소설에서 다루어지던 인물들과는 다른 새로운 유형의 화적패 두령이다. 놈이의 사회적 의식은 이전의 의적소설 주인공에 비해 상당히 엷은데, 그 성긴 틈을 메우는 것은 보살행에 바탕한 무한자비의 정신이다.
6. 황진이의 진정한 새로움
놈이의 죽음, 다시 말해 놈이의 보살행으로 진이의 구도여행은 그 완성을 보게 된다. 자신의 실존적 체험과 주변 사람들과의 다양한 체험을 통해 공의 진리를 깨달은 진이는, 놈이의 아무런 보답도 원하지않는 완전히 자신을 타자와 동일시하는 보살행을 보며, 세상의 진리를 확연하게 깨우친 것이다. 신화가 이야기되던 사회의 사람들은 인간 각자, 나아가 인간과 동물이 다른 존재가 아니라 서로 같은 본질을 공유하고 있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고 한다. 불교 역시도 이러한 신화적 사고를 이어받아 인간과 동물을 구별하거나 분리하는 비대칭성의 사고가 아닌 인간과 동물 사이의 대칭적인 관계를 확립하고자 했다. 모든 것이 서로 관련을 맺고 있으며 이 우주 속에 고립된 현상은 하나도 없다고 하는 사상에 입각할 때, 인간 상호간에는 자비에 근거한 진정한 우애관계가 싹틀 수 있을 것이다. 황진이는 바로 그러한 진리를 깨달은 것이며, 놈이를 비롯한 여러 등장인물들은 선재동자가 만난 53명의 선지식에 해당한다고 볼 수있다.
황진이는 송도를 떠나며 괴똥이와 이금이 부부에게 자신이 객사했다는 소식이 들리거든 시신을 수습해서는 “따루 봉분을 만들지 말구 길가에 아무렇게나 묻”을 것을 부탁한다. 이유는 “나한테 넋을 빼앗겼던 사람들이 마음껏 설치를 할 수 있게”하기 위함이다. 이러한 모습 역시 자아라는 경계를 던져버린 각자의 경지를 드러낸 것이 아닐 수 없다. 놈이의 죽음으로 사실상의 황진이 서사는 끝이나고, 일종의 에필로그인 ‘그 후의 이야기’는 송도를 떠난 뒤 황진이의 후일담을 보여주고 있다. 금강산으로 들어가는 대문인 강원도의 창도읍에서 열린 안교리댁 로마님의 칠순잔치에 리사종과 함께 황진이가 잠시 나타나 노래를 부르고 사라지는 것이다. 이때 황진이의 모습은, 집에 돌아갈 것을 권하는 친구들에게 던지는 리사종의 “자네 같은 속된 선비가 그래 가는비 내리는 날 비로봉에 올라 비구름을 발 아래 내려다보며 큰소리로 산수가를 한 마당 불러보는 가객의 흥취와 락을 알겠나?”라는 말을 통해 짚어볼 수있다. 송도를 떠나 거지 행색으로 산천을 떠도는 황진이의 모습은 모든 집착과 구속에서 벗어나 진정한 자유와 깨달음을 얻은 황진이의 모습을 상징하는 것이다. 그녀는 그 무엇에도 걸림 없는 유랑가인으로서 완전한 자유를 실천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그녀의 상태는 불교에서 말하는 해탈에 해당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중략)
홍석중의 황진이에는 표층과 심층의 대립과 부딪힘이 곳곳에서 감지되는데, 그것은 황진이가 지닌 이전 북한 역사소설과의 연속성과 변별성이 충돌하는 현장이기도 하다. 불교 비판이란 현실주의적 시각에서 인간과 사회의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는 사회주의적 인식체계의 결과라는 측면에서 볼 때 북한소설의 연속선상에 있는 흐름이다. 이에 반해 불교 수용이란 현실의 문제를 정신적인 차원의 문제로 승화시켜 해결하고자 한다는 점에서 일종의 초월이라 볼 수 있다. 홍석중은 두 힘 사이의 대립과 갈등에서, 궁극적으로 황진이의 해탈과 놈이의 죽음에서 잘 드러나듯이 초월의 방식을 통한 해결을 보여주고 있다. 이것이야말로 북한소설사에서 황진이가 지니는 본질적인 새로움이라고 말할 수 있다.
한국현대작가와 불교 186~207쪽. 타이핑 채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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