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문과 산문

마종기 <저녁 올레길>

미송 2016. 3. 26. 09:35

 

 

 

 

저녁 올레길 / 마종기


여기서부터는 내가 좀 앞서서 갈게.

오래 걸어서인지 다리가 아파오지만

기어이 떠나려는 노을을 꼭 만나려면

무리를 해서라도 빨리 가야겠어.

모두들 내 시간은 얼마 안 남았다니까.


함께 걸어주어 고마웠어.

덕분에 힘들이지 않고 정신없이 걸었지.

가끔은 어디어느 방향인지도 잊은 채

당신과 길이 있어서 걸었던 건지. 오래전

남의 길이 되겠다고 한 나를 용서해줘.

누가 감히 사람의 인도자가 되겠다니!


꽃을 흔드는 미풍이 내 주름살까지 펴주네.

내 옆의 저 장미는 피는 이유를 알 만도 한데

길 건너 저 풀은 왜 흔들리는지

그래, 나는 부끄럽게도 모르는 게 너무 많아.

신의 은총이거나 자연의 거대한 힘, 그중에서

오직 하나만이 진리라는 것도 나는 모르겠어.


나비가 길목에서 기다린다고 했니?

나는 왜 나비와의 약속을 기억하지 못하지?

부드러운 네 표정도 한꺼번에 다가오는데

저녁 그림자 어느새 내 올레길을 덮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