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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요일 아침 십대 미소년이 구찌 옷을 보려고 들어왔다
나 앉은 녹색가게 창가 낙엽과
나만의 디자인이길 바라는 소년의 빠알간 입술과
나의 말끝에 대답을 달고 나가는 소년을 보며
남자가 예쁜 건 참 신비한 일이야 중얼거렸다
그날 저녁 일부러 걸으면서 낙엽을 만졌다
나뭇잎들 내가 나로부터 멀어져 온 것처럼 뒹굴고 있었다
지나간 당신 이야기를 듣는 건 솔직히 지겨워
시체 썩는 냄새 같다니까 나는 모든 못된 말을 밤새 지우며
서른 살부터 치주염을 앓아온 애인에게
전화한 일을 반성한다
수박 줄무늬 위에 밑줄 긋듯 낙하하는 잎들
현악줄을 끊어버리고 자각자각 밟는 길
꾹꾹 눌러쓴 문장들이 만인의 창가에 흩날린다
낡아진 잎들은 초라하여서 서성거리게 만드는 길은
나를 더 직립하게 할 것 같다
잠들면 죽은 듯 사라지는 여자처럼
가을은 그리 쉽게 떠날 것 같지 않다.
2010년 구월 즈음에 썼던 시를 일부러 찾아 퇴고해 본다. 며칠 전 친구의 아들 문준현이가 동생 세린이와 어버이날 선물 동영상을 찍은 걸 보았다. 말은 하지 않았지만, 준현이를 처음 본 그 날 내가 저 시상을 떠올렸다는 걸 기억한다. 어제는, 시인 문태준을 연상하며 문현준이라고 하자 그녀는 얼른 교정을 했다. 나는 애들의 이름을 거꾸로 부르거나 앞에 있는 애 얼굴도 안 보고 다른 애 이름으로 호칭한다. 종종 치매증상을 보인다. 어쨌든 그 아이는 이제 다 커서 나의 둘째아들 나이가 된 듯 하다. 입술에는 아무것도 안 바른다는데, 원래부터 그렇게 빠알간 입술이라니 부럽다. <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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