써니의 영상

달무리 혹은, 능동

미송 2015. 2. 9. 10:39

 

 

 

 

 

 

Rene Magritte, The art of living 1967

이 작품은 마그리트가 세상을 떠난 해에 그린 작품으로서 걸작중 하나입니다. 양복을 빠져나와 (인간의 의식의 감옥을 빠져나와) 온몸의 육체가 머리로(육적인 감각이 영적 이성으로 통제가능 하게된) 변하여 공중에 떠있는상태(완전 해탈의 상태)를 그린 것입니다. 이 상태가 살아있는 진정한 예술이라는 것이지요.

미술 음악 문학은 도구가 필요합니다. 도구가 없다면 예술도 못하는 것이지요. 그러나 살아있는 예술은 행위로 이웃을 행복하게 하는 것이니까 이웃의 얼굴(이성)에 직접 그리는 것입니다. 美的理性의 상호 충돌과 폭발하는듯한 행복, 그것이 바로 "천국"인 것입니다. 이러한 천국의 행복을 감지한 마그리트는 같은 해인 1967년에 3색 사과를 그리게 됩니다. 빨강 노랑 파랑=성부 성자 성령, 모든 발랄한 행복의 색을 창조할수 있는 삼원색의 사과=작품 제목이 young love이니까 젊은 하나님을 마그리트는 발견하게 됩니다.

신구교를 막론하고 성전에서 젊은 하나님을 발견토록 설교하는 성직자는 아마 없을 것입니다. 인간은 젊은 하나님을 받을 힘이 부족하고 받아들일 경우 심각한 부작용이 발생할 것입니다. 그래서 수천년의 말씀의 역사가 흐른 21세기에도 흰수염의 노인인 미켈란젤로의 하나님이 신의 이미지로 인간앞에 제시 될 수 밖에 없는 것이지요. 그래서 마그리트는 악마의 미소라는 작품을 그립니다. 열쇠구멍에 열쇠를 감춘 악마는 미소를 지을수 있었다는 내용입니다.

 

Rene Magritte, Presence of Mind

작품 화면을 살펴보면 가운데 중절모의 신사는 작가 자신입니다. 좌우에 동물들을 묘사한것은 복음서에서 예수님이 "공중에 나는 새도 둥지가 있고 날짐승도 굴혈이 있는데 나는 머리둘 곳도 없다"라고 하신 성서 말씀을 생각하면서 마그리트도 자기의 처지를 스스로 위로받기 위해 좌우에 새와 물고기를 연상합니다. 좌측은 새, 우측은 물고기, 그러니까 이 둘의 공통점은 육지의 짐승은 아니라는 점에서 마그리트는 어차피 자신은 숙명적으로 새와 물고기와 같은 신세의 존재이며 그러니까, 세속으로 부터의 소외를 두려워 말자는 자기 암시를 통하여 침착을 유지하였던 것입니다.

위에 있는 침착이라는 작품은 거듭난 분들이 이 세상의 일상적 관계로부터 자주 있을 수 있는 단절을 맞게 되었을때 침착을 유지하는 마그리트의 방법이 되겠습니다. 마그리트가 서 있는 위치는 광장으로부터 이탈된 해변(변방)임을 알수 있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양복과 중절모를 갖춰 입은채(다듬어진 영성) 냉정한 자세로 자신의 모습을 잃지않고 있는 포우즈입니다.

좌우에 있는 새와 물고기는 땅에서 사는 동물이 아니라는 점에서 마그리트는 자신의 고난이 이 세상의 사람이 아니라서 받는 고난이기에 당연한 것이므로 좌우의 동물들을 자신과 같은 입장의 친구들로 보면서 이 동물들처럼 인간의 세상을 묵묵히 견디어 내겠다는 자기다짐을 하고 있는 것이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이러한 자세는 환난으로 부터 받는 충격을 일시적으로 완충시켜 줄수는 있으나 근본적인 정답은 아니라는 점에서 세상에서 타자와의 건강한 관계성을 지속적으로 유지하면서도 자신이 죄에 물들지는 않는 지혜로운 영성과 타자를 향한 자기개방의 능력을 하나님으로 부터 받아야할 것입니다. 그런데 신으로부터 받는 지속적인 은총은 실천적 신앙인에게 계속 부어주신다는 점에서 결국 영생의 길을 가는데 있어서 최종적 승리는 믿음만으로는 안되며 행위를 통해 선을 실천하는 신앙인들만의 몫이 아닐까 생각하게 되는 작품이 되겠습니다.

 

Rene Magritte, Attempting the Impossible


불가능한 시도라는 이 작품은 작가인 마그리트가 여성의 나체를 그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왼쪽팔은 아직 그리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 나머지 팔을 그려 완성함은 불가능한 시도라는 것이지요. 다시말하면 회화라는것은 대상의 재조명입니다. 재조명이 되느냐 안되느냐에 따라 화가와 화공이 구분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나체의 여자를 그린다는 의미의 뜻은 성에 관한 재조명 즉, 깨끗하고 거룩하며 완전한 성을 현실적으로 인간이 나누고 소유할수 있느냐라는 문제를 놓고 인간적 윤리와 자연이라는 본질적 자유와의 대립적 관계속에서 결국 성적 자유란 사악한 악마의 충동일뿐 자연의 본질이라는 미명에 용인될수 있는 내용이 아니다. , 불가능한 시도다 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현실에서 성적 자유를 합리화 하는 이론이나 행위는 죄악이다 라는 것을 표현한 것이며 "불가능한 시도" 라는 작품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마그리트의 "사악한 악마" 라는 작품을 동시에 감상할 때 더욱 분명해 집니다. 이러한 종교적 신앙과 성적 충동과의 갈등과 내적 깨우침을 표현한 국내의 문학적 흔적을 살펴보면 황석우씨의 벽모의 묘, 김춘수씨의 눈물이라는 작품이 있으며 그중 눈물이라는 작품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눈물 : 남자와 여자의 아랫도리가 젖어있다. 밤에 보는 오갈피나무, 오갈피나무의 아랫도리가 젖어있다. 맨발로 바다를 밟고 간 사람은 새가 되었다고 한다. 발바닥만 젖었다고 한다.


<출처: 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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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네 마그리트의 그림은 나 역시 좋아한다상상력을 자극하니까 좋고 재밌으니까 좋고 짖궃기까지 하니 더 좋다뭔 말을 못하게끔 만드는 그의 데페이즈망(Depaysement)은 그 매력의 출처이자 도착점이기도 하다영상에 뜨는 첫 그림을 보자니성형수술에 중독된 여자 얼굴이 떠오른다주름성형을 하도 많이 하다 보니 더 이상 끌어올릴 근육이 없어져 낭중엔 배꼽이 이마에 올라가 붙었단 우스갯소리도 있었다. 아무튼, 마그리트는 쉬르리얼리즘(surrealism)을 떠올리게 하고, 자유로운 결합을 썼던 앙드레 부르똥 그리고 보르헤스, 백 년 동안의 고독을 썼던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 저 괴이한 뒤상까지예술가들을 줄줄이 사탕으로 끌어낸다. 이현령비현령이란 말이 어울릴 것 같은 해설까지 읽으며, J 불렀던 이선희의 ~ 옛날이여~를 불러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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