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자도 반쪽이다
편두통이 생기더니
한 눈만 쌍꺼풀지고 시력도 달라져 짝눈이 되었다
이명도 가려움도 한 귀에만 생기고
음식도 한쪽 어금니로만 씹어서 입꼬리도 쳐졌다
오른쪽 팔다리가 더 길어서 왼쪽 신이 더 빨리 닳는다
모로 누워야 잠이 잘 오고 그쪽 어깨와 팔이 자주 저리다
옆가리마만 타서 그런지 목고개와 몸이 기울어졌다고 한다
기울어진다는 것
그리워진다는 것
안타까워진다는 것
사랑한다는 것
아프고 아픈 것
아픈 쪽만 내 몸이구나
아플 때만 내 마음이구나
남이 아픈 줄을 내가 어찌 알아
몸도 마음도 반쪽만 내 것이구나
그림자도 반쪽이구나
그런데 나머지 반쪽은 누구지?
24쪽
고양이, 도도하고 냉소적인
나에게서 호랑이를 찾으려 하지 마라
나를 읽은 눈에는 스핑크스가 보이고
그의 사막 그의 절대고독을 누리게 되지
보이지 않는 아름다움들 제 발로 달려와
더불어 아득한 높이만큼 드높아지지
오직 스핑크스만이 나의 자세로 앉아 있지
아무것도 하지 않고 하루 16시간쯤이야 별 것 아니지
달콤한 잠에 취해
인간보다 더 꿈꾸지
낭만도 더 누리지
지구에 사는 자 중 가장 꿈이 많은 나를
꿈 없는 어류나 파충류와는 비교도 하지 마라
다람쥐 코끼리 곰과도 친한 나의 다문화적 친화성을
흠모하여, 천하의 맹수들이 내게로(고양이과) 모였지
오로지 외로운 평화(平和)와 호사(豪奢) 외에는
아무것도 안중에 없는 나의 사명은
날마다 길모퉁이 담장 위에 올라앉아
여린 겨울 햇볕 차가운 바람에 한 올씩의 터럭만을
헹구어내는 일이지
무릎제자라고?
나를 개(犬)와 혼동하지 마라.
* 새는 하루 1분을, 쥐는 하루 39분을, 사람은 하루 2시간을 꿈꾸지만, 고양이는 하루 3시간씩이나 꿈꾼다고 한다
(고양이 문화사, 태틀레프 블룸지음, 두행숙 번역, 서울; 들녘, 2008 참고)
27~28쪽
바다, 받아
우주의 첫 생명체가 비롯되었다는
아프로디테가 태어났다는
바다에, 밀물이 들고 있다
뜨거운 것이 짜거운 것이
뜨겁고도 쓰라리게 목젖까지 차올라
어머니! 외마디가 터져 나왔다
산에 묻힌 어머니(母)를 바다(海)에서 부르다니
하해(河海) 같은 어머니라고 그랬나
세상의 강물이란 강물을 다 받아주어서
세상의 무엇이나 다 받아주어서
아무리 받아도 넘치지 않는 바다는
천만 가지 세상 높낮이를 다 받아주어 바다이지
천만 가지 이름으로 천만 번을 불러도
다만 바다일 뿐
눈물(氵)로 받아주는 어머니(母)가 있어서
바다(海)이지.
* 일본의 어느 시인도 “프랑스 말이여 네 어머니 속에는 바다가 있고, 일본말이여 네 바다에는 어머니가 있다”라고 썼다고 들었다
32쪽
위하여
소낙비 쏟아져도 젖지 않는 연기 같아지라고
안 풀린 귀양 끝에
오늘이 되었을 뿐인 여기는
소유권도 상속지분도 없는 적소(謫所)
말세의 소돔이라고
눈 뜨고도 코 베이는 이들의
백혈구에 자생하는 신세계
젖과 꿀이 흐르는 땅
우주 밖의 우주 또는 외계 밖의 외계 어디
내일처럼 가까울 순 없어도 반드시 오고야 말
훗날의 어디를 위하여
오늘 여기에 맛들이지 못하도록
풀수록 엉키고 깨어진데 덧나게
죽 쑤면 반드시 엎지르게 하시었다
제 발등에 엎질러 화상(火傷) 입게 하시었다.
38쪽
사시(斜視)로 본다
피사의 사탑(斜塔)만큼
지구의(地球儀)의 기울기만큼
불편한 듯 위태로운 듯
사람과 귀신 사이 도깨비처럼
하늘과 땅보다는 반공중에서
목디스크 아닌 허리디스크로 기울어져
떨떠름한 눈길로 삐딱하게 꼬나보며
옥의 티가 아니라
티 있는 옥돌이 마땅하다 싶어져
기울어져 돌아가는 지구에 붙어살자면
최소한 지구처럼 23.5도쯤 기울어져야지
중심잡기 위해서 기울어져야 했던 피사의 탑처럼
삐딱해야 바르다고
삐딱해야만 반듯하게 돌아가는 삶이라고
신발 밑창도 삐딱하게 닳아버린 제 몸을 보여주니까.
61쪽
코의 화법(話法)으로
누구나 정직만을 말하며 살순 없지
살자면 아첨도 거짓도 담아낼 수밖에 없었던 입은
밤마다 유구무언(有口無言)이지
제몫의 문제는 제 스스로 해결해야 하지만
열 입이 있어도 차마 뻥긋 할 수 없어
그런 때마다 우정출연으로 변명해 주느라고
아무도 알아듣지 못하도록
고의로 암호와 외계어 방언으로 하느라고
날 새는 줄 모르는 고백성사(告白聖事)는
발음이며 억양이며 엉망이 되는 저 코골이
가, 나의 고백성사가 되어주기는커녕
따로 몸 따로 마음만 확인하게 되느니.
68쪽
진실, 반어적 진실
꽃은 떨어지기를
순결은 더렵혀지기를
기록은 깨어지기를
문은 열리기를
벽은 무너지기를 기다리고 있다고
아침은 저녁을
가을은 겨울을
삶은 죽음을
이 시대는 저 시대를
이 세상은 다른 세상을 기다리고 있다고
때없이 들고나던 철조망에 할퀴어
갑자기 피 흘리는 오늘의 저녁놀
평상시가 비상시로
출입구가 비상구로
사랑이 미움으로 돌변하는 변덕도
도둑같이 온다고
알면 병(病) 되고
모르면 약(藥)이 되는 진실된 거짓들.
70쪽
조금만 덜 용서해 주십시오
용서해 주시옵고 용서해 주시옵기를
지워서 잊어버려 주시옵기를
그러나 그러나
스스로를 용서해버릴 만큼은
저절로 다 잊어버릴 만큼은
마시옵기를
조금은 남겨두시옵기를
용서 구할 꺼리를 또 만들지 않을 만큼은
때때로 울고 또 울 수 있는 만큼은
흐린 자국 몇이라도 남겨두시옵기를.
72쪽
유안진 1965년~ 1967년 현대문학 3회 추천으로 등단. 첫 시집 <달하>를 비롯하여 <절망시편> <물로 바람으로> <날개옷> <그리스도, 옛 애인>
<달빛에 젖은 가락> <꿈꾸는 손금> <월령가 쑥대머리> <구름의 딸이요 바람의 연인이어라> <누이> <봄비 한 주머니> <다보탑을 줍다> 등 신작시집과 미래사 시인선 <빈 가슴을 채울 한 마디 말> 등 다수의 시선집. 중국어 번역시집 <바람꽃은 시들지 않는다> <다시 우는 새> <땡삐 1,2,3,4>등의 장편민속소설집. <지란지교를 꿈꾸며> <축복을 웃도는 것> <딸아딸아, 연지딸아> <도리도리 짝짜꿍>등의 산문집과 한국민속의 속요집 등 다수, 정지용문학상, 소월문학상 특별상, 월탄문학상, 한국펜문학상 수상.
경북 안동에서 태어나 임동초등학교, 대전여중, 대전호수돈여고를 거쳐 서울사대 및 동 대학원(교육심리학) 미국 Florida State University (ph.D)에서 공부했다. 마산제일여중고, 대전호수돈여중고 교사, 서울대 이화여대 성신여대 강사, 한국교육개발원 책임연구원을 거쳐 단국대 서울대 교수를 역임했다. 현재 서울대 명예교수.
시집<거짓말로 참말하기> (2008, 천년의 시작) 中 타이핑 채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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