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주사 가는 길
운주사에는 천불천탑(千佛千塔)이 빼곡하여, 사람투성이라지,
신라의 도선이 세웠다는 설도 있고, 고려시대에 만들어졌다는 설도 있지만, 최근에 텔레비전에서 방송했던 운주사의 비밀이 마음에 끌린단 말이야.
백제시대에 중국의 동진(東晋)에서 도망쳐 온 유민들이 세웠다는 설인데 그럴 듯해.
중국남북조시대에 난을 당한 사람들이 배를 타고 한반도로 건너온 것이고, 그 때는 바닷물이 지금의 운주사 앞까지 들어왔다고 하거든,
사실 운주사의 석불이나 석탑은 전통적인 우리의 것과는 모양새가 많이 달라. 척 보면 벌써 이국적인 냄새가 나지. 연화탑, 실패탑, 거지탑, 항아리탑, 등을 보면 다 그래.
기원이야 어찌되었든 나를 사로잡은 것은 바로 그 못 생긴 불상과 엉성한 불탑이지,
마구잡이로 바위를 깎아 만든 불상의 모양도 그렇고, 탑도 역시 돌을 삐뚤빼뚤하게 쌓아놓은 것처럼 엉성한데, 그게 참 묘미가 있단 말이야.
삼국시대의 석불이나 국보인 미륵반가사유상은 무척 세련되고 균형이 잘 잡혔으며, 다보탑이나 석가탑도 역시 흠 하나 없이 완벽하거든,
그것은 신비롭기도 하지만 사람을 꼼짝 못하게 만드는 힘이 있어, 그래서 섬뜩한 거야.
언젠가 석가탑과 다보탑을 구경했었어, 사람들이 다 탄성을 질렀지만 나는 왠지 차가운 느낌을 받았어.
너무 완벽해서 내가 비집고 들어갈 틈이 없었던 거야.
그냥 멀리서 바라볼 뿐이고, 감히 접근할 생각도 못했어.
좀 기괴한 발상인지 모르지만 나는 종교란 하늘에 있다고 생각지 않아.
위대한 모든 것은 꼭 하늘을 치받아 높이 있다는 기존 관념을 싫어해. 왜냐하면 사람들이 손을 뻗어서 잡을 수 없단 말이야. 그러면 어디에 종교가 있냐고?
바로 땅바닥이지.
종교는 발바닥 아래의 땅바닥에 있다는 생각이야.
땅바닥을 딛지 않는 사람은 없어.
종교는 모든 사람들에게 한 뼘 남짓한 발자국을 허용하고 떠받들다가 나중에 몸이 쓰러지면 다 받아 주거든,
하여튼 운주사의 천불천탑은 짜임새가 딱 맞지 않아.
꼭 내 모양 같단 말이야.
그러나 운주사에는 원대한 꿈이 있어.
우선 길게 뻗은 계곡이 하늘의 은하수 위치와 동일하거든, 그리고 부부와불이 북극성자리고 칠성석은 북두칠성자리와 똑같이 위치해.
지금은 백여 개의 석불과 탑이 남았지만, 옛날에는 무수히 많은 석불과 탑이 계곡을 매웠다는데, 그게 다 하늘의 별자리를 본 딴 것이래.
밝은 별은 좀 큰 돌로 석불이나 탑으로 본 땄고, 빛이 약한 별은 작은 돌로 만들었거든,
그리고 별의 중심인 북극성을 상징하는 부부와불에 꿈을 불어넣었지.
“와불이 일어나면 천년왕국이 세워지리라.”
나 나름대로 운주사의 내력을 해석하면 이렇지,
서기 4~5세기 경의 중국은 남북조시대였는데, 남조 최초 왕국이 바로 동진이야, 그 동진이 군벌인 유유에게 망하는데, 그때의 왕족이나 유력세가들이 배를 타고 이쪽으로 피난 온 것 같아. 그들은 은하수를 따라 길게 그어진 이곳에 정착하고 원(愿)을 바위에 새겨 넣은 거야.
급히 오느냐고 재주 있는 석공을 데리고 오지 못했기에 사람들 각자가 석불을 만들고 탑을 쌓은 것이지,
가족불도 있는데, 할아버지불, 아버지불, 아내불, 아들불, 딸불도 있거든,
이런 경우는 난에서 가족을 잃어버린 누가 식구들 숫자에 맞춰 석불을 깎아 세운 거 같아.
가족이나 친척들을 잃은 사람들이 밤마다 얼마나 서러웠겠어,
별을 보며 한숨만 내쉬었겠지, 그러다가 저 별에 올라간 가족을 지상에 끌어내려 곁에 두고 싶은 염원에 아내를 잃은 홀아비는 부부불을 만들었고, 자식을 잃은 사람들은 아들불, 딸불을 만들었겠지, 얼마 전만해도 운주사 부근에 사는 사람들은 석불을 그렇게 불렀다더군.
또 왕조를 부활하는 뜻에서 큰 바위에 와불을 새기고, 부처가 일어나면 천년왕국이 세워진다는 전설을 심은 거야.
보통 와불은 부처가 열반할 때 옆으로 비스듬히 누운 측불이 대부분인데, 운주사의 와불은 벌렁 누워서 하늘을 바라보고 있어. 또 부부와불이야. 이것은 아마 불심이 깊었던 동진의 마지막 왕과 왕비를 상징했을 거야.
그들은 지금도 꿈을 꾸고 있잖아.
먼 하늘의 별자리에 백성들이 다 들어앉았고, 그 별들이 자기를 중심으로 빙빙 도는 거지.
밤마다 왕이시여, 어서 일어나 천년왕국을 세워, 우리 백성을 돌봐 주소서, 하는 속삭임이 반짝반짝 들릴 거야.
그 소리를 들으며 왕과 왕비는 밤마다 꿈을 꾸겠지,
나는 신(神)이 운주사의 천불천탑처럼 좀 엉성했으면 좋겠어, 모든 종교도 말이야.
약간 삐딱하고, 뒤틀리고, 피곤한 듯 기대고, 하품도 하고,
그래서 밖에서 슬쩍 죄를 저지르고 들어와도 그 틈에 살짝 숨어 있을 수 있게 말이야. 내가 말을 안 하면 신도 모르는 거야.
좀 미안하지만 시치미 뚝 떼고 같이 지내는 거지 뭐,
안 그래?
2006년 오월, 이정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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