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론과 칼럼

김인숙,「벌거벗은 임금님과 눈 먼 자들」

미송 2016. 11. 27. 18:46

 

벌거벗은 임금님과 눈먼 자들

 

 

 

명색이 글을 쓰는 사람인데, 무슨 글자로 이 글을 시작해야 할지 알 수 없다. 할 수 있는 모든 말, 토해낼 수 있는 모든 말들이 이미 신문 지면, 그리고 인터넷을 도배한 상태다. 참담하다, 부끄럽다, 비참하다, 끔찍하다, 슬프다, 암담하다, 기막히다…. 이런 점잖은 말들은 글로 쓰였을 뿐이고, 더 진심에 찬 것은 알고 있는 모든 험한 말들을 합친 욕설일 것이다. 하야라는 말은 너무 점잖고, 탄핵이라는 말도 너무 구태의연해서, 이런 상황에서 정말 어울리는 말은 무엇일까 고민하게 된다. 말로도 되지 않고, 글로도 되지 않으니, 남는 게 욕뿐이라는 게 글쓰는 사람으로서 할 수 있는 말이겠나. 그러니 이런 날은 책상에 앉아 글을 쓰는 대신 거리에 나가 촛불을 들 일이다. 

 

며칠 동안 뉴스를 보느라 읽고 있던 책을 다시 펼칠 수 없었다. 최근에 읽고 있던 책은 연쇄살인을 다룬 일본 작가의 추리소설이었다. 연쇄살인마가 알 수 없는 이유로 젊은 여자들을 마구 죽이고, 그 살인마를 강력계 형사들이 쫓고 있는 추리소설을 뉴스가 압도해버렸다. 어떤 소설도, 영화도, 드라마도 이 뉴스를 이기기는 힘들 것 같다. 단순히 막장스토리여서가 아니다. 막장추리통속이면서, 서스펜스이기도 하다. 우리가 막장이라고 말을 할 때는 도저히 있을 것 같지 않은 일들이 너무나 자연스럽게 일어났을 때를 지칭한다. 상식도 이해도 기준도 없는 일들이 당연한 것처럼 일어났을 때다. 소시민의 일상을 다룬다는 취지의 TV 일일 드라마에서 등장인물이 난데없이, 맥락도 없이 눈에서 레이저를 발사한다면 이건 막장스토리이지만, 그것이 현실에서 일어난다면 서스펜스다. 그리고 괴담이 된다. 괴담의 한국어 사전 뜻은 ‘괴상한 이야기’. 이것이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우리가 살아왔던 지난 몇해 동안의 최순실씨 치하의 한국 현실이다. 

 

포르투갈 작가 주제 사라마구의 소설 <눈먼 자들의 도시>는 알 수 없는 이유로 세상의 모든 사람들의 눈이 멀어버리고, 단 한 사람만이 그 ‘눈먼 자들의 세상’을 바라보게 되는 이야기다. 이 소설은 고통스럽다. 인간과 사회의 치부를 극단적으로 적나라하게 드러내기 때문이다. 더 고통스러운 것은 그것을 오직 ‘나’만이 바라보고 있다는 사실이다. 눈먼 자들의 세상에서 벌어지는 온갖 비리와 흉행과 폭력을 나 홀로 고스란히 목격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나’는 두려워할 수도 있고, 저항할 수도 있고, 지배할 수도 있다. 

 

최씨와 최씨 일가가 생각한 국민들은 눈먼 자들이다. 그리고 그들이 다스린 나라는 눈먼 자들의 나라이다. 지배하는 그들 이외에는 단 한 사람도 눈을 뜨고 있지 않은. 그것이 그들이 믿고 있는 나라이다. 그것이 그들이 정의하고 있는 국민이며, 그것이 그들이 믿고 있는 종교다. 그들이 믿고 있는 국민은 무력한 다수이며, 간혹 소리를 내기는 하지만 진압할 수 있는 다수이며, 쉽게 현혹되는 다수이기도 하다. 말하자면 눈먼 자들이다. 그 눈먼 자들 중에는 실재하는 대통령이 있다. 대통령은 지배하는 자가 아니라 지배당한 자이다. 스스로 자신의 권력을 공손히 바쳐, 부디 나를 다스려달라고 부탁한 사람이다. 자신을 다스려주는 사람이 있었으므로, 아마 끝없이 안심되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종교다.

 

그런데, 그러면, 국민은 뭐가 되나. 나라는 뭐가 되나. 이번 사태로 경질을 당한 김재원 전 수석이 청와대 출입기자들에게 “외롭고 슬픈 우리 대통령님을 도와달라”고 문자메시지를 보냈다고 한다. 놀랍다. 이런 상황에서도 그들에게는 국민이 없다. ‘눈먼 자들’만 있다. 그의 이어진 메시지다. “이 흉흉한 세월의 아픔도 시간이 지나면 잊혀지고.” 이것이 소위 그들이 인식하는 국민의 수준이다.

 

이 흉흉한 세월은 눈먼 국민들로 인하여 발생한 것이고, 그 아픔은 외롭고 슬픈 대통령의 것이다. 그 문자를 받은 출입기자들은 몹시 창피했겠다. 그래야 했겠다. 어쩌다가 그런 문자를 받을 수 있는 상대가 되었던 것일까, 스스로 통탄했을 것이다. 

 

모든 저항과 변화는 바라보는 것으로부터 출발한다. 똑똑히, 제대로 보고, 아는 것으로부터이다. 언론매체들이 앞을 다투어 쏟아내고 있는 기사들이 그래서 반갑다. 거의 시시각각 언론매체별로 특종이 쏟아지는데, TV 뉴스에서는 기자가 웃음을 흘리는 소리까지도 종종 들린다. 기사를 보도하는 기자까지 웃게 만드는 상황이라는 소리다. 웃는 것은 웃겨서가 아니라 기가 막혀서이고 서글퍼서일 것이다. 그러니 사실은 욕을 하고, 비명을 지르고, 고함을 질러야 할 때라는 소리이기도 하다.

 

신문과 방송이 최씨 일가 이야기로 도배가 되고 있는 이때, 한 사람이라도 행복한 이야기를 해주면 좋을 수도 있겠다. 세상 어디에나 행복한 이야기는 있다. 또는 이 엄청난 사태 때문에 꼭 거론되어야 하는 일들이 묻히고 있기도 할 것이다. 그러니 누군가는 그 이야기를 해주는 것이 맞을 수도 있다. 그러나, 지금은, 적어도 지금은, 다른 이야기 대신 한 사람이라도 더 소리를 질러야 할 때라는 생각이다. 나 하나라도 더 보태야 할 때라는 생각이다. 

 

소설 <눈먼 자들의 도시>에서 눈이 멀었던 사람들은 어느 날 갑자기 눈을 뜨게 된다. 그리고 그들이 눈이 먼 채 살았던 세상을 보게 된다. 그것은 완벽한 폐허였다. 그들이 하나의 존재가 아니라 다만 ‘눈먼 자들’ 중의 하나로서, 무의미한 개체로서 살아가는 동안, 세상은 그들의 인간성을 짓밟고, 그들의 나라를 폐허로 만들었다. 인간과 관계와 사회에 대한 질문을 극단적일 정도로 밀어붙인 이 소설은, 그래서 서늘하고 두렵고 고통스럽다. 

 

우리의 상황은 소설과는 다르다. 소설이 제기하고 있는 문제의식과도 다르다. 우리가 눈먼 자들인 것이 아니라 사실은 눈먼 자들이란 그들뿐이어서, 이 근사한 소설로 예를 드는 대신 ‘벌거벗은 임금님’의 우화로 예를 드는 것이 더 나을 수도 있었겠다. 그 임금님이 홀랑 벗고 돌아다니며 대체 나라를 얼마나 말아드셨나, 그런 얘기를 했어야 더 옳았을 수도 있었겠다. 분명히 그랬겠다. 

 

경향 오피니언 김인숙 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