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유 등잔을 켜놓고 / 이상
객주(客主)집 방에는 석유 등잔을 켜 놓습니다. 그 도회지의 석간(夕刊)과 같은 그윽한 내음새가 소년 시대의 꿈을 부릅니다. 정(鄭) 형! 그런 석유 등잔 밑에서 밤이 이슥하도록 등잔에 올라앉아서 그 연두빛 색채로 혼곤한 내 꿈에 마치 영어 <티이>자를 쓰고 건너 긋듯이 유다른 기억에다는 군데군데 언더라인을 하여 놓습니다. 슬퍼하는 것처럼 고개를 숙이고 도회의 여차장이 차표 찍는 소리 같은 그 성악을 가만히 듣습니다. 그러면 그것이 또 이발소 가위 소리와도 같아집니다. 나는 눈까지 감고 가만히 또 자세히 들어 봅니다.
그리고 비망록을 꺼내어 머루빛 잉크로 산촌의 시정(詩情)을 기초(起草)합니다.
그저께신문을찢어버린
때묻은흰나비
봉선화는아름다운애인의귀처럼생기고
귀에보이는지난날의기사(記事)
얼마 있으면 목이 마릅니다. 자리물--심해처럼 가라앉은 냉수를 마십니다. 석영질 광석 내음새가 나면서 폐부에 한란계 같은 길을 느낍니다. 나는 백지 위에 그 싸늘한 곡선을 그리라면 그릴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청석(靑石) 얹은 지붕에 별빛이 내리쬐면 한겨울에 장독터지는 것 같은 소리가 납니다. 벌레 소리가 요란합니다. 가을이 이런 시간에 엽서 한 장에 적을 만큼씩 오는 까닭입니다. 이런 때 참 무슨 재주로 광음을 헤아리겠습니까? 맥박 소리가 이 방 안을 방째 시계로 만들어 버리고 장침(長針)과 단침(短針)의 나사못이 돌아가느라고 양쪽 눈이 번갈아 간질간질합니다. 코로 기계 기름 내음새가 드나듭니다. 석유 등잔 밑에서 졸음이 오는 기분입니다.
파라마운트 회사 상표처럼 생긴 도회 소녀가 나오는 꿈을 조금 꿉니다. 그러다가 어느 도회에 남겨 두고 온 가난한 식구들을 꿈에 봅니다. 그들은 포로들의 사진처럼 나란히 늘어섭니다. 그리고 내게 걱정을 시킵니다. 그러면 그만 잠이 깨어 버립니다.
죽어 버릴까 그런 생각을 하여 봅니다. 벽 못에 걸린 다 해진 내 저고리를 쳐다봅니다. 서도천리(西道千理)를 나를 따라 여기 와 있습니다그려!
----散文 <山村餘情>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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