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음녀를 기억하는 밤
― 부동은 또 다른 흔들림을 위한 단잠에 불과할 뿐1)
허공에 한번 피었던 것들은 모두 어디로 사라지는 걸까 말하자면 우리가 어제 귀를 맞대고 들었던 어느 섬나라 재즈 가수의 노래와 그 술집을 가득 메웠던 웃음소리들 말하자면 우리가 서로에게 던진 캐치볼 같은 고백과 가까스로 세이프 한 역전 주자처럼 뿌듯하게 부푼 마음들 이것들이 하늘로 올라가 더러는 백색왜성이 되고 더러는 붉은 울음을 긴 꼬리로 흘리며 이 땅으로 되돌아오기도 한다는 생각 이런 생각마저 우주 한쪽에 차곡차곡 쌓이고 있다고 느끼는 밤이면 나는 어쩔 수 없이 필리핀 여자 귀신을 믿게 되는 것이다
필리핀의 한 낡은 호텔에는 여자 귀신이 산다 언제부터 그녀가 끄물거리는 복도의 전구 빛을 양탄자 삼아 떠돌았는지 알 수 없다 잃어버린 온기를 찾는 것인지 외로움이 깊으면 겁이 되는 법인지, 거미줄에 걸린 양 이 행성에서 체크아웃하지 못하고 누런 이방인들의 곁을 맴돈다 “이방인이 수음으로 시간을 달래는 건 부끄러운 게 아니다.”라고 속삭여 주거나 “부유하는 삶 따위 집어치우고 무명 극단의 ‘나무 1’이나 하고 싶다.”라고 적는 이방인의 겨드랑이를 밤 내 데워 주는 것이다 말하자면 공중에 피어난 상처들에게 별자리의 이름을 붙여 주는 일이다 땅과 하늘을 오가는 바람의 따듯한 혈맥 그녀는 내가 읽은 가장 아름다운 구절이다
풍문처럼 떠도는 생은 없다고 믿는다
1) 생과 생 너머를 담고도 남을 손바닥 크기의 뿔테 안경 거기 인공 호수처럼 박혀 있는 포용과 배반이 함께 서린 눈동자 복 많다는 두둑한 살집의 코를 가졌지만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듯 굳게 밀봉한 입술 사이로 화농 같은 언어들이 터져 나온다, 세계사시인선 속 그녀의 얼굴. 이연주 시인은 등단한 해 첫 시집을 내고 이듬해 자살했다. -작가세계 (1991년 가을 호 별권)에서.
월간 『현대시』 2010년 10월호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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