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문과 산문

이성복 <귀는 위험할 수밖에>外 3편

미송 2015. 5. 13. 22:20

     

     

     

     

    귀는 위험할 수밖에

     

     

                         그러니 창을 닫고 바람 소리를 듣는 대신

                                     바람 부는 모습이나 바라보리라.

                                 

                                   -로버트 프로스트, '이제 창을 닫고'

     

     

    눈은 감고 뜰 수 있지만, 귀는 감고 뜨지 못한다. 사막

    의 낙타는 코를 열고 닫는다지만, 귀까지 열고 닫는다는

    말은 없다. 귀는 쫑긋 세우거나 다소곳이 모을 뿐, 소리

    가 불쾌할 때는 손가락으로 틀어막는다. 귀를 감고 뜰 수

    없다는 건, 감고 뜰 수 있는 눈보다 치명적이지 않다는

    것. 하지만 귀를 찢는 아이 울음소리로 첨단 무기를 만드

    는 것 보면 귀는 눈보다 덜 위험하지 않다. 지나가는 말

    한 마디에 제 목숨 끊을 수도 있으니, 귀는 위험할 수밖

    에. 스스로 열고 닫을 수 없으니, 귀는 더 위험할 수밖에. 

     

     

     

    삶과 죽음이 불편한 자여

     

                                                        나도 어느 날

                                                     그들처럼 떠나리라

     

                                                 -자크 프레베르, '축제'

     

    이 세상에서 사람은 상록수 방식으로 사는가, 활엽수

    방식으로 사는가. 학생들한테 물으면 열의 아홉은 활엽

    수 방식이라 한다. 그럴까. 가을이 되면 다리털 빠지고, 머

    리카락 다 빠져 대머리 되고, 가을 되면 서울 사람들 다

    죽어 가는가. 봄 오면 다리털 자라나고, 번쩍이는 대머리

    에 머리털 무성하고, 서울 사람들 강변 억새풀처럼 되살

    아나는가. 이 착각이 어디서 오는지 몰라도, 인도에서 불

    교가 발달한 것은 잎 지고 잎이 나는 북방에서라고 한다.

    삶과 죽음이 불편한 자여, 동네 뒷산 소나무 밑에 가 보

    아라.

     

     

     

    그는 참 이상한 꿈을 가졌다

     

                                      외로운 사람은, 또한 신비롭다.

                                           그는 언제나 물기에 찬 모습,

      

                                        -고트프리드 벤, '외로운 사람은'

     

    본래 자화자찬 아닌 외로움은 없어서, 아무도 보는 사

    람 없는 걸 알면, 그 으악새 슬피 우는 울음 딱 그쳐버리

    거나, 자못 심각한 표정 거두시고 헤시시 웃는다. 본래

    진기명기 아닌 외로움은 없어서, 한 공주 한 왕자 하고

    나서도 고색창연한 연기는 계속된다. 제 연기를 고백하

    는 연기, 제 연기를 부정하는 연기. 제 연기를 모독하고

    타도하고 끝내 聖化하는 연기. 외로운 사람은 끝없이 풍

    선을 불어댄다. 그는 제가 부는 풍선 속으로 들어가려는

    참 이상한 꿈을 가졌다.

     

     

     

    어떻든 견디기 힘드는 거

     

                                                    술잔을 입에 대면서

                                        내 그대를 쳐다보고 한숨짓는다

      

                                         -윌리엄 버틀러 예이츠, '술노래'

     

    사랑은 어떻든 견디기 힘든 것, 소련의 브레즈네프가

    환영 나온 차우셰스쿠를 포옹하듯 서로 딴 방향을 바라

    보는 것. 부둥켜안은 그들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

    어쩌든지 기쁨은 견뎌내기 어려운 것, 새 옷 사자마자 딱

    지 떼고 헌 옷 만들거나, 새로 산 만년필 촉 손톱으로 깐

    작거려 그날 밤 안으로 망가뜨리는 것. 내 기쁨 그대 눈

    으로 흐르고, 내 사랑 그대 입으로 흘러들어도, 그대 날

    바라보며 공연히 한숨짓는 건 넘치는 사랑과 기쁨 견뎌

    낼 자신이 없기 때문이다.

     

     

    이성복 시집<달의 이마에는 물결무늬 자국> 中

     

     

    20121023-201505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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