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론과 칼럼

임헌영 <8·15 전후의 문단풍경>

미송 2015. 8. 15. 08:19

 

백범과 금동의 8·15

 

   

임헌영
문학평론가

풍경 하나.
1945년 8월 10일 밤, 중국 산시성(陕西省) 주석(主席)이자 국민당 중앙감찰위원이었던 쭈샤오저우(祝紹周)의 시안(西安) 저택에서 만찬을 끝낸 백범이 객실에서 수박을 먹으며 담화하던 중 전화 소리가 울렸다. 주석은 놀라듯 전화실로 급히 들어가더니, 뒤이어 나오며 “왜적이 항복한답니다.”고 하였다. 김구는 그 순간의 소회를 이렇게 적었다.

 

이 소식은 내게 희소식이라기보다는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지는 일이었다. 수년 동안 애를 써서 참전을 준비한 것도 모두 허사로 돌아가고 말았다. (중략) 지금까지 들인 정성이 아깝고 다가올 일이 걱정되었다. 즉시 축씨 사랑을 출발하여 차가 큰길을 지날 때 벌써 군중은 인산인해를 이루었고, 만세 소리는 성내를 진동하였다.

 

독립군이 국토에 진격하지 못한 상태에서 맞게 된 조국의 미래상-외세 의존, 민족주체성의 혼란, 이념적 갈등이 야기할 대립과 분열상- 백범의 뇌리를 스쳤을 이런 우려는 8·15 이후 한국의 미래상에 다름 아니다. 강탈당해 없어진 나라를 두고서도 서로가 그토록 피 터지게 싸웠던 지경이라 이제 나라를 찾게 되면 그 추악한 권력의 쟁투가 얼마나 더 치열해질 것인가는 인문학적인 상상력을 가진 사람이라면 누구나 가질 법한 역사의 축도다. 그 역사적인 대격변을 맞아 이런 근심을 미리 한 인물이 몇이나 될까.

 

 

풍경 둘.
1945년 8월 15일 오전 10시, 작가 김동인은 조선총독부 정보과장 겸 검열과장(阿部達一)을 만나 친일어용 단체 조선문인보국회(朝鮮文人報國會)보다 더 효과적으로(친일을 수행할) 작가단을 결성할 테니 허가해 달라고 간청하고 있었다. 과장은 절대 반대였다. 소련까지 참전한 이 마당에 긁어 부스럼 만들지 말라고, “책상을 두드리며 그에게 육박”했다고 김동인은 썼다. 대화 중 전화가 걸려오자 과장은 “응? 그건- 두 시간만 더 기다려. 단 두 시간뿐이나 절대로 미리 말할 수 없어. 응, 응, 그러구 예금이나 저금 있나? 은행에구 우편에구 간에 예금이 있거든 홀랑 찾아내게. 방금 곧- 열두 시 이전에.” 여기까지 듣다가 김동인은 바로 12시 방송이 항복임을 알아채고 뛰쳐나와 전차를 탔다. “펑펑 쏟아지는 눈물을 감추기 위하여 다른 승객들에게 외면을 하고도 눈을 앓는 체 연해 눈을 비비었소.”

 

김동인의 눈물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이었을까. 행여나 그간의 친일행위에 대한 참회를 담은 것인지 아니면 그런 내면적인 성찰보다는 민족의 한 구성원으로서 본능적인 환희였을까. 만약 후자였다면 조금 전까지 했던 자신의 행위는 역사적으로 어떤 평가를 받아야 하는지에 대한 일말의 회한이라도 있었을까. 그저 생각나는 대로 글을 쓰고 좋은 게 좋다는 식으로 시류에 순응하며 살아온 것이 무슨 잘못이냐, 어쩔 수 없이 그런 행위를 했지만 마음속으로는 민족을 잊은 적이 없다고 강변하고 싶었을까.

 

우리에게 8·15는 이렇게 다가섰다. “이 해방된 감격/ 이 공통된 환희”(김광섭 〈속박과 해방〉)이기도 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차라리 “나면서부터 일본인인 우리 같은 사람의 처우를 어떻게 해줄는지”(김동인 〈학명수첩〉) 극히 염려스러운 내심이었던 경우도 적지 않았다.

 

광복 70년을 맞으면서도 이런 두 풍경은 근본적으로 별로 바뀌지 않은 것 같다. 작금 동아시아의, 특히 일본의 동향은 백범의 우려를 능가할 정도로 위기를 재현시키고 있으며, 국내의 일부 정치 세력과 지식인들은 너무나 당당하게 교학사 역사 교과서를 비호하고 있다. 김동인의 행위를 연상시킬 충분조건들이 아닐 수 없다.

 

해방이 도둑처럼 왔다는 함석헌의 말은 일제 식민통치 아래서 편안하게 살았던 사람들에게는 들어맞는 말이겠으나, 독립을 위해 각고의 투쟁을 했던 인사들에게는 모욕적인 비난일 수 있다. 감옥에서 광복절 이튿날 풀려난 김상훈(金尙勳) 같은 시인이 맞았던 해방과, 바로 그 시각에 서울 근방에 B29를 막는 방비 공사용 자갈을 채취하는 양주군 진건면 사릉리(현 진건읍) 앞 개울에 나갔다가, 근로보국대에 동원되었던 사람 상당수가 안 나온 데다 감독하는 일군 병사도 보이지 않자 웬일이냐고 궁금해하던 중 어제 일본이 항복했다는 소식을 처음 들었던 이광수가 맞았던 해방은 다를 수밖에 없다. 일제가 2백 년은 갈 것으로 예상했던 미당이나 춘원 같은 문학인에게 해방은 도둑처럼 왔을 것이나, 김상훈에게는 역사적인 필연의 승리였을 터이다.

춘원과는 다른 입장이었으나, 역시 낙향해 있던 철원에서 ‘상경하라’는 전보를 받고 해방 이튿날 서울로 향했던 이태준에게도 해방은 도둑처럼 왔다고는 할 수 없을 것이다.

 

“소가 열 필이 와서 끌어도 이광수는 이 자리를 안 떠날 것이오.”라면서 해방이 안겨다 준 충격을 낙향 생활로 완충지대를 만들려 했던 그는 겉보기로는 농사꾼 같은 은둔생활이었으나 미구에 닥칠 환란을 예견하고 재산 보호를 위해 아내와 협의 이혼(1946. 5. 31)했는데, 반민법이 그렇게 허망하게 허물어질 줄은 아마 예측하지 못했었던 것 같다.  

 

 

일장기에서 성조기로 

광복절이면 해마다 언론매체에 등장하는 만세 부르는 군중 사진에 익숙하다. 그런데 이 장면은 엄밀하게 따지면 8·15의 것이 아닌 그 이튿날의 것으로, 정작 8월 15일 천황의 들릴 듯 말 듯했던 항복 방송은 라디오도 귀한 데다 들어봤자 그 의미를 제대로 파악한 한국인은 소수였다는 게 진실에 가깝다. 안타깝지만 8·15 당일에는 만세조차 제대로 부르지도 못했던 처지였다.


한 증언에 의하면 징용 거부로 투옥되었던 어떤 투사는 8월 16일에도 석방은커녕 안동 형무소에서 대구 형무소로 이감되었다고도 한다.

물론 다들 이런 바보는 아니었으나 그게 다수였고 문학인들도 대개는 그 다수에 속했다.


“8월 15일 서울 거리에는 만세 소리가 울려 퍼지고 태극기가 물결치듯 휘날렸다고 떠벌리지만, 다 거짓말”이라고 문제안(당시 경성방송 취재기자)은 증언한다. “사람들이 독립이 되었다는 사실, 일본이 망했다는 사실을 제대로 인식한 건 그 날 밤 정도”인데, 그건 “천황의 방송을 몇 번 되풀이”했고, “우리말로도 방송하고 해설도” 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한국방송답게 방송”을 한 건 만 하루(16일)뿐, 다음날부터는 도로 일본군이 전 언론기관을 장악, 일인 간부들이 그대로 지배하고 있었다. “참다운 한국방송은 1945년 9월 9일 오후 5시부터 시작됐다.”

 

어떻게 9월에는 가능했을까.

1945년 9월 8일, 9만1천8백여 미군이 인천을 거쳐 상경했다. 9월 9일 오후 3시 45분, 총독부 제1회의실에서 일본과 미군 사이에 항복문서 조인식이 열렸다. 미국 측 서명자는 킨케이드(7함대 사령관) 제독과 하지 중장, 일본 측 서명자는 조선의 마지막 총독 아베 노부유키(阿部信行), 고츠키 요시오(上月良夫, 제17방면군 사령관), 야마구치 기이치(山口儀一, 진해경비사령관)였다. 바로 이어서 미 육군 24군단 7보병사단 17대대 1중대 소속 8명의 병사가 총독부 청사 앞마당의 일장기를 하강, 성조기를 게양했다. 

 

이런 경위를 전제로 다시 문제안의 증언록을 보면 9월 8일 서울에 도착한 미군은 그날 밤 헤이워드 중령을 방송국에 파견, 서툰 일본말로 “이제부터 내가 방송국에서 제일 높은 사람이다. 내 말을 들어라”라는 데서 일본군 경비와 방송국 내의 일인 임원들이 물러나고 한국인의 방송이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방송만이 아니다. 첫 한글신문이 나온 게 9월 19일(〈해방일보〉), 첫 잡지가 나온 게 10월(《선봉》), 첫 단행본은 9월(추산인 편 《조선인민에게 고함》)임을 감안하면 식민통치 아래서 민족주체성이 얼마나 철저히 괴멸당했던가를 유추할 수 있을 터이다. 이러고도 해방을 맞았다고 할 수 있겠느냔 회의가 솟는다. 보통 사람들이 할 수 있는 건 고작해야 일장기를 급히 개조한 태극기를 들고 만세를 부르는 것이었으리라.


8·15가 왔어도 민족의 제값을 제대로 찾지 못했던 역사의 실체는 망각한 채 이날을 ‘건국절’로 삼자는 요란한 민족의식의 빈 수레들이 거리를 활보하는 게 광복 70년을 맞는 오늘의 풍경이 아닌가.

 

 

광복 후의 검열과 문학 

광복 직후 각종 문화행사에서 축사는 평론가 이원조, 시낭송엔 유진오(兪鎭五)라는 정평이 나 있었다. 그렇게 된 데는 학병동맹 피습사건의 희생자 추모행사(1946. 2. 25)에서 시 〈눈 감으라 고요히〉를 낭독하여 획득한 명성에 이어 수재구제 문예강연회(1946. 7. 1)에서의 〈장마〉, 국치 기념 문예 강연회(1946. 8. 29)에서의 〈38 이남〉 등 낭독의 관록을 쌓았기 때문이었다.

 

그로부터 사흘 뒤인 1946년 9월 1일, 국제청년데이(International youth day) 기념행사가 훈련원(전 동대문운동장)에서 열렸다. 1915년 10월 3일에 제1회 대회를 연 국제청년데이란 진보적인 청소년들의 세계적 조직으로 이듬해부터는 9월 첫 일요일에 하던 행사를 1932년 이후 9월 1일로 바꿔 실시했다. 한국에서는 8·15 후 처음 열린 이 청년축제에 10만 명이 운집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이날 식전에서는 평론가 김오성(金午星)이 구속되는 등 이미 파란이 예상되었다. 시인 유진오는 축시 낭독을 위해 특별초청을 받았다.

 

문장 한 토막씩을 띄어가며 격정적으로 특유의 몸짓을 해가며 청중을 사로잡는 것으로 이미 명성이 나 있던 유진오로서는 가장 많은 독자 앞에 서게 된 기회이기도 했다. 시 〈누구를 위한 박차는 우리의 젊음인가〉를 낭독한 그는 참석자들로부터 갈채를 받았지만, 행사 이틀 뒤인 9월 3일 미 군정 포고령 위반으로 피검, 광복 후 문학사의 첫 필화사건 주인공으로 부각된다. 10월의 군사법정에서 이 시인은 1년 징역형을 선고받아 약 9개월 복역한 뒤 석방(1947. 5)되었다. 시집 《창》(1947)의 ‘발(跋)’에서 “시인이 되는 것은 급하지 않다. 먼저 투철한 민주주의자가 되어야겠다.”라던 이 시인의 투쟁성은 해방공간의 홍역으로 이후 한국 분단문학사의 운명을 예시해준다. 창작의 자유를 근대문학의 출발선으로 보는 유럽과는 반대로 식민 통치 아래서 검열받는 체제를 근대문학으로 잡아온 풍속도가 8·15 이후라고 달라지지는 않았다.

 

1947년 11월, 별들이 차갑게 빛나는 쌀쌀한 밤에 서른아홉 살로 당대 혁명문학의 기수였던 임화는 한 청년 안내자를 따라 38선을 넘어가고 있었다. ‘도대체 나는 어떻게 되는 걸까?’란 운명에의 불안감과 혁명에의 기대감이 교차하는 가운데서 그는 홀연히 비장한 시적인 이상을 잠시 품어 보았다.

임화는 지금 이곳을 자유스런 입장에서 걸어보고 싶었다. 대낮이라면, 이 주변의 경치가 얼마나 아름다울까? 그는 전원을 좋아했다. 가난한 농가가 여기저기 점점이 흩어져있는 풍경을 인간적인 시로 노래하고 싶다. 그야말로 학대받으며 살아온 민족의 시를 황혼의 빛깔 속에서 노래하고 싶은 것이다. 혁명이라든가, 저항이라든가 하는 문구를 일체 쓰지 않고 마음속에서 우러나오는 시를 쓰고 싶다……

 

이 문제 많은 오류투성이 소설은 임화 연구에 반드시 읽어야 할 작품이면서도 현혹되어서는 안 되는 야누스적인 측면을 간직하고 있다. 38선을 넘어갈 때 시인의 심경을 이 소설이 얼마나 진솔하게 포착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적어도 이 장면은 설득력을 지닐 수 있을 것 같다. 남한에서 좌절당한 혁명의 꿈을 안고 피신 겸 혁명의 지속과 재충전을 위하여 식구들조차 버려둔 채 넘어선 38선은 그에게 파란만장했던 인생의 역정을 되돌아보게 했을 터이다.

 

임화에게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최고재판소 군사재판부’가 사형을 언도한 것은 1953년 8월 6일. 그 이후 그의 문학은 남북한에서 다 금지된 영역이었다. 진정한 민족통일문학은 임화의 객관적인 평가에서 비롯된다고 하겠다.

 

친일의 얼룩이 채 지워지지 않은 상태에서 임화가 1945년 8월 17일 원남동 어느 정육점 2층에서 김남천, 이원조, 이태준과 만난 게 8·15 직후 문학단체의 첫 출발이 된다. 이내 종로 한청빌딩에 나붙게 된 조선문학건설본부-조선문학가동맹은 그 임원진이 어떻게 바뀌었든 실질적으로는 임화의 정치적 의도에 따라 운용되었음을 부인할 수 없다. 사실 8·15 뒤 임화는 엄청난 행사 때문에 그 명성과는 달리 창작활동은 많은 편이 아니었다. 더구나 비평 분야에서는 그 격심한 순수, 참여 논쟁에 끼어들 여유조차 없었다.

 

임화에게 1945년 8·15부터 1947년 11월 삼팔선을 넘어서기까지의 2년여 세월은 그의 일생에서 가장 열렬한 정치 투쟁기였을 것이다. 이 시기에 그는 남로당계 정치노선에 따라 일체의 문학 활동을 그 실현 수단으로 일치시켰음을 부인할 수 없다.

 

8·15 이후 남한의 미 군정 통치 3년은 크게 보면 여운형, 박헌영, 이승만, 김구 등의 정치적 대립과 혼란으로 접근할 수 있다. 이들은 과연 외세를 배격하고 민족 주체성에 입각하여 민주주의와 통일, 복지국가를 실현하고자 얼마나 깊은 충정과 열정으로 임했을까. 미 군정으로서야 오히려 그런 충정이 없이 서로가 대립하여 갈등, 분열하기를 얼마나 바랐던 것일까.

 

정치인만 그랬을까. 문학인도 마찬가지였다. 일제 식민지 시대에 자신이 살아왔던 행적에 따라 문학인들도 각자도생에 분망하여 민족이니 조국이니 하는 걸 진지하게 고려할 여유가 없었거나, 일부 선량한 문학인들은 그런 거창한 쟁점을 고뇌하기에는 인문사회과학적인 상상력이 모자라서 아예 자연파나 인생파로 기울어버리기도 했다. 몇몇 선지적인 문학인이 있었지만, 그들조차도 특정 정파에 휩쓸리지 않을 수 없었다.


임화는 남로계로 분류된 혁명 문학인으로 낙인찍혀 버렸다. 그와는 달리 리기영, 한설야 등 ‘프로예맹’파는 임화보다 먼저 월북하여 북로계의 정책에 동조했던 터라 임화가 월북했을 때는 이미 그의 운명은 더더욱 ‘남로계’일 수밖에 없는 처지였다.

 

 

정치권력에 핍박받는 문학적 상상력

질풍노도의 시대에도 시는 존재하는가. 자료에 의하면 미 군정기 3년 동안 발간된 시집은 90여 종. 이 중 문학사적으로 검증받을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은 불과 50여 종이나 될까. 식민통치로부터의 해방이라는 구호와는 달리 미 군정은 일제하의 각종 규제에 못지않게 꽤나 까탈스러운 출판검열 조항들을 설정했다. 1946년 5월 4일 공포된 법령 제72호는 출판물 검열의 기준이기도 했는데, 그 제1조는 “군정 위반에 대한 범죄는 1945년 9월 7일부 태평양 미국군 총사령부 포고 제2호 또는 현금까지 공포된 법령 외 좌와 여히 규정함”이란 서두 아래에다 82개 항목의 범법사항을 예시하고 있다. “전염화류병을 가진 부녀가 주둔군인에 대한 성관계의 유혹” 같은 항목에 이르면 화류병이 없는 부녀자는 아무래도 좋다는 해석부터, 대체 그 시절에 적극적인 성적 유혹으로 윤리의식을 어지럽힌 장본인은 어느 쪽이었을까 하는 어리석은 의문도 생긴다.

 

이렇듯 까다로운 군정의 검열에서도 합법적으로 출판되었던 시집이 정부수립 이후 납·월북 문인이란 이유로 금지 조처가 내려진 게 30여 종에 이른다. 말하자면 일제 식민시기의 검열이 미 군정기에도 그대로 존속하다가 단독정부가 들어선 1948년 이후에는 더욱 가혹한 금서 조치로 변질한 것이다. 식민 통치 아래서도 널리 읽혔던 문학작품이 8·15 이후에 판금당했다는 사실은 바로 우리가 불렀던 만세가 무엇을 위한 것이었던가를 되묻게 한다.

 

미 군정 아래서 시집이 판매금지당한 것은 임화의 《찬가(讚歌)》가 그 제1호이자 마지막이었다. 《찬가》는 백양사로부터 1947년 2월 10일 초판 발간되어 관례대로 공보부에 납본했었는데, 그로부터 거의 두 달이 지난 3월 말경 말썽이 나기 시작했다. 이유는 이 시집 51쪽에 실린 〈깃발을 내리자〉란 시였다.

 

“노름꾼과 강도를/ 잡던 손이/ 위대한 혁명가의/ 소매를 쥐려는/ 욕된 하늘에/ 무슨 깃발이/ 날리고 있느냐// 동포여!/ 일제이/ 깃발을 내리자”고 화두를 잡은 임화는 이 시에서 “가난한 동포의/ 주머니를 노리는/ 외국 상관(商館)”과, “살인의 자유와/ 약탈의 신성이/ 주야로 방송되는” 것이 당대적 현실이라며 후렴으로 “동포여/ 일제이/ 깃발을 내리자”고 세 번이나 반복한다.

 

이 문제의 시가 처음 발표된 것은 〈현대일보〉 1946년 5월 20일 자 제2면이었다. 기존 논문이나 자료들은 이 시가 마치 19일에 발표된 것처럼 쓰고 있는데, 그것은 발표 당시 “1946. 5. 19”라는 시 제작 날짜를 명기한 데서 연유한 듯싶다. 그러니까 임화는 이 시를 쓰기가 바쁘게 얼른 당대의 대표적인 이론가의 한 사람이자 문학평론가였던 박치우(朴致祐)가 발행인이고 작가 이태준이 주간으로 있던 〈현대일보〉(7월 1일 자로 주필 겸 편집국장에 평론가 이원조, 정리위원에 평론가 김병규로 바뀜)로 갖다 주었고, 신문사 측은 기사문보다 한 급수 더 큰 활자로 보기 좋게 제2면 가운데에다 상자로 게재했다.

 

이 작품은 시집 《찬가》에 실린 것을 그대로 인용, 연구하고 있는데, 원문과는 미묘한 차이가 있다. 원문에는 제목 〈旗ㅅ발을 내리자!〉에서 보듯이 느낌표가 붙어 있고, “가난한 동포의/ 주머니를 노리는/ 외국 商館의/ 늙은 종(奴隸)들이”로 되어 있으나 시집에서는 괄호 안의 “노예(奴隸)”가 빠져 있다.

 

이 시집에는 제1부에 8·15 이후의 작품 15편, 제2부에는 첫 시집 《현해탄》(1938) 이후 일제하에 쓴 7편이 실려 있다. 5월 24일 수도관구 경찰청 사찰과가 이 시집을 출판한 백양당 사장을 호출하여 문제의 시 삭제를 지시하자 이에 항의하는 성명서가 잇따랐다. “공보부에 납본된 출판물이라 할지라도 그것이 군정 반대나 불온한 선동이나 풍기를 교란하는 내용일 때에는 경찰은 적발하여 검찰청으로 고발할 수 있는 것이다.”라는 것이 기자단을 향한 장택상 경찰청장의 해명이었다.

 

7월 18일, 시인과 발행인은 경찰청으로부터 검찰로 불구속 송치되었는데, 8월 10일 문제의 시만 삭제하고 출판해도 좋다는 결정이 내려지는 것으로 시집 《찬가》 필화사건은 형식적으로 끝나버리긴 했지만 권력이 문학에 간섭하는 풍토는 8·15 이후에도 전혀 달라지지 않았다.

 

1948년 8월 15일 정부수립부터 1950년 6·25까지 발간된 창작시집은 대략 60권 정도인데, 이 중 1951년 관계당국에 의하여 월북자로 분류된 시인의 것이 10여 권이고, 문학 애호가들이 이름쯤은 알 수 있는 시인이 30여 명, 나머지 20명가량은 역사의 망각지대로 묻혀버린 시인들이다.

한국 현대문학은 그 후 순수문학 정립기(1948~1950)를 거쳐, 종군문학기(1950. 6. 25 ~1953. 7. 27), 전후문학기(1953~1960), 사월혁명 전후(1960~1961)를 맞는다.

 

사월혁명의 열기는 5·16 군사쿠데타로 퇴화되어 제1차 군부독재(1961~1979)에서 제2차 군부독재(1980~1993)로 이어진 30여 년에 걸친 군부독재를 거쳐 왔다. 그 뒤 문민정부에 이은 민주화(1993~2008)가 이명박 정권(2008~2013)을 거쳐 현재에 이르고 있다.

 

정권이 문학과 무슨 관계가 있을까. 불행하게도 한국문학은 근대 이후 정치적 압박이 문학적인 상상력을 옥죄어 왔으며 이런 현상은 8·15 이후에도 여전하다. 문학이 정치권력과 관련이 없어질 때라야 진정한 현대문학은 창출될 수 있을 것이다. 


  
 임헌영/ 문학평론가. 1941년 경북 의성 출생. 중앙대학교 대학원 국문과 졸업. 1966년 《현대문학》으로 등단. 저서로 《변혁운동과 문학》 《문학과 이데올로기》 《분단시대의 문학》 《문학의 시대는 갔는가》 《창조와 변혁》 외 다수. 한국문학작가상(평론 부문), 편운문학상, 불교문학상 등 수상. 현재 민족문제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