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은 혼자 분주하다 / 이기철
저녁이 되면 먼 들이 가까워진다.
놀이 만지다 두고간 산과 나무들을 내가 대신 만지면
추억이 종잇장 찢는 소리를 내며 달려온다.
겹겹기운 마음들을 어둠속에 내려놓고
풀잎으로 얽은 초옥에 혼자 잠들면
발끝에 스미는 저녁의 체온이 따뜻하다.
오랫동안 나는 보이는 것만 사랑했다.
이제는 보이지 않는 것도 사랑해야 하리라.
내 등 뒤로 사라진 어제
나몰래 피었다 진 들꽃
한번도 이름 불러보지 못한 사람의 이름
눈 속에 묻힌 씀바귀
겨울들판에 남아있는 철새들의 영혼
오래 만지다 둔 낫지 않는 병
추억은 어제로의 망명이다.
생을 벗어버린 벌레들이
고치 속으로 들어간다.
너무 가벼워서 가지조차 흔들리지 않는 집
그렇게 생각하니 내 생이 아려온다.
짓밟혀도 다시 움을 밀어올리는 풀잎
침묵의 들판 끝에서
추억은 혼자 분주하다.
압력밥솥에 김이 오르는 동안, 잠시 시를 듣습니다. 음성이 차분하군요. 대지가 초록으로 덮혀가는 저녁이었어요. 가로등 아래의 풀잎들이 뿌리를 흔드는 듯 했어요. '나 여기 아주 오래 있었어요' 말하는 듯 했지요. 무거움일랑 털어내고 풀잎처럼 추억의 중력에 몸을 맡겨 볼까요. 생기발랄하게 추억으로 분주해 볼까요.. 먼저 간 이들이 남긴 오늘이란 선물을 생각하면서. <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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