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론과 칼럼

방민호 <그래도 시인은 살아 있다>

미송 2015. 7. 13. 11:09

 

1. 표절과 문단

 

과거에 오랜 고립 생활 끝에 나 스스로 만들어낸 문장이 하나 있다. ‘사람은 스스로 자신을 소외시키지 않는 한 누구도 완전히 그 사람을 소외시킬 수 없다.’ 이 문장은 내 젊은 날의 뼈아픈 경험들이 용융(溶融)되어 있는, 내 삶의 좌우명 같은 말이다. 문학은 근원적으로 보면 그 사람 혼자 하는 것이건만 사람들은 늘 착각하곤 한다. 떼를 짓고 패를 불리면 그 안에 든 자기 힘이 저절로 강해진다고 믿는 것이다. 하지만 사실 그런 것도 같다. 한국 문단의 지난 15년 세월은 패거리 문화가 지배하던 때다. 힘부림의 야만성이 그보다 더하기도 힘들었고, 그 힘의 위계서열 안에 들어가기를 간구해 마지않는 작가 군상의 비굴함, 그 자신이 볼 때 소외되고 있음이 분명한 사람을 향한 무례함이 인내의 한계를 시험하던 시대였다.

 

당신 또한 그 패당의 당사자였다고 비판을 가해 온다면 굳이 부인하고 싶지 않다. 문제는 그 힘을 어떻게 이해하는가다. 과거에 이른바 문학권력 논쟁이 유행할 때 나는 어느 누구도 힘을 아예 갖지 않은 사람은 없노라고 썼다. 이 말은, 이른바 권력을 비판하려 하는 자는 그 비판의 메스를 자기 자신을 향해 쓸 수도 있어야 한다는 뜻이었다.

 

최후의 1인으로 완전히 고립된 사람이 아니라면, 또는 그러한 작가조차도 쓸 수 있는 힘과 의지를 버리지 않고 있다면 그는 이른바 힘을 가지고 있는 것이며 그가 세상을 떠난 후에라도 그 힘은 발휘될 수 있다. 이 힘의 존재를 믿지 않고 다른 힘을 비판만 하는 것은 부정으로 세상을 창조하려는 모순을 범하는 일이 된다. 물론 이 말은 비판의 창조적 측면을 부정하자는 뜻은 아니다.

 

이 문단의 어느 ‘내’가 패거리의 힘을 빌려 가진 힘이라는 것도 궁극적으로 보면 일개 허상에 지나지 않는 것이며, 결국은 자기 자신의 진정한 힘의 문제로 환원될 수밖에 없다. 따라서 문학의 문제는 결국 ‘나’ 자신으로 귀착한다. ‘내’가 과연 시대를, 세계를, 시공의 한계를 넘어 사람들의 마음을 울릴 수 있는가. 잠시 잠깐 세상을 속일 수 있고 여러 사람을 꽤 오래 속일 수 있지만 문학사의 긴 흐름 속에서 보면 자기 실력으로 쌓지 않은 탑은 허물어질 수밖에 없다.

 

그런 의미에서라면 나는 ‘나’ 자신의 힘의 가치를 부정하지 말 것을, 자신에 관한 근원적인 믿음을 바탕으로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고 말하고 싶다. 정녕 그러할 수 있다면 소수파 또는 고립된 자기라는 것은 오늘날 한국 문단과 같은 상황에서는 휘황찬란한 훈장과도 같다. 다수파 또는 주류파, 떼를 짓고 있는 사람들은 아무리 넘보려 해도 얻을 수 없는 것이 바로 그 위치인 때문이다.

 

무엇을 빠뜨렸는가, 지금까지의 잡설에서? 바로 보고 옳게 보려는 마음의 존재가 필요하다는 사실이다. 이런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 그 마음을 버리지 않고 포기하지 않는 것이 필요하다. 마음의 명경을 갈고닦아 저 잘 알려진 공평무사심(dis-interestedness)으로 작가와 작품을 밝게 보는 사람들이 필요하다. 우리 모두 그런 사람들이 되어야 한다. 그렇게 되도록 노력해야 한다. 눈 밝은 이들이 두 사람, 한 사람만 있어도, 그가 자신이 본 것을 써놓기만 해도 우리는 궁극의 결핍에서 벗어날 수 있다. 비록 오늘 진정한 것이 나타나지 않더라도 내일 그것이 나타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미래주의자요, 고전주의자다. 현재를 회의할 줄 안다는 의미에서.

 

 

2. 

여기 그런 마음 세계를 가진 시인이 하나 있다. 그는 우스갯소리로 언제 경제사범이 될지 모르겠다고 말하면서도 《삶창》이라는 잡지 내기를 아직 포기하지 않았고, 비위 뒤틀리는 곳에 가 고개 숙이는 일은 하지 못하는 태도를 가진 사람이다.

 

《삶창》이나 《리얼리스트》 같은 잡지들이 귀한 것은 그들이 자본을 쌓아서 문학을 시작한 것도 아니요, 시장 메커니즘에 편승해서 번성하고 있지도 않기 때문이다. 그들은 창비, 문지, 문동 같은 카르텔이 서로 작가를 빌려 받고 빌려주는 시스템을 구축하고 정부기관의 지원을 독점하며 번성하는 가운데, 그러한 잡지, 출판사들은 외면해 마지않는 사람들의 삶과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또 그것을 표현해 왔다. 화려하지 않지만 그들의 존재는 그래서 빛난다.

겉으로는 문학을 표방하면서 이면에서는 이권을 밝히는 데 너무나 밝은 집단을 어떻게 신뢰할 수 있겠는가. 그들은 자신들이 아름답고 옳다고, 그래서 무엇을 하든 정당화될 수 있다고 믿겠지만 사실은 그와 다른 것이다.

 

《삶창》이나 《리얼리스트》 같은 잡지를 만드는 사람들, 고집스럽게 그런 일에 매달리는 사람들을 자본 많은 출판사들, 거기 소속된 작가들, 비평가들은 낡았다, 남루하다, 촌스럽다, 비웃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하지만 눈 밝은 이들은 안다. 그 사람들이야말로 이른바 힘을 가진 이들은 결코 가질 수 없는 진실의 추구자들이라는 사실을.

 

     

지금껏 가난하게 살아왔는데
빚더미 가득한 집 싱크대는 아직도 줄줄 샌다

나는 그 원인을, 막힌
배수구에 버린 물이 역류하는 것이라
추측은 하면서도
속수무책이다
역류하는 건 고작 구정물뿐일 테니까

가난에도 문양이 있는 법이다
지금 겪는 이 시간은
어두컴컴하게 막힌 배수구와도 닮았지만

내 심장은 꺼지지 않은 사랑이
아직 움켜쥐고 있다

가지 못한 길이 남아 있는 오늘 밤에도
꽃잎은 바람에 흔들리고
번민은 목마른 가뭄에도 우북하지만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기쁨이 내게는 있다
아침마다 꿈에서 울고 가는 새여
떠나버린 음악이 남긴 상흔에 드는 비용을
나는 계산하지 않기로 했다

다만 가난한 걸음으로 강가를 걷기로 했다
혼자만 듣는 신음을 더 앓기로 했다

— 황규관 〈가난의 변주곡〉 《서정시학》 여름호

 

이 시를 잡지에서 골라내 뽑아놓은 것은 한 달도 더 된 일이다. 그런 것이 게으른 글 탓에 묘하게도 표절 사태와 시기가 겹쳤다. 이 시를 다시 옮기며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기쁨”만으로, “혼자만 듣는 신음을”을 더 앓아야겠다고 생각하는 화자의 삶에 더 큰 성원을 보내지 않을 수 없게 된다. “내 심장은 꺼지지 않은 사랑이/ 아직 움켜쥐고 있다”라고 말할 수 있기 위해서 그는 얼마나 많은 나날을 인고해야 했을 테며 얼마나 깊은 증오의 고개를 넘어서야 했을 텐가.

이런 시에는 문장이나 지력을 넘어서는 삶 자체의 목소리가 담겨 있어 저절로 귀 기울여 듣게 되는 것이다.

 

 

3.

자신의 삶이 고통스러운데도 자기 아닌 타인들, 타자들의 삶에 관심을 기울이는 시인은 귀하다. 왜냐하면 그는 바로 그 대상에 대한 이해를 통하여 자신의 이야기를 할 줄 아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집이 없는 비둘기는 자정이 넘어도 냇가를 떠나지 못했다. 비둘기 닮은 아이들 서넛, 자식을 버린 아버지를 욕하며 싸구려 술에 취해가고, 주황빛 휘황한 가로등은 아무것도 밝히지 않았다. 위로가 사라진 세상, 가난한 연인은 서로를 연민하기엔 지나치게 야위었다. 그녀 무릎에 올린 그의 손은 이미 식어 차갑고, 무서운 속도로 내달리는 자전거는 무엇을 향해 가고 있나. 저토록 아픈 고성방가는 누구의 죄를 묻는 것인지. 잠이 사라진 여름밤, 오 층 창가에 서서 쓸쓸한 바깥 지켜보는 나를 얼룩진 달이 내려다보고, 물소리마저 숨을 죽인다.

— 홍성식 〈천변풍경〉 《작가세계》 여름호

 

위의 시에서 인상 깊은 시구는 “위로가 사라진 세상”이라는 것이다. 이 시의 화자는 “오 층 창가”라는 고도에서 아래 풍경을 내려다보고 있다. 이 고도는 아마도 시 외부의 실제 속에서는 화자가 살아가는 원룸 같은 공간을 가리키고 있겠지만, 시 안에서는 위로가 사라진 세상을 품을 수 있기에 적절한 시선의 높이를 가리킨다. 그리고 이 화자를 달이 내려다보고 있다. 이 화자는 아주 고독해서 달을 거론하지 않고는 자신의 고독을 알아줄 사람이 없는 듯 체념하고 있을 정도다. 이 깊은 고독 속에서 창 아래 천변에서 흘러가는 사건들을 내려다보는 화자는 물소리조차 듣지 못한다. 천변의 몽타주 같은 풍경들 속에서 위로 없는 세상의 표징들을 읽는 데 화자는 너무 깊이 들어갔기 때문이다.

 

 

4.

이하석 시인과 가까이서 몇 번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있었다. 유머가 풍부하시고 무엇보다 신라사에 밝으셨다. 그냥 책상에서 얻은 지식이 아니요, 산천을 다리품을 팔아가며 실증으로 얻은 앎의 체화된 깊이가 있어 두런두런 말씀들이 오가는데 앉아 있기 좋았다.

시도 깊이까지는 아니어도 더러 읽을 기회가 있었는데, 시어나 시구를 어렵게 꾸미지 않고 당신이 생각하고 받아들인 꼭 그만큼의 분량으로 읽는 이들을 피로하지 않게 하는 미덕이 있었다.
그러나 이 시인이 다음과 같은 시까지 쓰시는 것은 미처 몰랐던 것 같다.

     
 

 

사람들 마구 죽여
파묻어버린 땅에서
솟아난

저 나무들은
햇볕 강하게
쬐어도 속속들이
환해지진 않는다.
완강한 기억의 표상으로
안으로만
우거져
사랑은 켜진다

바람이
피면

전체로
제 뿌리에서 올라와
우거진 죽음을
분다

바람
자면
그 그늘
아래서,
살아 있다고
죽은 이의 자식들이
온몸 사방팔방
접는다

질문의
합동 제삿날
묵념하다 문득
올려다본다
새가 현기증을
걸어놓고

우듬지에
조기처럼,
또는 국가보안법인 양
높이
걸린 채
내려다보는,
골 아래서 날아온
검은
비닐

— 이하석 〈나무들〉 《문학청춘》 여름호

 

 

우선, 요즘과 같은 시대에 이런 내용의 시를 너무나 평온하게 쓸 수 있었음이 인상적이라 해야겠다.


이 시의 화자는 집단학살의 현장에서 거행된 합동 제삿날의 일을 시로 옮겨 놓았다. 어떤 집단학살이었을까. 아마도 6·25전쟁 중의 보도연맹 관련자 집단학살 같은 사건을 가리키고 있을 가능성이 크다. 6·25전쟁 중의 양민학살에 대해서는 일찍이 1980년대부터 문학적 주제로 빈번히 수용되어 왔지만, 보도연맹 문제는 비교적 최근 들어 재차 조명되기에 이르렀다.

 

잠시 언급하고 넘어가자면, 이 보도연맹 문제는 1948년 남북한 단독정부 수립 이후 한국전쟁에 이르는 사이, 즉 1948년 하반기, 1949년, 1950년 상반기의 역사를 이해하는 데 누락시킬 수 없는 중요한 사건이며, 문학인들의 6·25 중 월북을 설명하는 데도 꼭 필요한 매개 고리다. 6·25가 발발하자 당시 이승만 정부는 보도연맹 가입자들을 잠정적인 적으로 규정, 대규모 예방 학살을 자행했던바, 이 과정에서 억울하게 죽어간 이들이 부지기수였다. 이하석 시인은 이 집단학살의 현장을 찾아갔던 듯하다.

 

이 시는 짧은 시구를 가진 행들을 배치하여 학살 현장의 역설적인 고요와 그 현장에 선 화자의 그로테스크한 감정을 효과적으로 드러낸다. 현장의 땅속에서 솟아난 나무들은 죽음의 후예들이며 죽음의 사연을 알고 있는 목격자들이다. 그들은 말하자면 비극적인 “기억의 표상”들로서 오늘 여기 그렇게 서 있다.

 

그 나무 우듬지에 어디선가 날아온 “검은/ 비닐”이 한 장 걸려 있다. 화자는 생각한다. 저것은 희생자들의 넋을 위로하는 “조기”인 것도 같다고. 그리고 또 생각한다. 저것은 희생자들을 죽음으로 내몬 폭력을 상징하는 “국가보안법” 같기도 하다고. 여기서 시인의 현실인식이 빛난다. 이 시구 어딘가에 바야흐로 과거로 회귀해 가는 이 시대에 대한 인식이 드러나 있음이다. 이 시대는 한편으로 진실의 빛에 떠밀려 합동위령제를 지내면서도 다른 한편으로 끊임없이 폭력의 새로운 희생자들을 만들고, 이를 적시하려는 이들을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려 한다.

 

 

5.

시인이 날마다 새로워지기 힘들고 시를 거듭하며 더 깊어지기 어렵다. 절정에 이른 시인은 쇠퇴가 따르는 법이리라.

그러나 언제가 그 시인의 절정이 될지 가늠하기 어려운 시인들도 있다. 문태준이나 김기택 같은 시인, 신경림 같은 시인은 어디까지 갈지 쉽게 예측할 수 없다.

최서림 시인에게서도 유사한 인상을 받는다. 첫 시집에서 먼 고대의 이서국으로 들어갔던 시인은 오랜 시간이 흐른 지금 역사라는 것이 무엇인지 묻는 근원적인 성찰과 질문을 던진다. 역사를 말하던 많은 이들이 역사 따위는 젖혀놓은 지 오래되어버린 지금에 와서. 이런 식으로 허를 찔리면 평론하는 사람도 그 시인의 진면목을 언제 다 알 수 있게 될지 자신이 없어지게 마련일 것이다.

 

     
최서림

똑같이 포탄에 짓뭉개져도 개망초는 왜,
우리는 역사책에서 빠졌냐고 따지지 않는다.
쓸쓸히 웃으며 고개만 살래살래 저을 뿐.

 

낙동강의 등 굽은 피라미가 왜, 역사가
인간들만의 역사냐고 시비 걸지 않는다.
뻥긋뻥긋 입으로 방귀만 날릴 뿐.

 

반장선거 외엔 투표라곤 해본 적 없는
택배기사 K, 치매도 아닌데 벌써
역사라는 말이 가물가물 낯설기만 하다.

 

보들레르 닮은 비정규직 시인 C, 넝마주이처럼
역사의 쓰레기통을 뒤지고 있다.
버려진 예비군복, 완장, 쥐꼬리, 새마을담배 꽁초, 구멍 난 운동화, 모나미 볼펜, 찌그러진 양은 냄비, 폐가, 무너진 담장, 뒤집어진 돌절구, 멘소래담, 코덱스, 농약 먹고 죽은 처녀, 최루탄 맞고 실명한 좌판 아줌마의 이름을 불러내주고 있다.
중얼거리는 침묵의 소리, 가시같이 콕콕 찔러오는 작은 이야기들을 받아적고 있다.

눈에 띄지도 않을 만큼 작아서 큰 전쟁을 치르고 있다.

— 최서림 〈시인의 전쟁〉 《시인동네》 여름호

 

 

이 시를 읽고 다시 생각하니 역시 역사라는 것은 허무하다. 역사는 승리한 자들의 역사라는 말도 있거니와 이른바 역사라는 것에는 얼마나 많은 삶의 실체가 누락되어 있는가. 먼 옛날부터 역사는 제왕들의 건국기와 통치행위의 기록에 불과한 경우가 대부분이었고, 인인들은 그 ‘거대’ 역사 아래 짓눌려 존재를 망각당해야 했다.

 

오늘날은 상황은 완연히 달라졌지만 역사를 독점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이들의 착각은 계속된다. “보들레르 닮은 비정규직 시인 C”는 누구인가? 그는 “넝마주이처럼/ 역사의 쓰레기통을 뒤지”며, “침묵의 소리” “작은 이야기들”을 받아적고 있다.

 

나 또한 가능하다면, 이 시의 화자가 말하듯 “눈에 띄지도 않을 만큼 작아서 큰 전쟁을 치르고 있”는 그 시인처럼 쓰고 싶다. 하지만 이런 숭고한 작업은 위선이 없는 이들에게나 가능한 일이다. 내세워야 할 대상이 없거나 작은 이들만 이런 일을 행한다. 그런 이들은 역사 따위는 아무래도 좋고 진짜 “전쟁”이 문제인 것이다.

 

 

6.

이 시인은 일상 속에서 발견되는 물상들을 시적 소재, 주제로 소화하는 데 최적의 실력을 보여준다. 이런 의미에서 나는 이 시인을 제2의 김기택이라 명명해 본다. 일상을 그리는 것만으로는 부족하고 그 표면 아래로 뚫고 들어가 근본을 잡아내 드러내는 실력, 이 시인은 이런 시선의 힘을 보여준다. 다음의 시는 그 하나의 사례다.

 

     
 

늘어난 어제가 내려주고 간 거야
탄력성 헤어진 거리를 지나온
구멍 난 시간들이 허리에서 발끝까지
감추고 있던 허물어진 여기와 거기를 보여주네
완전한 수평이 되었지만
어디로 나가는 통로인지 알 수 없어
은밀하게 바라보는 앞과 뒤
양면의 표정들만이 겹쳐져
아슬아슬 뼈대 없이 이탈한 밤을
구분 없이 뒤집고 간 거야
그 바닥에서 경계를 풀어버린 신축성 너머
하체 힘 밖으로 되돌아갈 수 없어
설풋 잠든 그녀를 흘러나와
가볍게 어제를 밑줄 그어 놓았네

— 권성훈 〈팬티스타킹〉 《서정시학》 여름호

 

 

이 시가 그리고 있는 것은 길바닥에 떨어져 있는 팬티스타킹이다. 우스꽝스럽다고도 그로테스크하다고도 말할 수 있는 거리의 팬티스타킹을 시인은 이 시대의 삶의 양상의 문제로 날카롭게 포착한다. 그것은 “늘어난 어제”의 기억이자 “탄력성 헤어진 거리”의 표징이다.

 

일찍이 이상은 소설 〈날개〉에서 미쓰코시 백화점 위에서 내려다본 “회탁의 거리”의 피로를 갈파했었다. 그처럼 이 시인은 하나의 폐품에 불과한 버려진 팬티스타킹에서 피로와 권태와, 나아가 출구 없음을 본다. 뫼비우스의 띠처럼 겉과 속을 구분 지을 수 없는 현대적 삶의, 표피성의 심연을 본다.
과연 이 심오한 “밑줄”을 거리에 풀어놓고 홀연히 모습을 감춘 그 여인은 누구일까.

 

 

7.

지금의 시단에 진정한 페미니즘 여성 시인을 둘 꼽으라면 한 사람은 김이듬이요, 다른 한 사람은 지금 내가 인용하려는 김선향이다.

물론 많은 훌륭한 페미니즘 시인들이 있었고 앞으로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지난 1년 이상 월간지, 계간지에 간단없이 등장하는 여성 시인들의 시를 살펴본바 잘 쓰는, 좋은 시를 쓰는 여성 시인들은 확실히 더 있으나, 시마다 자신의 여성됨을, 여성적 글쓰기로서의 시임을 자각하고 창작 방향을 고민하는 시인은 이 두 사람이었다. 다음의 시는 그 하나의 사례다.

 

     
 

생 오를랑,* 그대는 수술장을 무대로 바꾼다. 관객은 전 지구인. 배경은 바흐의 마태수난곡. 심장이 허약한 자, 노약자, 임신부는 관람을 삼가하라고 경고하는 그대.

의사는 수술복 대신 무대의상을 입고 그대의 지시대로 움직인다. 그대는 여주인공이면서 연출가. 부분마취를 한 그대는 은빛 십자가 마이크를 쥐고 생중계를 시작한다.

그대는 다이아나의 눈, 모나리자의 이마, 비너스의 턱, 프시케의 코를 주문한다. 의사는 그대의 요구대로 뽑고 찢고 파내고 깎는다. 메우고 덧대고 벗기고 펴고 이식하고 도려낸다. 갈고 자르고 벌리고 집어넣는다. 붙이고 심고 좁히고 세우고 잡아당기고 빨아들인다. 그대는 예술을 위해 피를 철철 쏟는다.

여성의 美는 남성에 의해 구축된다.

그대는 이 말을 찢어버리고 조롱한다. 피와 살을 희생제물로 바쳐 그대의 육체는 다시 태어난다. 다이아나도, 모나리자도, 비너스도, 프시케도 아닌 세상 어디에도 없던 생 오를랑으로. 완벽한 미모 대신 기이하고 낯선 그대로. 산산이 부서져버린 기대에 그대는 흡족하여 마녀처럼 웃는다.

이마에 돋아난 두 개의 아름다운 뿔을 만지는 그대여. 타고난 것에 맞서 투쟁하는 생 오를랑이여.

 

* 생 오를랑: 프랑스의 행위예술가.

 

— 김선향 〈성형 퍼포먼스〉 《작가세계》 봄호

 

자신의 육체를 하나의 재료(mat-erial)로 다루어 예술로 승화시키는 퍼포먼스.
이 중에서도 독특한 것은 키스 해링의 그래피티 작업. 이것을 나는 오스트리아 빈의 쿤스트할레에선가 보았다. 비디오 속의 그는 빈방에 팬티만 입고 들어가 방 전체를 그래피티의 연속무늬들로 채워나갔다. 퍼포먼스는 회화나 조각의 평면성과 정지성을 헤치고 미술에 역동성과 시간성을 부여하려는 시도다.

 

이 시인이 패러디화하고 있는 생 오를랑은 자신의 육체를 재료로 삼아 성형수술의 부조리를 역설적으로 드러낸다. 그녀는 “여성의 미(美)는 남성에 의해 구축된다”는 도그마를 자신의 육체로써, 그것을 스스로 변형시켜 가는 명령으로써 전복한다. 그리고 그것을 다시 쓰기 함으로써 이 시인은 생 오를랑의 작업을 소재로 삼는, 비평적인 특질의 시를 구축한다. 여기서 시는 페미니즘 비평이 된다.

 

그녀에 따르면 생 오를랑은 남성에 의해 자신에게 (남성적 담론과 시선에 의해) 허여된 한도를 넘어서는 악(“이마에 돋아난 두 개의 아름다운 뿔”)으로써 남성 중심적 여성미의 부조리를 드러낸다. 그럼으로써 생 오를랑은 (남성 중심적 사회에 의해) “타고난 것”으로 간주되는 여성적 아름다움에 맞서 투쟁한다. 

 

 

방민호 / 문학평론가·시인. 서울대 국문과, 동 대학원 졸업. 1994년 《창작과 비평》(평론), 2001년 《현대시》(시)로 등단. 저서로 《비평의 도그마를 넘어》 《납함 아래의 침묵》 《문명의 감각》 등과 시집 《나는 당신이 하고 싶은 말을 하고》가 있다. 유심작품상, 김환태평론상 등 수상. 현재 서울대 국문과 교수.

 

 

 

이제는 완벽한 것을 바라지 않는다. 기대하는 부분이나 만족하는 부분이나 약간, 그러니까 누구 말마따나 51프로만 그렇다 해도 좋다 쪽으로 손들려 한다글도 마찬가지도입 부분에서 석 줄만 무사히 통과되면 읽기를 작정한다. 읽다 군데군데 닿는 한 구절이라도 있으면 , 고마운 만남, 그런다. 완벽이란 바라는 게 아니었다. 아니 바라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굳이 오늘 나는 첫 줄에 어설픈 문장을 띄웠다. 왜 그랬나메르스와 표절로 시끄러웠던 유월. 유월은 갔고, 유월 끝에서 접했던 어느 신문사 이 아무개의 허난설헌 표절문제에 관한 글까지도 페이지를 넘겼다. 넘겼으니진정이 되었으니 말하는 건데, 나는 그 글을 읽고 무진장 짜증을 냈다. 살다 살다 이런 글은 또 처음이네, 놀라서 옆 사람까지 괴롭혔다. 박학다식으로 치장한 글, 그러나 말하려는 주제가 무엇인지 끝끝내 헤아릴 수 없는 글누군가를 옹호하자는 건지 누군가를 해코지 하자는 건지, 그냥 물 타기 하고 끝내자는 건지, 도통 분위기에 맞지 않는 그런 글을 평소 내가 신뢰하던 신문사의 소위 논설위원이란 사람을 통해 읽다니, 오호한탄이 나올 수밖에어쨌든 칠월, 나는 다시 또 표절로 시작되는 글을 읽는다아직도 약간은 공감을 두게 되는 사람, 그 사람의 말이라서 귀를 갖다 댄다시간 아깝단 생각이  들어서 천만다행이다. 51프로 공감이지만 정말 100점을 주고 싶은 평론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