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문과 산문

김승희 <거대한 팽이>

미송 2015. 4. 18. 09:42

 

 

 

 

  거대한 팽이 / 김승희

 

 

  너무도 절망이 태연할 때

  천지사방 흩어지는 콩가루 집안처럼 마음이 흩어져서가 아니라

  가령 혼자 속으로 울며 무념무사 빙빙 도는 팽이처럼

  너무도 절망이 태연하고 깊은 철학이 서린 듯 아름답기까지 할 때

  그런 것을 처절한 황홀이라고 하나,

  나동그라지다가 일어나 활짝 펼쳐지는 온몸의 파라솔,

  고통의 제자리걸음이라기보다

  몸에서 몸을 일으키는,

  고통이 고통을 넘어 고요 속에 고요의 춤이 가득할 때

  (아무도 도와줄 수 없는 팽이의 운명에)

  의젓한 중력을 딛고

  온몸에 칠해진 팽이의 알록달록 다채로운 색깔이

  빙빙 어우러져 급기야 하얀 무지개처럼 솟아날 때

  희망에는 증거가 필요하다고 했던 슬픈 거짓말

  (쳐라 쳐라 몹시 쳐라, 얼마나 많은 채찍을 넘어왔나)

  해는 지고

  달은 뜨고

  살점을 도려내고 쇠못을 박아

  핑그르르 도는 발에서 깊은 피가 흘렀어도

  팽이는 너무도 태연한 절망의 팽이 놀리듯

  몸에서 몸을 일으키며

  제 눈앞의 팽이의 춤을 조용히 건네다 보고 있는데

  간혹 크낙새 깃 치는 소리만 아득하고

  하얀 무지개 춤이 팽이의 배 한가운데서 솟아나는

  성스러운 저녁 마당에

  (광화문이여, 광화문이여)

  누가 팽이와 팽이의 춤을 구별할 수 있는가

 

  팽이가 돌고 있다

  천지인 가득 휘영청 팽이들이 돌고 있다

  도토리나 상수리, 청설모까지 나와 제 몸을 환히 밝히며 팽이들이 돌고 있다

  나무와 칼과 뼈와 빛으로 빚은 팽이들이

  꿈결처럼 조용히 팽이들이 팽이들이 돌고 있다

  나도 감히 상상을 못하는 거대한, 거대한 팽이,

  누가 꿈과 꿈꾸는 자를, 혁명과 혁명가를 구별할 수 있는가

 

   계간 『학산문학 2014년 겨울호 발표

 

김승희 1952년 전남 광주에서 출생. 서강대학교 영문학과와 同 대학원 국문학과 졸업.  <이상 시 연구>로 국문과 사학위를 받음. 1973년 《경향신문》신춘문예에 시가 당선되어 등단. 1994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소설에도 당선. 시집으로 『태양 미사』, 『왼손을 위한 협주곡』, 『달걀 속의 생』, 『어떻게 밖으로 나갈까』, 『세상에서 가장 무거운 싸움』, 『빗자루를 타고 달리는 웃음』등이 있고, 그밖의 저서로는  산문집『33세의 팡세』, 『남자들은 모른다』, 『빗자루를 타고 달리는 웃음』 등과  소설로는『산타페로 가는 사람』, 『왼쪽 날개가 약간 무거운 새』등이 있음. 현재 서강대학교 국문학과 교수로 재직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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