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읽은 시

최영미 <서른 잔치는 끝났다>

미송 2016. 5. 18. 22:41

 

 

 

 

 

서른 잔치는 끝났다 / 최영미

물론 나는 알고 있다
내가 운동보다도 운동가를
술보다도 술 마시는 분위기를 더 좋아했다는 걸
그리고 외로울 땐 동지여! 로 시작하는 투쟁가가 아니라
낮은 목소리로 사랑노래를 즐겼다는 걸
그러나 대체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잔치는 끝났다
술 떨어지고, 사람들은 하나 둘 지갑을 챙기고 마침내 그도 갔지만
마지막 셈을 마치고 제각기 신발을 찾아 신고 떠났지만
어렴풋이 나는 알고 있다
여기 홀로 누군가 마지막까지 남아
주인 대신 상을 치우고
그 모든 걸 기억해내며 뜨거운 눈물 흘리리란 걸
그가 부르다 만 노래를 마저 고쳐 부르리란 걸
어쩌면 나는 알고 있다
누군가 그 대신 상을 차리고, 새벽이 오기 전에
다시 사람들을 불러 모으리란 걸
환하게 불 밝히고 무대를 다시 꾸미리라
그러나 대체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1994년 창

 

피카소 <게르니카 학살>


 

과거와 현재를 이렇게 정확하게 싸잡은 예언도 드물지 싶다. 2010년 1월 20일 한국문화예술위원회는 2년 전 광우병대책회의에 소속되어 촛불시위에 참여한 것과 관련하여 한국작가회의를 불법폭력시위단체로 규정하고, 이미 확정된 보조금 지급의 전제조건으로 향후 집회불참을 서약하는 확인서를 요구하였다. 이에 한국작가회의는 2월 6일 이사회를 열어, 한국문화예술위원회의 비민주적이고 반문화적인 요구에 당당히 맞서 싸우기로 하였고, 2월 20일 제23차 정기총회에서도 굴욕적인 보조금 수령을 거부하고, 이른바 '저항의 글쓰기운동'을 펼쳐나갈 것을 만장일치로 결의하였다.

 

그해 봄, 용산참사 장례식 건으로 거듭 소환장을 받던 송경동 시인이 기어코, <나를 체포하라, 나는 가지 않겠다> 기고문을 들이댔고, 그들의 존재에 의지한 나는, 칠흑 같은 시간을 근근히 견딜 수 있었다. 이듬해 여름, 그의 <비시적인 삶들을 위한 편파적인 노래>를 들었다. <경계를 넘어서>와 <사소한 물음에 답함>보다 몇 배는 강도가 높아져 있어서, 리얼했다.

 

내 나이 세 살때 작고한 김수영은 또 얼마나 그 시대의 비루함을 삐딱하게 흘겨댔던가. '얘야, 그래봐야 니 눈만 아프지' 하시던 유신정권 아래 군인 아버지 같은 목소리들이 40년이 흘렀어도 똑같이 들려온다. 이것은 현실.

 

오늘 밤 와이티앤 뉴스 손석희씨가 최영미 시인에게 던진 멘트는 서글픈 얘기다. 서른 잔치가 끝난 이후 쭈욱 싱글로 살았다는 사실도 새삼 확인할 뿐더러, 어쨌든, 대한민국에서 시인으로 살아가는 자화상과 마주친다. 시인으로 살아가려면 시골 구석에 아니 강남에 쓰러져 가는 집이라도 한 채 사두던가, 매 달 고스란히 제 월급 차압당해도 좋다 하는 남자 하나 키우던가, 반대로 돈 많은 과부 누님이라도 하나 모시던가, 그래야 되지 않을까, 하는 웃지 못할 생각만 막 든다. <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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