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문과 산문

강은교<집착하면 잃으리라>

미송 2009. 1. 23. 00:25

집착하면 잃으리라

 

'행복'이란 무엇일까. 그건 도대체 어디서 오는 것일까. 그건 커다란 집을 짓는 일일까. 커다란 책을 쓰는 일일까. 아름다운 예술을 남기는 일일까. 아니면 세월이 지나도록 한 자리에 한 자세로 서 있다가 끌려내려 오기도 하는 동상이 되는 일일까. 그건 커다랗게 이름을 바위에 새기는 일일까. 도대체 무엇일까. 그런데 왜 나는 아직도 그런 우스우며 초보적인 질문을 던지는 것일까. 무수한 사람이 무수한 이야기를 해 놓은 그것에 대해서 말이다.

 

오늘도 행복의 의미에 대해 고민하면서 집 뒤 범어사에 올라간다. 그 바위와 또 만난다. '어떤 이름'이 커다랗게 새겨진 바위이다. 곳곳의 잘 생긴 바위에는 어김없이 '어떤 이름'들이 새겨져 있다. 대웅전 옆 청룡암에는 문장가로 유명했다는 동래부사의 시구도 새겨있다. 그 시구가 비바람에 씻겨 거의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이 된 것을 눈을 비벼 들여다보면서 시라는 것을 생각하다가, '돌에 새긴다고 남으랴', 하면서 길을 내려온다. 윤동주의 시를 새긴 시비가 매연에 시커멓게 되어 나동그라져 있던 어떤 길거리를 잠시 떠올리기도 한다.

 

대웅전 뜰에서 내려오다가 대나무 숲을 만났다. 잠시 바람을 맞으며 거기 난간에 기대 서서 대나무들을 바라본다. 참 곧게도 섰구나, 하면서 대나무의 몸매에 감탄하는데 자세히 보려니 거기 대나무에도 가득 이름들이 새겨져 있다. 저 높은 데 어떻게 글자를 새겼을까 싶을 정도의 키 큰 대나무 꼭대기에도 이름이 새겨져 있다. 개중에는 하트를 그려놓고 그 양쪽에 두 사람의 이름을 새긴 경우도 있다. 아마 연인들인 모양이다. 아니면 짝사랑하는 연인의 간절한 마음이든지. 그러나 그렇게 움켜쥐어보려 한다고 사랑이 쥐어지는 것인가. 시간이라는 것, 생명이라는 것, 예술이라는 것, 인연이라는 것도 그렇게 움켜쥔다고 이루어지는 것인가.

 

어쩌다 지난 초여름 톨스토이의 묘에 갔었다. 톨스토이의 묘, 그 거대한 이름에 비하면 놀랄 정도로 너무 작은 묘, 풀만이 가득했다. 비석도 없었다. 우리의 기준으로 보면 명당자리도 아니었다. 계곡 옆에 위태하게 앉아 있었으니까. 아내의 반대를 무릅쓰고 자신의 넓은 토지를 농노들에게 나누어 주었을 뿐 아니라, 소설 '안나 카레니나'의 인세도 받지 않았다는 박애주의자, 톨스토이. 그리고 톨스토이의 그 풀무덤을 생각하면서 모스크바, 상트페테르부르크를 떠올린다. 모스크바의 아름다운 궁전의 황금의 돔들, 상트 페테르부르크의 그 컬러풀한 별장과 궁전들, 생각해보면 그 아름다운 것들은 다 누구인가가 움켜쥐었던, 말하자면 '움켜쥠'의 본보기들이었을 뿐이다. 황금덩어리에 인간의 피를 새긴 것들이었다. 그 궁전을 짓기 위한 역사에 동원된 농노들이 수은 중독으로 무수히 죽었다니까. 그 피의 황금 돔 아래서 혹은 루비 기둥 앞에서 행복한 춤을 추었을 사람들, 결국 많이 '움켜쥐었던' 교양있는 사람들. 하긴 이렇게 이야기를 끌고 가다 보니까 어줍잖지만 일생을 걸어오며 쓴 내 시도 '우스운 움켜쥠' 또는 '집착'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또 그 도시들에는 너무 크게 만든 탓에 한 번도 쏘아보지 못했다는 대포도, 너무 크고 무거워 한 번도 울리지 않았다는 종도 있다. 그 종에 하느님이 계시다고 믿으며 집착했었다니.

 

해변에 서 있는 거대한 석상으로 유명한 이스터 섬도 떠오른다. 어떤 환경학자의 의견에 의하면 600개나 되는 석상들의 그 거대한 돌을 옮기기 위하여 뗏목 등을 만드는 바람에 숲이 황폐하여지고, 나중엔 카누를 만들 나무도 없어져 다른 섬으로의 이동은 물론 바다에 나가 먹을 것을 구할 수도 없게 되었으므로 나중엔 서로 잡아먹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 섬에서 가장 지독한 욕은 "네 어머니의 살이 아직 내 이빨에 끼어 있다"는 말이라고 했다. 아무튼 그 석상들은 '집착이 이르는 곳이 어딘가' 하는 것의 가장 확실한 증거인지도 모른다. 물론 이스터 섬 사람들이 의도한 것은 아니었겠지만.

 

그런 의미에서 장자의 비유를 읽으면 장자는 정말 집착이 없는, 자유로운 사람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텅빈 방이 환하지 않느냐'고 했으니. '거기 행복이 깃든다'고 했으니. 그런데 우리는 이름 따위를 돌에, 대나무에 새겨 어지럽게 하려고 하다니, 영원히 움켜쥐려는 집착을 보이다니, 이 시대의 '지성'이라는 이들은 덧없이 사라지는 종이에 새기려 들며 집착하다니. 하긴 현대의 어떤 철학자는 '욕망이야말로 생산하는 힘'이라고 했으니(들뢰즈), 그 논리로 말하자면 욕망이라는 말과 깊은 연관을 가질 수밖에 없는 집착이야말로 삶의 근원적인 힘이 되는 것인가? 그렇다면 모든 선진의 문명들은 집착의 힘이 이룬 것인가? 그렇다면 장자의 논리, 노자의 '執者失之'(집착하면 모든 것을 잃으리라)의 논리는 '말도 안 되는 어거지 말씀'이신가?

 

강은교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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