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론과 칼럼

유성호<자기 인식과 세계 탐색의 창(窓)으로서의 ‘시’>

미송 2014. 12. 17. 07:17

 

자기 인식과 세계 탐색의 창(窓)으로서의 ‘시

ㅡ김영애의 시세계

 

 

 

유성호(문학평론가, 한양대 교수)

 

 

  1.

  김영애의 첫 시집 『카스트라토』(북인, 2014)는, 한편으로는 시인 자신의 존재론에 대한 깊은 ‘자기 인식’의 양상을, 다른 한편으로는 혼돈과 모순으로 가득한 사물들의 존재 방식에 대한 지극한 ‘세계 탐색’의 양상을 보여주는, 서정의 이중주라고 할 수 있다. 2008년 《시현실》로 등단한 후 시인이 6년여의 시간을 차곡차곡 담아낸 이번 시집은, 작품들마다 격정적인 목소리로 길어 올리는 진정성으로 충일한 동시에, 새로운 시적 의미망으로서의 가치와 직능을 충실하게 구현한 결실이라 할 것이다.

  다시 말하지만, 김영애 시편의 기본 정서는 따뜻한 온정이나 과장된 감상(感傷)보다는 모종의 열정과 격정에 훨씬 근접해 있다. 그래서인지 그녀는 세칭 ‘여성시편’들이 가질 법한 단정하고도 안온한 모성적 담론으로부터 일정하게 비껴나 있다. 세상과의 부드러운 화해나 융합보다는 날카롭고 소용돌이치는 파토스에 의해 목소리가 견인되는 특징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점들이 김영애 시인으로 하여금 스스로의 내면에서 다양하게 일고 무너지는 사유와 감각의 결들을 촘촘하게 추적하도록 하는 한편, 생의 조건 안에서 불가피하게 다가오는 상처나 질곡들에 대해 민감하게 반응하게 하는 원질(原質)인 셈이다. 여기서는 이러한 김영애 첫 시집이 보여주는 확연한 서정의 이중주 곧 ‘자기 인식’과 ‘세계 탐색’의 창(窓)으로서의 ‘시쓰기’ 과정을 살펴보고, 나아가 그녀가 지향해갈 더 큰 그림들을 에둘러 예감해보고자 한다. 이제 그 개성적인 세계 안으로 들어가 보자.

 

 

  2.

  우리가 잘 알고 있듯이, 시는 근본적으로 ‘시간’에 대한 경험의 형식으로 씌어지고 읽히는 배타적 속성을 지닌다. 그래서 시는 시간에 대한 시인 자신의 경험과 기억의 재구성이라는 양식적 특성을 한껏 띠게 된다. 김영애 시편들 역시 자신의 ‘기원(origin)’이라고 부를 수 있는 시간 속의 대상들을 기억하고 호명하고 재구성해내는 데 일관된 공을 들이고 있다. 다음의 표제 시편은 그러한 ‘자기 인식’의 한 전형으로서, 복합적인 목소리를 통해 자기 진술로 기울어진 가편(佳篇)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잠시 머물며 야만적으로 살아요

햇볕에 녹아내릴 날개로 첨탑까지 날아올라요

어머니, 천사였던 나의 어머니

나를 버린 건 아니겠죠

굶지 말라 보내신 거죠

나는 제단에 바쳐질 순한 양

높은 천정, 하늘 문 여는 날

발끝까지 늘어진 흰옷을 입고

고딕의 첨탑 끝에서 반짝이고 싶어요

다리 끝에 서면 들려오는

생드니 대성당의 종소리

남자도 여자도 아이도 아니어요

사람도 괴물도 아니어요

거세된 천사라고나 할까요

아, 야만적으로 살아요

지옥문을 지나가요

어머니, 슬픈 나의 어머니

버린 건 아니겠죠

굶지 말라 보내신 거죠

나는 제단에 바쳐진 순한 양

종소리 너머 그레고리안 성가가 들리나요

하늘의 영광을 지상에 세우는

야만적, 경배를 위한

나-는-카-스-트-라-토-입-니-다

 

― 「카스트라토」 전문

 

  ‘카스트라토’는 제 목소리를 거세당한 채로 아름다운 노래를 부르는 존재를 은유한다. ‘육성’ 대신 ‘가성’을 선택한 이 인위적 변형 음역(音域)은, 그 자체로 아름답기는 하지만, 진정한 자기 목소리를 끝없이 유예할 수밖에 없는 비극적인 존재론적 상처를 안고 있기도 하다. 이 시편에서 시인은 “나는 제단에 바쳐질 순한 양”이라 명명함으로써, 시인으로서의 존재론이 가지는 근원적 상처를 암시한다. 기독교적 배경을 가진 이 속죄양(scapegoat) 의식은, 죄를 대속(代贖)하는 제의(祭儀)에 바쳐진 이로서의 의식으로서, 시인은 자신을 그러한 존재에 비유하고 있다. 그 ‘양’은 야만적인 동시에 성스럽고, ‘남자/여자/아이’를 한 몸에 안고 있고, ‘사람/괴물’의 속성을 가지고 있기도 한 복합적 존재이다. 그러한 야누스적 존재가 쳐다본 대성당의 ‘천정’과 ‘첨탑’ 그리고 그가 들은 ‘성가’와 ‘종소리’는 그 자체로 “거세된 천사”로서의 시인의 불구적 모습을 거듭 환기해 보여준다. 고딕 성당의 최초로 알려진 생드니 성당을 연상하면서 “고딕의 첨탑 끝”에서 반짝거리고 싶었던 시인의 진정한 소망은 그 성당의 모습과 소리 속에서 속절없이 유예된다. 일찍이 “천사였던 나의 어머니”는 그렇게 “하늘의 영광을 지상에 세우는/야만적, 경배를 위한” 존재로 시인을 보내신 것이다. 그러니 시인으로서는 한 글자 한 글자 끊어지는 힘겨운 단속적 음으로 “나-는-카-스-트-라-토-입-니-다”라고 아프게 고백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고백은 이른바 ‘저주 받은 시인’의 계보를 잇는 것이기도 하고, ‘반(反)나르시시즘’이라는 충동을 매개한 것이기도 할 것이다.

  원래 ‘나르시시즘’이란 자아 투영을 통한 자기 만족이나 자기 도취(몰입)의 심리를 반영하는 개념이다. 반면 나르시시즘의 대극에 있다고 할 ‘반(反)나르시시즘’은 자신을 스스로 낯설고 흉하게 형상화하여 자기 모멸과 반성을 통해 자기 탐구를 이루는 위악(僞惡)의 심리를 반영하는 개념이다. 김영애 시인은 스스로를 ‘카스트라토’로 명명함으로써, 이러한 반(反)나르시시즘을 드러내지만, 우리로서는 그 고백 안에 담긴 ‘아이’로서의 천진성과 ‘괴물’로서의 파격성을 함께 느끼게 된다. 그 점에서 김영애 시인은, 마치 “손 끝 하나 만지지 못하고/흰 베일을 쓰고 숨죽여 기다리는 여자의 죄罪가/온전히 자궁에 나비 흔적으로”(「엘 로사리오, 전나무 숲에서」) 남았듯이, 성스러움과 죄스러움이 결속된 형상으로 자신을 인식하는 복합적 사유를 보여준 것이다. 이러한 자기 인식의 첨예한 양상은 다음 ‘자화상’으로 이어진다.

 

도나우 강에는 기차가 지나간다. 물푸레나무 잎은 반짝이고

 

기차역에서 만난 사람들이 도나우 강을 물들이던 석양 속으로 흘러가고

그늘진 주택단지, 문틈, 퀭한 눈이 흔들린다

날아오르는 새 같은 것은 없다, 탈색한 꽃들

 

바람이 분다 책장이 넘어간다

기차역이 불타고 있다, 소년의 화집이 불타고 있다

기적 소리 들리던 막다른 골목, 창녀가 다리를 벌리고 앉아 있다

레이스 천 사이로 보이는 짙은 절망, 고인 슬픔을 후벼판다

눈알을 후벼파고, 손목을 자른다

Dream Cacao, 진한 검은 피

 

도나우 강에는 바람이 지나간다, 물푸레 나뭇잎이 흔들리고

 

― 「자화상 - 에곤 실레를 생각하며」 전문

 

  오스트리아 도나우 강변에서 태어난 화가 에곤 실레는, 메마르고 수척하고 비루한 나상(裸像)으로서의 자화상으로 유명하다. 또한 그 특유의 권태와 꿈, 불안과 고통, 영혼의 격정과 경련, 창조적 언어 등은 「자화상」이라는 시편으로 수렴되어 남아 있기도 하다. 김영애 시인은 그러한 에곤 실레의 시와 회화를 모두 자신의 ‘자화상’으로 수용하고 변형함으로써, ‘미추(美醜) 동일체’로서의 자신의 자화상에 다시 한 번 가 닿는다. 기차가 지나가는 도나우 강가에서 반짝이는 물푸레나무, 그 한적한 곳에서 사람들은 석양 속으로 서서히 사라져가고, 그늘지고 탈색한 사물들이 그 배경을 어루만지고 있다. 당연히 날아오르는 새 같은 역동적인 움직임은 없다. 그렇게 깊은 절망과 슬픔의 풍경이 지나가는 순간에 시인은 “눈알을 후벼파고, 손목을 자른” 채 흐르는 “진한 검은 피”를 발견한다. 짙은 절망과 슬픔 속에 고인 “진한 검은 피”야말로, 마르고 뼈가 앙상한 인물들의 표현주의 누드를 삭막하게 그렸던 에골 실레의 화풍을 바탕으로 하면서, 김영애 시학이 가지는 고통과 상처와 허무의 선묘(線描)를 두드러지게 해준다. 그 안에는 “정열, 도취, 광휘의 기억도,/그동안 쓰여진 시들과 불려진 노래들도”(「몽상의 유실」) 모두 있고, 짙고 짙은 “詩窮의 臭氣”(「찌개Ⅰ」)도 깊게 가라앉아 있을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미’와 ‘추’가 분리 불가능한 상호 각인의 형상으로 있으며, 앞에서 살핀 ‘카스트라토’ 형상과 이 ‘자화상’이 깊이 어울리는 있음을 알게 된다.

  이처럼 김영애 시편의 근간에는 스스로의 초상을 탐색하고 완성하려는 메타적 열정이 숨 쉬고 있다. 지금 우리가 읽은 두 시편을 시인은 시집의 처음과 나중에 각각 배치함으로써, 이러한 ‘자기 인식’의 사유와 감각이 이번 시집에서 가장 중요한 좌표이자 근간임을 암시하였다. 이렇듯 깊은 ‘자기 인식’의 양상은, ‘카스트라토’를 자임하는 예술가적 자의식, 에곤 실레를 상상함으로써 가 닿는 슬픔과 절망과 허무의 속성 등으로 이어지면서, 김영애 시세계를 관통하는 사유와 감각의 기저(基底)가 되어주고 있는 것이다.

 

 

  3.

  다음으로 김영애 시인은 혼돈과 모순으로 가득한 사물들의 존재론에 대한 지극한 ‘세계 탐색’의 양상을 보여주는데, 이는 가파르고 잔혹한 삶과 현실에 맞서는 적극적 음색으로 나타난다. 우리의 생에 편재해 있는 여러 불행의 표정들을, 실재와 상상을 가로지르는 일종의 착란을 통해, 시인은 소멸의 풍경 속에서 줄곧 그려 보인다. 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러한 불행과 소멸의 양상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시인이 ‘기억’하고 ‘노래’함으로써 견디고 넘어서려 한다는 점이다.

 

극지에 서보면 알게 될까

살아남거나 죽는 일에 순번을 어찌 정하는지

누군가가 살기 위해 누군가는 죽어야 하고

살아남아 죽은 누군가를 기억하고 위로하는 것을

 

제비뽑기만큼 공정한 것이 없고

제비뽑기만큼 억울한 것이 없다

 

어서 눈알을 뽑으라, 잔인한 삶이여

더 이상 키울 수 없는 아이를 버리라

버려진 아이가 살아남아 누군가가 되고

버려진 아이가 죽은 누군가는 되는 일

 

개여, 세드나여, 야생의 영혼이여

 

살아남은 누군가가 머리칼을 자르고 기억하지

누군가가 누군가의 살맛을 기억하지

누군가가 누군가의 유골함이 되지

살아남거나 죽은 것이 서로 다를 게 없지

 

이뉴잇이 인간이라고, 생고기를 먹는 인간이라고

끔찍한 것이 삶이라고, 우리 모두가 이뉴잇이라고

얼어붙은 하늘 아래서 잊지 않으려고 노래하고 춤을 추지

 

― 「이뉴잇의 노래」 전문

 

  북극해 연안에 사는 ‘이뉴잇(innuit)’ 종족은, 날고기를 그냥 먹는다는 뜻의 ‘에스키모’라는 명칭보다는, 인간 그 자체의 뜻인 ‘이뉴잇’으로 불리기를 갈망해왔다. 그래서인지 ‘이뉴잇의 노래’에는 자신들에게 가해져온 부당한 정체성에 대한 거부와 저항이 숨겨져 있다. 극지에 사는 이들의 ‘노래’는 그 점에서 “살아남아 죽은 누군가를 기억하고 위로하는” 노래이다. 하지만 누군가가 살기 위해 누군가는 죽어야 하는 이 억울하고도 “잔인한 삶”의 순환은, 이뉴잇 족을 키워온 역설적 힘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오랜 역사는 그 “버려진 아이가 살아남아 누군가”가 되기도 하고 “죽은 누군가”가 되기도 하는 ‘잔인한 삶’을 이어왔을 것이다. 또 살아남은 누군가가 누군가를 ‘기억’하고 “살아남거나 죽은 것이 서로 다를 게” 없는 삶이야말로 “이뉴잇이 인간”이길 바라왔던 역사였을 것이고, 그것은 “우리 모두가 이뉴잇”이라고 외치면서 기억의 힘으로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춘 역사였을 것이다. 그래서 이 시편은 가파르고 잔혹한 삶에 맞서 원시적이고 강인한 혼돈의 노래와 춤을 담은 야생의 목소리를 담고 있는 셈이다. 그 안에는 “흙을 닮은 사람”(「사람과 상자」)으로서의 원형적 속성과 “至難한 몸의 歷史”(「病歷 - 승모판 폐색 부전증」)로서의 ‘시(詩)’가 함께 녹아 있다. 웅숭깊고 원대하고 심원한 스케일과 밀도가 놀라움을 주지 않는가. 불행의 역사를 넘어서는 ‘힘’이 그 안에 깊이 내장되어 있기 때문일 것이다.

 

푸른 안개에 휩싸인 것은

한 걸음 가면 두 걸음 두 걸음 가면 네 걸음

사소하게 시작된 증폭의 끝이었다

 

바닥에 구르는 각종의 편의

자동 변환 시스템으로 제어되는 초정밀의 배려

벼의 절반 밖에 안 된다는 2만에서 2만5천 사이의 유전자들이

독하게 신의 경계에서 조여 오는 고리를 머리에 두르고 있다

 

바다가 갈라지고 만나와 메추라기가 쏟아지는 광야에서

초침 소리가 이명처럼 들리기 시작하고

소금 기둥이 자라고 땅이 입을 벌려 삼키려드는데

검은 리듬에 몸을 실은 지 오래라

 

뜨겁다, 앙탈을 부리듯 거칠게 밀려오는 파도

미세하게 파고드는 흉흉한 소문

신종 플루 바이러스

필요충분의 때, 그 가을

 

― 「번역되지 않은 시간」 전문

 

  김영애 시인은 푸른 안개 속에서, “독하게 신의 경계에서” 조여오는 현실적 고통의 유전자들을 시편 가득 배치하고 있다. 비록 “사소하게 시작된 증폭의 끝”이었지만, 삶은 마치 “바다가 갈라지고 만나와 메추라기가 쏟아지는 광야”에서처럼 뜨겁고 거칠고 흉흉해갈 뿐이다. 구약과 신약이 겹치는 시공간이 여기 또 커다란 스케일로 펼쳐지고 있다. 시인은 광야에서 “초침 소리가 이명처럼 들리기 시작”할 때, 혹은 마치 신종 플루 바이러스가 침투하는 “필요충분의 때”를 “번역되지 않은 시간”이라 에둘러 명명한다. 이때 ‘번역’되진 못한 텍스트는 그야말로 “오독誤讀으로 자유를 거머쥔”(「키워드는 버스」) 이들의 몫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당연히 이 시편은 마치 “왕국이 적지가 되고 적지가 왕국이 되는 밤”(「자닌의 치맛단」)처럼 불안하고 고통스런 우리 삶의 환유적 분신을 보여주는 동시에, 가장 깊은 ‘세상읽기’가 얼마나 만만치 않은지를 선연하고도 풍부한 혼돈(chaos)으로 보여준다. 그 ‘세상읽기’의 과정을 시인은 ‘번역’이라는 질서(cosmos)로 은유했을 것이다. 이처럼 김영애 시인이 노래하는 격정적인 생의 양상들은, 날카로운 균열 가능성을 내포한 채, 그녀만의 단단한 미학적 해석과 견고하게 결합되어 있다. 그래서 그녀의 시에서 묻어나는 격정은 때때로 ‘묵시록적 분위기’를 강하게 풍기기도 한다.

 

오래 걸어온 길의 끝일까

변형된 기억의 추종일까

담겨진 시간이 눅눅하다

 

먼저 잃어버린 한 짝인지

남겨진 한 짝인지

그런 것이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둘이 하나고 하나면서 둘이고

방향만 바뀌어도 전전반측하다가

천천히 뒤틀린 게지

 

꽃이 지는 모퉁이 돌면

버려진 헌 신발 한 짝에

고인 햇빛이 있다

 

― 「오후 4시의 부재」 전문

 

  앞에서의 ‘번역되지 않은 시간’은 여기서 ‘부재’의 시간으로 집약된다. 물리적 결여 형식을 뜻하는 ‘부재(不在)’는, 여기서 “오래 걸어온 길의 끝”이나 “변형된 기억의 추종”으로 단순 환원된다. 오래도록 걸어온 삶의 끄트머리에서 이제 새삼 떠올리는 ‘기억’의 변형은 그 자체로 ‘시’의 운명과 닮았다. 그야말로 “기억이란 늘 불완전하기 마련”(「아름다운 날들이 간다」)이고 “기억은 편파적으로 편집된 편린에 불과”(「인디안 핫 썸머」)하지 않겠는가. 하지만 그러한 ‘기억’ 속에 담긴 잃어버렸거나 남겨진 눅눅한 시간이며, 천천히 뒤틀려온 흔적들은 한결같이 ‘시’의 원천이요 궁극이 아니겠는가. 그렇게 “공중에 떠다니는 먼지와 햇살 같은 기억”(「안전교육일지」)은 ‘시’의 궁극적 산지(産地)가 아닐 수 없다. 그 점에서 시인이 발견한 “버려진 헌 신발 한 짝”에 고인 한 줄기 “햇빛”은, 온갖 ‘부재’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존재’를 가능하게 하는 생성적 에너지로서의 ‘시’의 은유가 되고 있는 것이다. 시인은 부재와 불모의 세상에서 이 모든 것이 “재가 되어 사라질 리 없는 마음이란 게 있어서”(「번작이끽야(燔灼而喫也) - 납량특집」) 그것이 ‘시’를 가능하게 한다고 믿는다. 그 묵시록적 비전에서 그녀 시편들이 탄생한다고 보아도 크게 틀리지 않을 것이다.

  이처럼 너무도 분명한 불모와 소멸과 고통의 땅에서, 김영애 시인은 그 혼돈을 투과하고 넘어서 새롭고도 다른 질서를 소망하는 과정으로 나아간다. 그 은은한 소망이 바로 ‘사랑’이라는 충동으로, 에너지로, 가없는 인식으로 차차 이월해간다. 비록 “사랑으로 뛰어넘을 것이 그리 많지 않음을”(「오늘은 단오」) 알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인은, 궁극적으로 ‘사랑’의 시학에 가 닿는 여정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4.

  앞에서 암시하였듯이, 김영애 시학의 가장 깊은 근저에는 사랑의 격정이 있다. 그것이 김영애 시학에서 가장 깊이 숨겨진 심층의 에너지일 것이다. 물론 그 에너지는 시인 자신이 겪은 상처에서 솟아나 세상을 관통하다가 재차 그 상처로 귀환한다. 이 발원지와 귀속처가 동일한 ‘사랑’의 재귀성이 바로 김영애 시학의 가장 눈부신 비밀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가령 여기서 우리는 ‘사랑’이 수동적 정동(passive affect)이 아니라 능동적 활동(active activity)임을 알게 되고, 그 점에서 시인은 사랑이 가지는 매혹과 불안을 통해, 자신의 생이야말로 ‘사랑’의 형식임을, 그리고 이미 지나가버린 흔적이 아니라 다시 재현되어야 할 능동적 활동으로서의 ‘사랑’임을 선명하게 보여준다. 그 과정을 가감 없이 보여주는 다음 시편을 한번 읽어보자.

 

손가락 발가락 붉은 마디마다

긴 눈썹을 붙인다

깨알 같은 이야기를 씹어 삼키며

슬픔은 구부려 앉힌다

손목이나 손가락 마디를 접고

목을 비틀어 사연을 듣는다

머리뚜껑을 열어 아크릴 안구로 바꾸고

밝은 세상을 보여준다

화장을 지우고 새 눈썹을 그려주고

오므린 입술을 읽어준다

기다란 기억들이 흩어지지 않게

머리띠를 해준다

 

구부리거나 접거나 비틀어 줄 때마다

구르는 구체를, 마찰지수를 확인하며

너는 내 사랑이라고 속삭여준다

 

구체적이란 얼마나 슬픈가, 슬퍼야 아름답다

제 혼자 구르지 못하는 운명

붉은 마디마다 투명하게 어린 핏줄

작은 귀에 너는 내 사랑이라고 속삭여준다

고운 뺨에 너는 내 사랑이라고 입맞춤 해준다

구르는 소리가 새어나오는 마디마다 속삭여준다

너는 내 사랑이라고, 붉디 붉은 내 사랑이라고

 

너의 구체성, 굴러가는 외로움

오, 마디마다 붉디 붉은 궤적이여

어른이 되지 못한 계집애여

 

― 「마디가 많을수록 붉다-구체관절인형을 위하여」 전문

 

  이 사랑의 시편은 ‘구체관절인형’을 구체적 대상으로 삼고 있다. 관절의 움직임을 자유롭게 만든 인형인 ‘구체관절인형’은, 그 표정이나 신체 묘사 등이 인체와 매우 닮아 있다. 시인은 “손가락 발가락 붉은 마디마다/긴 눈썹을” 붙이면서 인형에 커다랗고 일관된 공을 들인다. 그 과정이 바로 “깨알 같은 이야기”나 “슬픔”의 “사연”을 들으면서 인형으로 하여금 밝은 세상을 보게끔 해주는 과정으로 이어진다. 인형의 ‘기억’이 흩어지지 않게 머리띠를 해주고, 그 구체에게 “너는 내 사랑”이라고 재삼 속삭여준다. 이때 “구체적”이란 말은, ‘구체(球體/具體)’라는 단어의 언어유희(pun)를 일정하게 동반하면서, ‘슬픔’과 ‘아름다움’을 파생해낸다. 구체일지라도 “제 혼자 구르지 못하는 운명”은 얼마나 슬픈가. 그래서 시인은 인형더러 “붉디 붉은 내 사랑”이라고 거듭 속삭여준다. 이때 인형의 “구체성(球體性)”은 어느새 사랑의 ‘구체성(具體性)’으로 몸을 바꾼다. 이는 대상에게 전면적으로 나아가 속삭이는 과정을 통해 성취된다. 이미 지나가버린 흔적이 아니라 다시 재현되어야 할 능동적 활동으로서의 사랑이 거기 있는 것이다.

이처럼 그녀가 추구하고 탐색하는 사랑의 좌표는, 일차적으로는 구체적인 대상을 향한 충동으로 나타나지만, 궁극적으로는 인간 본래의 존재 방식에 대한 성찰을 동반한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한 것이 아닐 수 없다. 그러한 추구 과정이, 격정적 사랑의 시학을 통해, 매우 구체적인 감각적 이미지를 통해 생성된다는 점에서, 그녀 시편들은 단연 주목할 만한 성과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창을 넓히려 할까, 열고 나가면 될 것을

 

서둘지 말라 했던가, 그래도 서둘렀더라면

폭우에 잠긴 철길에서 소식이나 기다리지 않았겠지

물어물어 찾아간 적막한 대문 앞에서

빗장 여는 소리에 우리들은 유리처럼 부서지고

모래시계 구멍을 빠져나가는 숨소리

 

오래전 이야기를 그리워하지 않았겠지

 

소주잔 기울이는 탁자 위에

시시한 안주꺼리로 누운 우리들의 청춘이

낡은 사진 속 배경만큼이나 흐릿해져

서로의 손을 잡기나 했었는지 생각나지 않았다

 

돌아서가는 술 취한 그림자가 계단 아래로 사라지고

애초부터 묶이지 않아 풀 것 없이

풀었다는 마음만 바람에 쓸려가는

11월의 밤거리에서 나이 들어 깨닫는다

 

창을 넓히려 할까, 열고 나가면 될 것을

 

― 「11월의 밤거리 - 현해懸解」 전문

 

  늦가을 밤거리를 배경으로 시인은 ‘창’을 넓히는 것과 열고 나가는 것 ‘사이’를 사유한다. ‘창’이란 무엇인가. 원래 ‘창(窓)’이라는 이미지는 주체와 외계(外界)를 이어주는 통로 구실을 원형적으로 수행한다. 이 작품에서 인지되는 의미 기능 역시 그런 원형 상징성 안에 귀속된다고 볼 수 있다. 마음의 창은 우리의 ‘눈’으로 자연스럽게 전이된다.(사실 우리의 육체 가운데 외계와 주체를 감각적으로 잇고 있는 역할은 ‘눈’이 맡고 있다) 그럼으로써 그 밝은 ‘눈’(마음의 ‘창’)이 보다 더 밝은 세계를 기대하는 거울이 되는 것이 아니겠는가. 이러한 ‘창’ 이미지는 시편의 마지막 행에서 반복되면서 시인이 의식적으로 장치한 형상임이 분명해진다.

  급히 서둘렀더라면 기다림과 그리움이 크지 않았을 텐데, 시인이 물어물어 찾아간 “적막한 대문”과 이제 흐릿해져버린 “우리들의 청춘”은 모두 나이 들어가면서 가라앉아버렸다. 그 오랜 시간이 지나고 나서 시인은 “창을 넓히려 할까, 열고 나가면 될 것을”이라는 명제에 기어코 도달한다. 이 시편은 마치 청춘의 만가처럼 “오래 전 이야기”를 그리워하고 “낡은 사진 속 배경” 같은 흐릿한 기억을 노래하지만, 그 안에서는 시간이라는 물질이 거두어간 흔적 속에서 기다림과 그리움의 힘이 얼마나 강렬할 수 있는지를 노래한다. 이때 이 시편의 부제가 언뜻 눈에 띄는데, ‘현해(懸解)’가 거꾸로 매달린 것이 풀린다는 뜻으로서 생사고락을 초월한다는 뜻을 품고 있다는 점에서, 시인이 결국 창을 넓혀 세상을 보는 것과 창을 열고 세상으로 나아가는 것이 크게 구별되지 않는다는 것에 상도(想到)하게 되었음을 암시한다. 시인은 그야말로 “도저한 응집력에서 벗어나”(「블로그 선문답」) 더 크게 세상을 바라볼 수 있는 지경(地境)에 이르게 된 것이다.

이렇듯 김영애 시인은 일관된 미학적 정예주의를 통해 자신만의 아름다운 존재 전환을 꿈꾸면서, 예민한 의식으로 불모의 것들에 대한 시적 해석을 완성하고 있다. 또한 ‘시’ 자체에 대한 남다른 자의식을 통해, 무의미해 보이는 시간의 마디들을 해석하고, 기억의 원리를 통한 시의 위의(威儀)와 기능을 선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이 모두가 폐허와 불모를 넘어서, 어떤 근원적인 질서에 대한 열망과 매혹을 그녀만의 시선으로 담아낸 고유한 풍경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그 점에서 우리는, 김영애 시편들이 비록 불모의 세상에서 태어난 것일지라도, 그것이 소모적이고 자기 모멸적인 노래가 아니라, 생성적인 사랑의 노래임을 분명하게 알게 된다.

  한 가지 첨언하자. 주지하듯 시에서 ‘형식(form)’이란, 개별적인 시적 요소들을 단일한 하나의 유니티로 조직하는 배타적 구성 원리를 말한다. 그래서 다양하고 산만한 시적 요소들은 커다란 유기적 전체 안에 적절하게 배열됨으로써 하나의 완미한 시적 형식을 이루게 된다. 사실 한 편의 시 작품을 세밀하게 관찰해보면 그 안에는 이미지, 소리, 서사, 수사 등의 요소들이 가득 들어 있는데, 이들은 모두 각각 그들 나름의 형식화 단계를 거쳐 전체 시편을 완성하게 된다. 이번 첫 시집에서 김영애 시인은 풍부한 테마와 선 굵은 스케일 그리고 다양한 수사 등 여러 시적 요소들을 적극적으로 시 안으로 끌어들여 완미한 형식화의 원리를 우리에게 보여주었다고 할 수 있다. 내용 편향의 시학이 아니라 적정한 형식화의 원리가 그녀 시학을 지탱해준 것이다.

 

 

  5.

  최근 우리 시대의 전위들은, 이른바 ‘재현의 감옥’을 벗어나 자신만의 새로운 상상적 언어를 탐구하고 실천하는 경향이 짙다. 그들의 언어는 의미론적 완결성보다는 아나키적 에너지로 충만하고, 정합성보다는 우연성을 통해 사물의 원리를 구성하기도 한다. 이는 언어의 기능 가운데 은폐나 간접화의 방식을 선택하는 과정으로 적극 나아가게 된다. 더러는 중층적 서술이나 비선형적 구조 등에 의해 도움을 받기도 한다. 김영애 시인의 충동과 에너지 역시 그러한 방식으로 분출되는 사례가 적지 않다. 하지만 우리는 그녀가 ‘재현의 감옥’을 힘껏 벗어난다 하더라도(인용하지 못한 시편들 가운데 상당수가 그러하다.), 여전히 고전적인 사유와 감각을 바탕으로 새로운 질서를 만들어갈 것이라고 생각한다. 다음 시편은 그러한 시사를 준다.

 

껍질 부서지는 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땅콩이 소우주

들어앉은 충만이 둘이라면

셋으로 혹은 하나로 변주되는 이단의 선택

둥그렇게 움츠린 것은 약한 것들의 지혜

단단한 껍질에 치명적인 각도는

살아있는 것의 운명이라

손가락에 힘주며

부서지는 껍질 앞에 숙연하다

 

― 「껍질을 까며」 전문

 

  김영애 시인은 새삼 “껍질 부서지는 소리”에 온몸으로 귀를 기울이고 있다. 이 소리는 다른 시편에서 자연 사물이 “툭툭 끊어져 나가는 소리”이다가 “적막이 깊어 흔들어 깨우는 소리”(「폭설」)로 변형되는 바로 그 순간의 소리로 나타난 바 있다. 그리고 그것은 우주의 존재가 들려주는 “저음의 속삭임”(「리베르탱고-투병 중인 H를 위하여」)으로 나타나기도 하였다. 시인은 너무도 작은 ‘땅콩’에서 ‘소우주’를 보면서, 그 안에 “들어앉은 충만”이 다양하게 변주되는 과정을 응시하고 있다. 그렇게 땅콩은 둥그렇게 움츠림으로써 “약한 것들의 지혜”를 보여주고, “단단한 껍질에 치명적인 각도”는 그것이 살아있을 수 있는 운명적 조건이 된다. 시인은 그렇게 “부서지는 껍질 앞에 숙연”해하면서, 껍질을 까는 과정에서의 형이상학을 들려준다. 모든 것이 우주의 ‘바닥(bottom)’이라는 해석 아래서, 그 ‘바닥’을 치고 오르면서, 거기에 다양한 형식의 완미함을 덧보태면서, 김영애 시세계는 하나의 완결성 있는 마디를 구현한 것이다.

 

  지금까지 우리가 천천히 읽어왔듯이, 김영애 시인은 ‘자기 인식’과 ‘세계 탐색’의 창(窓)으로서의 ‘시’를 열정적으로 써왔다. 이러한 진정성과 새로움의 세계를 첫 시집에서 성취한 김영애 시인의 시세계는 이제 어디를 향하게 될까 생각해본다. 보다 더 근원적인 깊이를 담은 형이상학적 전율을 향해 한 걸음 나아갈까, 아니면 사물의 구체성을 향해 선명하고도 생동하는 리얼리즘의 세계로 이월해갈까, 혹은 내적 감각의 섬세한 고백으로 흘러감으로써 자기 인식의 양상을 점증(漸增)해갈까. 그 어느 것이든, 우리가 보기에 그 세계는, 인간과 우주와 역사에 대한 깊은 미학적 이해와 경험을 통해 벼려질 것이다. 그렇게 우리는 “깊숙하다는 말이 아름다울 때”(「‘그 너머’ 칠면조를 보여줄까」)를 기다려보기로 하자. 그녀 다음 시집이 취해갈 그러한 점진적이고도 확연한 진화를, 마음 깊이, 소망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