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문과 산문

사바나에서 블랙커피를 외 다수

미송 2009. 1. 25. 16:28

     

    사바나에서 블랙커피를 / 배옥주

                              

    카페 사바나에 앉아 

    가젤의 눈빛을 읽는다 수사자가 되어 

    툭툭 바람의 발자국을 털어낸다

      

    바위비단뱀의 혓바닥 같은 

    찻잔 위로 검은 유목민들이 떠다니고

    소용돌이로 끓어오르는 암갈색 눈알들

    야자나무 그늘이 내려오는 창가로

    말굽 먼지를 일으키며 지평선이 달려온다

      

    성인식을 치른 힘바족 처녀들이

    내 두 개의 덧니 사이로 걸어 나오고

    유두 같은,

    검은 향기를 혀끝으로 음미한다

     

    폭풍우 지나간 손바닥 위에

    블루마운틴 한 잔을 올려놓으면

    대륙의 어디쯤에서 깃털의 영혼이 나부끼고

    아라비카 전생의 내가 보인다 하얀 손바닥과

    희디흰 눈자위를 가진 처녀가

    유르트 같은 찻잔 속에서 어른거린다

     

    이제 막 흑해의 붉은 달이 떠올랐다

     

     

     

    양변기 편들기 / 박동남


    맞아요 내 증상은 애정결핍증이에요

    한때 난 당신과 특별한 사이였죠

    당신, 시도 때도 없이 문을 두드렸지요

    우리 함께 밤을 지낸 적도 있었잖아요

    당신의 체위는 언제나 상위였죠

    시치미 떼지 마세요

    손가락 하나로 당신의 흔적을 감쪽같이 지울 때마다

    난 천길 벼랑으로 떨어졌어요

     

    볼 일 다 보면 맘이 달라진다더니

    그렇군요, 정말

     

    그래요 고백할 게요

    솔직히 볼 것 다 보았어요

    어차피 타고 난 팔자가

    그런 꼴 보는 거였죠

    하지만 내가 원한 건 아니었어요

     

    염려마세요 내 입은 무거워요

    그동안 너무 많은 것들을 삼켰어요

    가끔 목이 메어 토해낸 적도 있지만

    그건 당신에게 배웠지요

    쫓겨 난 처지에 무얼 바라겠어요

    이제 그만 흉물스런 내 몰골을 박살내 주실래요

     
     

     

    토마토는 뜨거웠다 / 방인자


    식전
    반으로 가른 토마토
    탯줄이 시작된 곳으로부터 실핏줄이
    온몸에 퍼져 있다

    말캉한 다섯 개의 심장들이 술렁이고
    손을 타고 주르륵 쏟아져 내리는 선혈
    저 뜨거운 속
    벌써 붉은 햇살이 당도해 있었구나

    달싹이던 심장이 덜컥
    온몸에 전율이 흐른다
    통째로 익은 뜨거운 사랑이 기지개를 켠다

    나, 얼마나 뜨겁게 살고 있는가
    가슴속을 뒤적여 본다
    저 깊은 속 어디쯤에서 불그스레 올라오고 있는
    사각거리는 사랑 하나 말캉하게 걸린다 

     2009 [우리詩] 신인상 당선작 

     

     

    사오정의 후예 /  김사람


     

    TV는 귀가 없다 듣지 못하면서 말할 줄 아는 천재다

    연출된 언어는 나름 각각의 대화를 짜깁기하고 나는 송곳을 들고 채널 속으로 들어간다

     

    # ch 366

    방에 앉아 눈을 끔벅인다 안액 말라 뻑뻑한 소리 귀가 먹먹하다 나의 혓바닥인 듯 거실 문고리가 덜렁거린다 늘어난 스프링의 탄성은 되돌릴 수 없는 것인지 경적 울리며 차가 달려와도 지나는 늙은 개의 꼬리가 꼿꼿이 서지 않는다 소통에 대한 의지라고는 보이지 않는 저들은 타인의 언어를 잊어가고 있을지 모른다 형식적인 인사조차 외면하는 듣지 못하는 것들

     

    # ch 367

    차를 몰아 교차로에 선다 알록달록 표정 바꾸며 명령하는 신호등은 서너 개 말만 하는 앵무새 정지! 직진! 좌회전! 우회전! 4지 선다 중 나의 말 따위에는 관심 없이 선택만을 강요한다 차선을 잘못 들어선 나는 차선과 차에 갇혀 갈 곳을 잃는다 문득 귀 틀어막고 후진기어 넣어 엑셀 꾹, 밟는다

     

    # ch 368

    이어폰을 귀에 꽂고 걷는 사람들은 충돌한 차 소리에 흔들리지 않고 각자의 리듬을 타며 걷는다 시청 시계탑 초침은 일정박을 유지하며 지나는 사람 하나하나 지시하고 이탈을 방지한다 검은 선글라스 낀 경찰이 내뱉는 혀차는 소리가 부상자의 마지막 신음 밟아버리고 몸을 뛰쳐나온 붉은 소리마저 하얀 선으로 가둬버린다 무전기로 주고받는 알 수 없는 대화 앞, 떨어져 나간 한쪽 귀가 바닥에서 파닥거린다 "여보오, 내 입에 청진기 좀 대어줘!"

     

    잠을 자기 위해 밖으로 기어나온다

    TV에서는 얼굴 벌건 국회의원들이 출연한 100분 토론이 한창이다

    출연료 대신 보청기를 사은품으로 줘야 한다고 얘기하는 것 같다

    나는 귓구멍을 뚫기 위해 TV를 송곳으로 마구 찌른다

     

'운문과 산문'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이태준<달밤>  (0) 2009.01.28
송기영 <뒷골목 라라 외 7편>   (0) 2009.01.25
박상우<돌아오지 않은 황제의 여인>   (0) 2009.01.23
강은교<집착하면 잃으리라>  (0) 2009.01.23
법정의 <어떤 주례사>  (0) 2009.01.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