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과연 타자 없이 홀로 수치를 느낄 수 있을까. 슬플 수 있을까. 나 홀로 살아가면서 외로움을 경험할 수 있을까. 불가능하다. 감정은 언제나 이미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만 형성된다. 따라서 감정이란 지극히 사적인 것으로 느껴지는 순간에도 공적인 어떤 것이 내포되어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슬픔, 기쁨, 수치, 분노, 열등감, 외로움 등 수많은 감정이 저절로 생겨나고 사라진다고는 믿을 수 없다. 개인적인 것으로 보이는 감정들은 실은 한 사회 또는 하나의 문화가 지닌 느낌의 구조를 반영하고 있다. 이 때문에 우리는 한 시대의 감정이 한 사회를 읽는 바로미터라고 생각한다. 개인들이 구성하는 집단적 감정은 사회적으로 구성된 공통감과 연결되어 있으며, 감정이란 그 자체로 사회적이며 문화적이다.
그와 동시에 감정은 조율되기도 한다. 권력 차가 심한 사회일수록 감정은 가장 중요한 통제대상이다. 자유롭다고 느끼지만, 우리는 느낄 수 있는 것을 느끼도록 교육받은 결과이다. 어떤 감정들은 느껴서도 발설되어서도 안 된다. 가령 사회질서를 위협하는 것으로 가정된 부정적인 분노와 슬픔들이 그렇다. 그것들은 비정상적이고 반문명적이며 지극히 비이성적인 것으로 간주된다. 그리고 추하고 두렵고 절망적인 감정의 실재를 은밀히 감추라고 조언한다. 위로와 축복의 말을 실천하라고 권고한다. 그물망처럼 연결된 수많은 네티즌이 보여주는 즉각적이고 사실적인 감정 상태는 이렇게 조율된 것이다. 메시지는 하나다; ‘감춰진 것은 당신의 눈을 멀게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보이는 것만을 믿으세요.’
이러한 경고가 실현되기 위해서는 모든 감정은 사적인 것으로 치환할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은 그다지 어렵지 않다. 자본주의는 감정의 모든 영역까지도 이미 ‘사유화’했기 때문이다. 나는 ‘나’의 감정에 집중하면 된다. 다른 사람, 타자, 우리의 감정을 말하는 것은 불필요하다. 나를 책임지는 존재는 바로 ‘나’ 자신이다.
그렇다면 한 시대, 한 사회를 진정으로 말해주는 것은 보이지 않는 ‘다른’ 감정이 아닐까. 다른 감정이란, 이를테면 힐링과 용서라는 감정들로 포장된 우리 시대의 안전감에 균열을 낸다. 용서할 수 없고 타협할 수 없는 분노들이 그것이다. 교묘하게 은폐되었으나 사라지지 않는. 따라서 진정한 힐링과 용서는 분노와 균열을 먼저 말해야 한다. 사실이라고 규정된 것 속의 허위를 마주하는 용기가 먼저다.
시적 사유는 그 대안이 될 수 있다. 시는 이제까지 없던 ‘다른 감정’을 시작한다. 감정의 사유화를 넘어 ‘타자’와 ‘우리’를 경험하게 한다. 개인의 취향을 넘어 타자와 함께 느끼라고 말한다. 이 때문에 시는 기존의 투명한 언어들을 부정한다. 불투명하고 불명료한, 정립할 수 없는 언어로 무장한다. 느낄 수 ‘없는’ 것들을 통해 우리를 유혹하려 한다.
분노의 노래
끝내기 위해서는 시작해야만 한다고 쓴다 끝날 줄 알면서도 시작했다고 쓴다 그리하여 개조해야 할 특별대책과 특급망언 들만 부표처럼 떠 있는 맹골수도 속으로 세월호는 침몰해야만 했다고 쓴다 100일이 넘도록 오직 하나 진실을 알고 싶다며 눈물의 입구에서 눈물의 비상구까지 애통하게 견뎌온 엄마들이 있다고 쓴다 이제 그만 유사대책과 유사눈물에 최선을 그만두자고 쓴다 최악을 그만두라고 쓴다 그게 뭐든 누구든 희망고문은 그만 닥치라고 쓴다 진보도 보수도 멀었다고 쓴다 이제 그만 그리운 이름 옆에서 살고 싶다고 쓴다 죽고 싶다고 쓴다 내 새끼가 너무 보고 싶다는 말이 못이 되어 박혔다고 쓴다 다판다더니 정말 다 팔았다고 쓴다 지옥까지 팔았다고 쓴다 그게 뭐든 누구든 내 새끼를 보고 싶다는 말에 못박혀야 한다고 쓴다 죽어도 죽어도 죽을 수는 없다고 쓴다 죽어도 죽어도 다시 시작해야만 한다고 쓴다
— 안현미 〈세월호못봇〉(《문학동네》 가을호)
우리가 느낄 수 없는 많은 것 중에 가장 두려운 감정은 ‘분노’다. 분노는 때로 한 사회를 전복시킬 수 있는 집단적 에너지로 발전한다. 그것은 전적으로 부정적인 감정이다. 그러므로 분노는 잠재적인 혁명이다. 거대한 분노는 언제나 이미 시적일 수밖에 없다. 일상세계의 안전한 막을 찢고 기존질서를 파괴하기 때문이다. 그럴 때 분노는 나의 노래가 아니라 우리의 노래가 된다. 하여 통치자는 분노를 가장 두려워하며, 모든 슬픔을 개인적인 문제로 치환하도록 종용한다. 부정적 감정들을 적절하게 통제하고 조율하지 않으면 안 된다. 수많은 대중매체가 하는 주 업무는 어떤 슬픔도 나의 것 이상이 되지 않도록 돕는 것이다. 나의 슬픔이 우리의 슬픔이 되지 못하도록. 그리하여 좌절과 분노보다는 희망과 기쁨을 추구하도록. 사회의 안정이 유지될 수 있도록. 다른 세상을 꿈꿀 수 없도록.
날것의 분노와 만날 때, 시는 분노의 노래가 된다. 안현미 시인의 〈세월호못봇〉이 그 예이다. 시인은 분노하지 않는 사회를 분노한다. 절망을 직시하고 망각을 거부하라고 부추긴다. 무엇이든 ‘죽음’으로써 다시 시작하는 세상이 되어야 한다. 이제 진보와 보수라는 말도 무의미하다. 분노는 기존의 모든 언어와 그 언어들이 만드는 상투적인 게임 자체를 무력화시킬 것이다. 때문에 분노는 가장 안전하지 않은 감정이며 동시에 바로 그로 인해 가장 희망적인 감정이다. 보이지 않는 거대한 분노는 시를 통해 미래를 빚는다. 이때 시가 보고 있는 것은 바로 이 보이지 않는 어떤 것이다.
같은 맥락에서 시는 사실에 대항한다. 반(反)사실을 이야기한다. 가상과 위장을 통해 말하기, 그것은 시의 근원이자 과제이다.
가상과 위장
입술을 공백으로 남겨두었더라면 말은 세속화되지 않았을 것이다 만져보면 입술은 차고 습한 사물이다 언어가 아직 태어나지 않았을 때 우리는 우랄산맥을 오르는 깜차까반도의 길들여지지 않은 사나운 순록이었고 그때 우리에게 아버지 따위는 없었다 언어가 아직 태어나지 않았을 때 우리는 우리의 야만과 혼례를 치르고 옛날을 달리는 짐승처럼 신성했고 그때 우리에게 두려움 따위는 없었다 마침내 삶은 불멸로 타락했고 마침내 삶은 아버지라는 궁리로 전락했다 그리하여 오늘은 불임의 태초, 아무것도 수태하지 않는 말들의 순례는 시작되었다 이 말이 다형체다 언어는 언어와의 교미만을 지향한다 만삭의 밀어들이 새카맣게 말라죽을 때까지 입속의 내 말이 다형체다 당신은 현재에서 현재로 불멸하는 종이다 그러므로 당신은 당신에게로 회귀하는 자, 신화여 미래는 어디에 있습니까 우리는 어원으로부터 너무 멀리 왔다 당신의 화법이 내 입속의 혀처럼 부드러워 이 말이 다형체다,
부르는 대로 피어주마
— 고은강 〈비문(非文)들〉(《창작과 비평》 가을호)
고은강 시인의 〈비문(非文)들〉에서도 시적 가상은 이러한 역할을 한다. 시적 가상은 사실보다 더 큰 진실을 이야기할 수 있는 잠재적 힘을 내포한다. 그 점에서 시적 가상의 원형은 신화이다. 신화는 ‘사실’로부터 벗어난 다른 이야기를 통해 삶의 진실을 드러내며, 시적 가상은 이러한 신화적 가상을 계승하고 있다고도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신화를 계승하는 시적 가상이란 무엇인가. 본질적으로 신화란 현대과학이 요구하는 투명성과는 공존할 수 없다. 가상과 사실 사이에서 신화는 그 어떤 것도 선택하지 않기 때문이다. 신화는 가상이면서 동시에 사실인 세계를 창조한다. 이를 통해 신화는 단순한 무리들을 하나의 공동체, ‘우리’로 묶을 수 있었다. 즉, 신화는 가상을 통해 비로소 개인의 무의식을 넘어 집합적 무의식을 담아낸다. 고은강 시인이 신화의 상상과 언어, 감정들은 “다형체”로 부르는 것은 그 때문이다.
그러나 눈에 보이는 사실만이 통용되는 사회에서 신화적 가상은 거짓으로 간주된다. 낱낱의 사실들을 결합한 가산적(加算的) 진리체계 속에서 신화는 존재할 수 없는 마이너스(-)의 상상만을 보탤 뿐이다. 그러나 우리는 또한 알고 있지 않은가. 진실이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진실은 만들어지고 구성된 것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실로부터 일정한 거리를 두지 않으면 안 된다. 신화적 상상력으로부터 시작된 시적 가상은 바로 이 ‘거리’에서 비롯된다.
시가 사실 이상의 어떤 것으로 우리를 ‘유혹’할 수 있는 것 또한 이 거리 때문이다.
유혹
어떤 날들이 찾아왔나요 구름이 드리워진 푸른 초원에는 양 떼 같은 빛자국 말도 못하는 울음 그건 대체 무슨 색인가요
답할 줄 모르는 어리석은 마음이 소낙비처럼, 닿지는 않고 젖어갑니다 당신은 알고 있을까 울음이 어디까지 갔는지 자취는 보이지 않고 멀리 가는데 밤이 찾아오고 몰래 초원의 들판이 아득하게 덮여 구름과 구별되지 아니할 때 자박자박 발자국을 내는 것은 달빛이 아닐 거예요
그 밤엔 낡고 흐린 담요를 덮어줄게요 당신은 당신을 키워요 당신을 삼켜요 당신을 비밀로 삼아요 나는 당신을 업고 밤을 다 걷겠어요 그러니 아무도 몰래 아무도 몰래 어떤 날들이 찾아왔나요 당신과 내가 서 있는 이 초원 위엔 목마른 안타까움이 떠돌고 밤은 아직도 한참인데,
— 유희경 〈어떤 날들이 찾아왔나요〉(《유심》 9월호)
시는 유혹이다. 에로스다. 그것은 시가 민얼굴 위로 하나의 가면을 씌우고 이야기를 시작하기 때문이다. 에로스는 주체와 타자 사이의 거리가 없다면 존재할 수 없다. 또 말할 것도 없이 타자가 없다면 유혹 자체가 불가능하다. 유혹하는 시는 진실이 곧 ‘날것’이라고 믿는 어리석음은 비웃는다. 진실은 사실이 아니라 사실들이 감춘 것을 추적하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시는 무엇을 또는 무엇 때문에 유혹하는지 알지 못한 채 유혹한다. 시는 사랑의 대상이 존재하지만, 사랑의 명증성에도 도달하지 못하는 사랑과도 같다. 따라서 시는 가면을 벗지 않으며, 미로처럼 우리 앞에 놓여 있다. 시적 유혹이란 바로 이 언어의 미로를 통과하도록 우리를 끌어당기는 힘이다.
그것은 궁극적으로 눈에 보이는 것 이상의 어떤 것을 보고 싶게 하는 유혹이다. 보이지 않는 어떤 감정들을 감각하고 사유할 수 있도록 만드는 유혹. 만일 가면과 가면이 만드는 거리가 없다면 시는 어떻게 되는 것일까.
시는 스마트한 세상을 뒤덮은 문자들이 즉각적으로 주어지는 것과는 전적으로 다른 경로를 택해 나아간다. 우리는 송신자와 수신자 사이의 거리가 제거될수록 스마트하다고 느낀다. 그 결과 타자는 사라지고, 따라서 스마트한 세계에서는 우리는 에로스적 거리를 유지할 수 없다. 가령 유희경의 〈어떤 날들이 찾아왔나요〉에서처럼, 사랑은 낯선 거리 속에서만 타자를 유혹할 수 있다. “닿지는 않고 젖어갑니다 당신은 알고 있을까 울음이 어디까지 갔는지 자취는 보이지 않고 멀리 가는데”에서 보듯, 나와 너 사이의 거리는 사랑이 존재할 수 있는 유일한 조건이다. 아무것도 식별할 수 없는 밤이 있기에, 달빛이 너의 발자국으로 들릴 수 있는 것이다. 모든 것을 다 볼 수 있고 이해할 수 있다면 사랑도, 유혹도 존재할 수 없다. 유혹이 없다면 시는 어떤 다른 감정에 대해 이야기할 수도 없다. 늘 동일한 말만을 되풀이하는 자본의 로봇들과 구분되지 않을 것이다.
이 때문에 여전히 시는 일정한 거리 속에서 불명확하고 불투명한 언어로 말하기를 멈추지 않는 것이다.
불투명성
지난봄 그물 같은 비가 내게 던져졌다 토요일이었다
아직 나는 그 빗속의 토요일에 갇혀 있다
온몸 구석구석 극지를 돌아다니던 들숨들이
얼룩처럼 셔츠의 끝단으로 가라앉는 저녁
옷깃과 소매가 잿빛이 되는 시간, 먼지처럼 내려앉는 시간
셔츠의 바깥, 공중이라는 제단 위에 얼굴과 두 손을 내어놓았다
셔츠의 바깥으로 미처 빠져나가지 못한 표정들이
셔츠의 끝단에 까맣게 쌓이는 저녁에 혹시 목 놓아 울 일 있다면
울기 전에 셔츠 소매부터 걷어붙일 것
헌 셔츠들이 가득한 토요일의 수거함
옛날 옛적 맨 처음의 토요일이란 거대한 수거함이 있었고
대대손손 토요일의 셔츠들이 수거함 속으로 던져지고
셔츠의 토요일들은 산더미처럼 쌓이고
우리는 산 중턱 어디쯤에서 조난되고
토요일은 높은 파도처럼 솟구쳐 흰 셔츠처럼 밀려오고
하얗게 찢기듯 부서지며 일주일마다 우리를 덮치고
내가 벗어놓은 헌 셔츠의 밤
매번 의미가 그다지도 많아 결국엔 무의미해지고만
시구절이 적힌 파지처럼 주름 많은 나의 셔츠
내 허벅지에서 한 줌 크게 떼어 애인에게 건네준 구름빵 같은
띄우자마자 줄 끊고 날아가 버린 연 같은 나의 셔츠
지구 반대편 온종일 이어졌던 대낮의 교전이 잦아들고
꼽추처럼 굽은 등의 지구가 한 장의 하늘을
사망자의 셔츠처럼 주워 입고
대신 셔츠 주머니에 꽂힌 빨간 볼펜으로
셔츠 주인의 사망통지서를 쓰고
셔츠 주머니 속으로 기어들어가자
그곳은 온통 검게 불탄 밤, 파편처럼 박혀 있는 별의 막사
이불을 덮고 누우면 누군가의 셔츠 주머니 속에 들어와 있는 느낌
이불을 정수리까지 천천히 끌어올리면
셔츠 주름 따라 검게 비가 고이는 밤
세상에서 가장 가까이 새벽을 쫓는 밤이, 새벽을 따라잡고
새벽을 앞질러 선두로 달려나가기 전에, 잠깐만 붙잡아놓고
비 오는 토요일인 오늘은 무한대의 깊은 잠을 청함
침대 한가운데 내가 벗어놓은 셔츠
비 젖고 구겨진 채 활짝 핀 셔츠는
나를 향한 이 새벽의 헌화
— 김중일 〈토요일엔 헌화를〉(《창작과 비평》 가을호)
시는 투명하지 않다. 시는 불투명한 세계로의 초대이다. 시를 설명하는 명증하고 명료한 문법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이러한 불투명성이 곧 시적 상상이 현실에 대항하는 부정적 힘을 얻는 장소라는 점이다. 투명하게 잡히지 않는 정립되지 않는 언어들이야말로 시적 상상이 다른 어떤 일상적 문맥 속에 포섭되지 않은 채 자유로울 수 있는 이유이다. 하여 시는 쓰인 언어보다 더 많은 말들을 태어나게 한다. 모든 이미지가 하나의 목적을 투사할 뿐인 자본주의적 승인과는 대조적이다.
이를테면 김중일 시인의 〈토요일엔 헌화를〉에서 보이는 모호성은 바로 이러한 시적 논리를 대변한다. 우선 “셔츠”는 일상 자체이다. 우리는 매일 매일 어제의 셔츠를 벗고 내일의 셔츠를 갈아입는다. 셔츠는 모든 것이 불타 소진된 재와 같다. 지나가는 것, 그러므로 쉽게 잊히는 것. 그러나 시인은 바로 이처럼 명료해 보이는 사실들을 비틀어 낯선 것으로 만든다. 즉, 시는 못다 쓴 시가 되고 “헌화”가 된다. 모든 것이 부정되는 순간(밤) 무한한 시간이 열린다(새벽). 그러나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이처럼 해체되어 재구성되는 의미의 질서가 아니다. 진실로 중요한 것은 이 모든 질서를 모호하게 만드는 ‘시 쓰기’의 행위이다. 의미를 감추고 지연시키고 그러므로 쉽게 설명될 수 없도록 만듦으로써 어떤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한 사유를 재촉하는 것. 그것이 시가 불투명한 언어를 선택하는 이유이다.
그렇기에 시는 근본적으로 봉합을 모르며, 균열을 지향한다. 시인은 끊임없이 세계와 불화하는 지점을 향해 나아간다.
균열
오늘 미끄러진 물-어느 나라의 소식엔 군인이 군홧발로 소녀의 가슴을 밟고 총부리로 소녀의 얼굴을 겨누고 있었다 바닥으로 한없이 미끄러져 물이 고였다 고인 물은 어두웠다 검은 물이 점점 커지더니 둥근 방을 이루었다 밖으로 군인들의 발소리가 들여왔다 나는 얼른 달려오는 소녀를 잡아끌었다 가슴에 소녀를 안고 몸을 웅크렸다 우리는 숨을 죽였다 군인들이 지나갔다 세상은 언제 다 군인들이 지나가는 걸까 소녀가 내 가슴에 고개를 묻는다 오늘 잠든 울-가슴이 축축하다 소녀가 물로 잠들어 있다 고요히 가라앉은 물, 눈을 감은 물 소녀가 숨을 쉰다 이 검은 물방울 속에서 우리는 함께 산다 소녀는 더 이상 자라지 않는다 달빛에도 길어지지 않는다 나는 늙어간다 가슴에 자라지 않는 소녀를 안고
— 신영배 〈검은 물방울〉(《문학사상》 9월호)
모든 시대마다 난해시는 존재했다. 그러나 모든 시대의 난해를 동일하게 해석될 수는 없다. 우리 시대의 난해가 전(前) 시대의 난해와 동일한 전략을 구사한다 하더라도 마찬가지이다. 1980년대식 난해와 2000년대식 난해를 동질적으로 이해하는 것은 오류다. 그렇다면 무엇이 같고 무엇이 다른가. 2000년대 시가 지닌 난해는 즉각적인 ‘댓글’과 ‘공감♡’으로 표시되는 언어에 대한 저항으로 해석되어야 한다. 모든 것이 투명하게 전시되는 자본주의의 상품과 그 논리란 즉각적인 시장의 반응에 의존한다. 한편 속도 지향의 스마트한 디지털환경 자체가 언어를 개인화하고 감정 자체를 사유화하도록 만든다. 속도에 적응하지 않는다면, 어떤 언어도, 마치 상품처럼, 읽히지 않고 사장될 것이다. 또 소통(유통)되지 않는 한 의미 또한 없다. 이제 속도와 소통은 우리 시대의 정명과도 같다. 깊이 생각하는 것 자체가 무용한 일다.
그러나 소통에 대한 강박이 사유를 제거한다는 것은 얼마나 아이러니한 일인가. 2000년대 시가 택한 난해는 바로 이러한 소통의 속도에 대한 저항이다. 신영배 시인의 〈검은 물방울〉을 예로 들면, 난해는 사고의 속도를 지연시킴으로써 “소녀”의 죽음에 대한 추적을 지속시킨다. 왜 소녀는 자라지 않은 채 죽어야 했는지 묻게 한다. “군인”으로 표상되는 세계와 소녀의 몸이 어떻게 대비되는지, 그리고 우리 사회가 어떤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는지 절망적인 방식으로 다시 사유하게 한다. 우리 시대의 좌절은 왜 어디에서부터 시작된 것인지 다시 생각하게 한다. 난해는 일상적 어법 자체를 조각내고 ‘균열’을 만든다. 균열은 곧 새로운 언어와 상상이 시작되는 감정의 장소이다. 이 점에서 난해는 시대를 관통해 어느 시대에나 정치적인 문제일 수밖에 없다.
시를 해석하는 수많은 틀이 존재한다. 시에 대한 오해 또한 만만찮다. 시적 감정과 상상 그리고 언어가 왜 소멸할 수밖에 없는가를 보여주는 합리주의자들의 발언이 현실적인 정당성을 얻어가고 있다. 시의 무능은 시로부터 초래된 것 같다. 그리로 우리는 시에 대한 이 오해들과 싸울 힘을 상실한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과연 시인이 없는 사회는 행복한가. 시라는 모호한 상상과 거리가 존재하지 않는 삶은 과연 진실한가. 느리게 지연된 통로들을 통해 사유를 요구하지 않는 시대는 과연 ‘다음’이란 것이 존재할 수 있을까. 타자를 필요로 하지 않는 직설적인 감정의 세계가 과연 우리가 꿈꾼 그 내일인가. 우리 시대의 감정수업은 왜 하나같이 빠르고 같은 방향으로만 흘러가고 있는가.
그것은 시를 읽지 않는 사회에 대한 비난과도, 외면당한 시에 대한 정당화의 몸부림과도 무관한 문제이다. 이것은 우리 자신의 미래에 관한 이야기일 뿐이다.
신진숙 문학평론가. 2005년 《유심》으로 등단. 평론집 《윤리적인 유혹, 아름다움의 윤리》가 있음. 현재 경희대 국제지역연구원 HK연구교수.
출처 유심[78호] 2014년 10월 01일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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