싫어한다는 말 / 박용하
아는 자들을 더 싫어한다
이웃 나라를 더 싫어한다
주註 달린 시를 더 싫어한다
그런 시에 토를 단 해설을 싫어한다
널린 포토샵을 싫어한다
짝꿍 차림을 싫어한다
몸에 장신구 부착하는 걸
목도리 두르고 사진 찍는 것만큼이나 싫어한다
남 씹기 좋아하면서
남한테 씹히는 건 죽기보다 싫어하는 인간들을 싫어한다
패배의 쓰라림을 모르는 자보다
배제의 기억이 없는 자를 더 싫어한다
할 얘기가 군대 얘기밖에 없는 사내를
할 얘기가 티브이 드라마밖에 없는 계집만큼 싫어한다
티브이에서 한 얘기를 곧이곧대로 받아들이는 사람을
신문을 믿는 사람만큼이나 싫어한다
이 세상이 선악의 세상이라고 말하는 너를
이 세상은 호불호의 세상이라고 말하는 나보다 더 싫어한다
남자 후배에게 차이고 온 여자 후배 만나는 걸 싫어한다
예식장 가는 걸 장례식장 가는 것보다 더 싫어한다
해탈과 깨달음을 싫어한다
예언을 싫어한다
타인이 지옥이라는 사람과 타인이 구원이라는 사람 중
어느 쪽을 더 선호해야 할지 아는 사람을 싫어한다
강자보다 약한 강자를 더 싫어한다
유력한 소수보다 무력한 다수를 더 싫어한다
비겁했던 여러 인간들보다
내 인생의 비겁했던 여러 순간들을 더 싫어한다
몸 쓰지 않는 정신을 싫어한다
자판 앞에서 단어나 조립하고 있는 시인을
이 년에 한 권씩 내지 않으면 잊힌다는 소설가보다 싫어하고
육성이 들리지 않는 평론가보다 더 싫어한다
심장 없는 전위를 싫어한다
우주적이지 않은 겸손을 싫어한다
우주 소속이었던 적이 없는 과학자를 더 싫어한다
끝까지 지켜보지 않거나
끝까지 의심하지 않는 자를 싫어한다
공권력을 싫어한다
국가 갖고 영업하는 허가 난 깡패들을 싫어한다
그걸 묵인하고 있는 국민을 싫어한다
한 번이라도 타인인 적이 없었던 사람을
기댈 게 돈밖에 없었던 사람만큼 싫어한다
사과를 싫어한다
사죄를 싫어한다
화해라는 이름의 폭력을
정치를 외면하는 성직자만큼 싫어하고
용서와 치유를 달고 사는 멘토들보다 더 싫어한다
자유민주주의를 앞세우는 업자들을
부처 예수 내세우는 업자들만큼이나 싫어한다
독자적이지 못한 너보다
독창적이지 못한 나를 더 싫어한다
내일을 모르는 오늘보다
어제를 모르는 오늘을 더 싫어한다
사랑 없는 자유보다
자유 없는 사랑을 더 싫어한다
이렇게 말하기 싫다만
너를 싫어한다는 원칙만한 게 있을까
최악을 다하겠습니다라고 시를 쓴 시인을 싫어한다
삶은 지금 이 순간보다 길지 않다고 쓴 시인 역시 싫어한다
세상에는 싫어하는 것들이 너무 많다
떠나간 자보다 떠나가지 않는 나를 더 싫어한다
계간 『시로 여는 세상』 2014년 여름호 발표
1963년 강원도 강릉에서 출생. 1989년 《문예중앙》에 시를 발표하며 등단. 시집으로 『나무들은 폭포처럼 타오른다』,
『바다로 가는 서른세번째 길』, 『見者』등이 있음.
진노의 날, 오늘 / 장석원
아이들이 빨간 비명을 지른다
신체의 액화가 시작된다
시민이 녹아내린다 집단이 사라진다
세계는 수용성이다 액화인간들이 거리에 출렁인다
물이랑에서 백합이 피어난다
물의 주름에서 까마귀가 날아오른다
도관(陶棺)이 지나는 가로(街路)에서 응집하는 아이들의 살코기를 노리는 짐승
리얼리즘 교육 : 현실과 역사와 사회의 진리를 가르쳐야 건강해집니다 미와 진의 동시적이고 전면적인 이행이 필요합니다
벽을 넘는 액체 하늘로 번지는 몸
우리의 흩어진 기관들
물방울 하나와 하나를 합하면 그것은 하나의 육체일까요
*
오토바이와 사냥개 사이에 화살
사라진 오토바이의 주형이 허공에 남아 있다
배기가스 뒤에서 사냥개가 킁킁거린다
세계의 상품 하나가 사라졌다 우리의 신체는 아름다운 상품
인간을 말살하는 정치와 오토바이의 속도와 사냥개의 이빨은 서로 같은 것 다른 몸으로 날아가는 화살 같은 것
우리를 쓰러뜨리는 것은 자본주의가 아니라 망각, 우리의 절망을 정교하게 조직하는 것은 정치가 아니라 정직한 참회
작은 불빛이 되어야 한다는, 민중은 사라졌지만 다시 민중이 되어야 한다는, 허구가 진실이 된 날 아이들이 사라졌다
열린 감옥에서 우리는 무엇을 경험하는가 그곳으로 돌아가야 하는가 비탄의 병동에서 탈출해야 하는가 세계를 폭파할 수 있는가 우리는 절망을 물어뜯고 폭주해야 하는가
화해 불가능하다 번개의 밤이 다가온다 그곳의 우리를 삭제한다 —나라를 바로잡고자 혈관에 맥동치는 정의와 불사하는 진리를 견지하기 위해 우리는 선두에 나서야 한다 —이것은 거짓이다
우리 중에 죄 없는 자 누구인가 이것을 범속한 각성이라고 부른다 아니다 이것이 아니다 우리는 비명이 되었다 우리는 폐기물
나날의 생활 앞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다 그 누구도 살아남을 수 없다 죽음을 봉인하는 눈물과 배반이 우리를 질식시킨다 오늘의 광화문에서 우리는 낱낱의 날것에 불과하다 우리는 파쇄물
몸은 사라졌다 한 번도 있었던 적이 없었다 민중의 신체가 거리에 있었던가 자연만이 우리를 조직했고 우리를 죽게 했고 우리를 태어나게 했다
필연의 왕국이 갑자기 종말한다면 우리가 어느 날 민중이 된다면 우리가 어느 날 거대한 신체가 될 수 있다면 우리가 꺼지지 않는 작은 반딧불이 되어 어둠을 관통할 수 있다면
그것을 혁명이라고 부를 수 있는가, 가능한 것인가, 진행되는 중인가, 우리는 움직이고 있는가
사건이 도래했고 우리는 걷다가 사라졌다 다른 것이 될 수 있었지만 우리는 복제를 선택했다 사랑의 노동은 아름답지만 더 아름다운 일상이 우리를 먹었다
사냥개가 으르렁거린다 공포는 우리가 만든 검열관이고 우리는 빠져나갈 수 없고 우리는 금제(禁制)를 껴입고 숨을 쉰다
떠난 아이들과 우리가 온몸이 될 때까지 우리가 부활하는 날까지 광장이 열릴 때까지 절망을 지울 때까지 우리는 디퍼런스 엔진(difference engine)
불가능하기 때문에 이룰 수 있다 사랑하는 이여 이여(爾汝)여
계간 『POSITION』 2014년 겨울호 발표
2002년 《대한매일》 신춘문예로 등단. 시집으로 『아나키스트』와 『태양의 연대기』 등이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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