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문과 산문

나희덕 <허공 한줌>外

미송 2015. 5. 5. 22:11

 

허공 한줌 / 나희덕 

 

 

이런 얘기를 들었어. 엄마가 깜박 잠이 든 사이 아기는 어떻게 올라갔는지 난간 위에서 놀고 있었대. 난간 밖은 허공이었지. 잠에서 깨어난 엄마는 난간의 아기를 보고 얼마나 놀랐는지 이름을 부르려 해도 입이 떨어지지 않았어. 아가, 조금만, 조금만 기다려. 엄마는 숨을 죽이며 아기에게로 한걸음 한걸음 다가갔어. 그러고는 온몸의 힘을 모아 아기를 끌어안았어. 그런데 아기를 향해 내뻗은 두 손에 잡힌 것은 허공 한줌뿐이었지. 순간 엄마는 숨이 그만 멎어버렸어. 다행히도 아기는 난간 이쪽으로 굴러 떨어졌지. 아기가 울자 죽은 엄마는 꿈에서 깬 듯 아기를 안고 병원으로 달렸어. 아기를 살려야 한다는 생각 말고는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지. 얼마 지나지 않아 아기는 울음을 그치고 잠이 들었어. 죽은 엄마는 아기를 안고 집으로 돌아와 아랫목에 뉘었어. 아기를 토닥거리면서 곁에 누운 엄마는 그후로 다시는 깨어나지 못했지. 죽은 엄마는 그제서야 마음놓고 죽을 수 있었던 거야.


 이건 그냥 만들어낸 얘기가 아닐지 몰라. 버스를 타고 돌아오면서 나는 비어 있는 손바닥을 가만히 내려다보았어. 텅 비어 있을 때에도 그것은 꽉 차 있곤 했지. 속없이 손을 쥐었다 폈다 하면서 그날밤 참으로 많은 걸 놓아주었어. 허공 한줌까지도 허공에 돌려주려는 듯 말야.

 

 

 

 

 

너무 늦게 그에게 놀러 간다 / 나희덕

 

 

우리집에 놀러 와, 목련 그늘이 좋아

꽃지기 전에 놀러 와

봄날 나지막한 목소리로 전화하던 그에게

나는 끝내 놀러 가지 못했다

 

해 저문 겨울날

너무 늦게 그에게 놀러 간다

 

나 왔어

문을 열고 들어서면

그는 못 들은 척 나오지 않고

이봐 어서 나와

목련이 피려면 아직 멀었잖아

짐짓 큰소리까지 치면서 문을 두드리면

조등 하나

꽃이 질 듯 꽃이 질 듯

흔들리고 , 그 불빛 아래서

너무 늦게 놀러 온 이들끼리 술잔을 기울이겠지

밤새 목련 지는 소리 듣고 있겠지

 

너무 늦게 그에게 놀러 간다

그가 너무 일찍 피워올린 목련 그늘 아래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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