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찰
- 피정일기
묵주만 돌리고 있기만은 무료했으므로,
나는 가위를 들고
수도원의 나무들을 전정했습니다.
피정 수련을 끝낸 늙은 수녀님이
철사다리 위에 있는 나에게 다가왔습니다.
(월계수 향기가 기막히네요.
자기를 찍는 도끼에도
향기를 토한다더니......)
문득 그런 말을 들려주고 나서
내가 전정하고 있는
월계수 나무에 명찰을 달아주었습니다.
나는 수녀님이 달아놓고 간
나무에 매달린 명찰을 떼고 싶었습니다.
이름 때문에 나무가
고해(告解)해야 할 일이 생길지도 모르니까요.
번쩍이는 명찰 달고
이름값을 해야 하는 세상은 고해(苦海)니까요!
고진하(1953년-)는
감리교회 목사이자 작가이다. 성서와 더불어 불교, 노자, 인도 고전 우파니샤드도 공부할만큼 열린 기독교 신앙을 지향하는 진보적인 기독교 사상가이다.
경력
1953년 강원도 영월에서 태어나 감리교신학대학교와 신학대학원을 졸업했다. 1987년 ‘세계의 문학’으로 등단했으며, 1997년 김달진 문학상을 받았다. 강원도 원주에 있는 치악산 자락에서 모월산인(母月山人)이라는 아호로 글을 쓰면서 숭실대 문예창작과에서 겸임교수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으며, 한살림 교회를 섬기고 있다. 영성가인 고진하 목사는 《기독교 사상》에 독일의 영성가 마이스터 에크하르트의 글을 인용하고 주석을 단 글을 연재하였다.
이름값하고 사는 인생이란 얼마나 고해인가. 詩 결구의 진저리가 절절했던 나, 그러나 인간의 시간 안에서 오늘은 새로운 이름(?)으로 살고 있다. 그것은 기적이다. 행여 다시 태어나더라도 이름 없는 들풀이나 바위, 문자 그대로 바위이면 좋겠다. 짧은 생애 동안 명찰이란 단어는 씁쓸한 기억만 주었으니까. 20110716-20150611 <오>
새한테 욕먹다
들을 귀 나름이겠지만
산호수나무 꼭대기에서 우짖는 저 쬐그만 새
시발시발시발……
누굴 욕하는 것 같다.
짝짓기 철이라 저리 운다는데
짝 찾는 소리치곤 참 고약타.
이젠 욕계(欲界)를 떠난 이모부한테
평생 욕바가지로 살던
풍물시장 약초장수 이모 생각도 나지만
저 맑은 욕 먹지 않고
어찌 세상이 맑아지며
만물의 귀가 파릇파릇해지겠는가.
귀 있는 자는 들으라
시발시발시발……
저 욕 한 사발 꿀꺽 삼키고 오늘 아침은
밥 안 먹어도 배부르느니.
다시 빈 들에서
오래 전 나는 빈들의 시인이었다
노래하는 집시처럼 새빨간 혓바닥만 살아
젊음을 탕진하고 있을 때
신(神)은 나를 빈들로, 텅 빈들로 내몰았다
야생의 초록 골짜기를 헤매다
빈들에 초막 몇 채를 세웠고
이슬과 구름의 관(冠)을 쓴 굴뚝들도 세웠다
어느 날
외딴 산모룽이 돌아가다
돌연 만난 꽃, 고독한 두루미를 닮은
두루미천남성을 사랑했고, 코브라의 머리를
쏙 빼닮은 그 흰 꽃에도 마음을 빼앗겼다 목이 긴
아버지가 물려준 가난과 고독은 형벌이 아니었고
형벌이기도 했다
털 빠진 황구 떼 컹컹컹 몰려다니는
빈들을 떠돌며 세상에 대한 기대를 버리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잠시 머무는 곳 말고
어디 따로 낙원(樂園)을 예약한 적이 없었다
허허로운 빈들의 보초 허수아비 흔들리듯
항상 흔들리는 곳이 내 시의 경작지였다 이젠
늦가을 빈들의 말씀을 받아 적고 또 받아 적어온
내 안의 필경사가 누구인지 어렴풋하지만 죽음의 눈꺼풀이
내 눈을 감기기까지 나는 그를 계시하진 못하리라
불타는 볏가리, 빈들이 키우는 침묵,
별들의 실종, 향기로운 들꽃의 신비,
이따위에 도무지 무관심한, 반인반수(伴人伴獸) 무리의
창궐, 하지만 그들을 피해갈 에움길을 찾기는 틀렸다
오늘도 나는 무죄한 생명이 떼죽음 당하는 땅에서
허수아비 같은 늙은이들을 보았다
지구의 빈들에 무심코 절망을 삽질하는......
거룩한 낭비
이 휘황한 물질적 낙원에서
하느님 당신은 도무지
소용없고
소용없고
소용없는 분이시니
내 어찌 흔해빠진 공기를 낭비하듯
꽃향기를 낭비하듯
당신을 낭비하지 않을 수 있으리오!
우선, 시인의 말대꾸는 단답식이 아니어서 좋다. 비꼼이 없어서 좋다. 칭얼대지 않아서도 좋다. 역설의 힘은 비유적 부드러움과 맞짱을 뜬다. 오우, 너희는 그러니 오우, 그럼 저희는 이러죠 하는 쿨한 반응. 역설을 종렬로 놓았으나 아무튼 말뜻은 알아먹겠다. 너무 빨리 알아들었다 하면 싱거울까봐 사연은 뒤로 상상한다. 무소부재(無所不在)하고 무소불위(無所不爲)한 존재가 신이라 가정한다면, 정의되는 바 신은 어디에나 있고, 무엇이든 할 수 있다. 그러나 신이 무엇이든 할 수 있다면, 신은 자기가 존재하지 않고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어떤 세계를 창조할 수도 있다는 역설도 함께 성립된다.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상상력 사전 몇 페이지쯤의 얘기던가. 인간들의 낭비는 심한 정도를 지나서 병적이다. 미친 소비, 스스로들 그렇게 말한다. 벗어나려 애쓰지만 여전히 쩔쩔맨다. 거룩한 낭비를 읽다 보니 2년 전 시인을 소개했던 송정암 스님, 소설은 다 퇴고하셨나 궁금해진다. 선재동자를 어린왕자처럼 쓰신다 했는데, 노을만 보면 가슴이 쩌억-쩍 갈라진다 했는데. 20130513-20150611 <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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