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문과 산문

강성은 <세헤라자데>外 2편

미송 2015. 1. 28. 09:12

 

 

 

세헤라자데 / 강성은   

 

 

옛날이야기 들려줄까 악몽처럼 가볍고 공기처럼 무겁고 움켜잡으면 모래처럼 빠져나가 버리는 이야기 조용한 비명 같은 이야기 천년 동안 짠 레이스처럼 거미줄처럼 툭 끊어져 바람에 날아가버릴 것 같은 이야기 지난밤에 본 영화 같고 어제 꿈에서 본 장면 같고 어제 낮에 걸었던 바람 부는 길 같은 흔해빠진 낯선 이야기 당신 피부처럼 맑고 당신 눈동자처럼 검고 당신 입술처럼 붉고 당신처럼 한번도 본 적 없는 이야기 포르말린처럼 매혹적이고 젖처럼 비릿하고 연탄가스처럼 죽여주는 이야기 마지막 키스처럼 짜릿하고 올이 풀린 스웨터처럼 줄줄 새는 이야기 집 나간 개처럼 비를 맞고 쫓겨난 개처럼 빗자루로 맞고 그래도 결국에는 집으로 돌아오는 개 같은 이야기 당신이 마지막으로 했던 이야기 매일 당신이 하는 이야기 내가 죽을 때까지 죽은 당신이 매일 하는 그 이야기 끝이 없는 이야기 흔들리는 구름처럼 불안하고 물고기의 피처럼 뜨겁고 애인의 수염처럼 아름답고 귀를 막아도 들리는 이야기 실험은 없고 실험정신도 없고 실험이란 실험은 모두 거부하는 실험적인 이야기 어느 날 문득 무언가 떠올린 당신이 노트에 적어 내려가는 이야기 어젯밤에 내가 들려준 이야기인줄도 모르고 내일 밤 내가 당신귀에 속삭일 이야기인줄도 모르고.

 

시집 『구두를 신고 잠이 들었다』(창비, 2009) 중에서

 

 

 

 

환상의 빛 / 강성은

 

옛날 영화를 보다가 
옛날 음악을 듣다가 
나는 옛날 사람이 되어버렸구나 생각했다
 
지금의 나보다 젊은 나이에 죽은 아버지를 떠올리고는 
너무 멀리 와버렸구나 생각했다
 
명백한 것은 너무나 명백해서 
비현실적으로 느껴진다
 
몇 세기 전의 사람을 사랑하고 
몇 세기 전의 장면을 그리워하며 
단 한 번의 여름을 보냈다 보냈을 뿐인데
 
내게서 일어난 적 없는 일들이 
조용히 우거지고 있는 것을 
보지 못한다
 

눈 속에 빛이 가득해서

다른 것을 보지 못했다

 

시집 『단지 조금 이상한』(문학과지성사, 2013) 중에서

 

 

 

죽거나 망하거나 혹은 / 강성은 

 

은 줄로 알았던 선생님이

도서관 앞에서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선생님은 죽은 것이 아니었구나

소문은 늘 실제보다 과장되어 있다

선생님은 죽은 것이 아니라

조금 아팠거나 조금은 죽어있었던 것이겠지

선생님은 나를 보자 놀라

커피를 떨어뜨린다

너는 죽은 줄 알았는데

그럴 리가요, 선생님. 저는 이렇게 살아있어요

저는 선생님이 죽을 줄로만 알았어요

선생님은 내 손을 잡았다

죽은 줄로 알았던 사람을 만나다니

인생은 정말 알 수 없는 것이야

문득 죽은 친구 몇이 떠올랐다

그리고 죽은 사람을 만나도

더 이상 놀라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월간 『현대시학』 2014년 3월호 발표

 

 

성은시인  1973년 경북 의성에서 출생. 서울예대 문예창작과 졸업. 2005년 《문학동네》 신인상에 당선되어 등단. 

시집으로 『구두를 신고 잠이 들었다』(창비, 2009)와『단지 조금 이상한』(문학과지성사, 2013)가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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