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은 종이 위에 시를 쓰지 않는다. 풀잎과 강물, 벽과 거리, 사랑하는 사람의 얼굴, 내면의 미궁 등 삶의 수많은 지면 위에 쓴다. 이 구 체적이면서 추상적인 삶의 지면에 시인은 자신의 기억과 운명과 깨달음을 정성스레 쓴다. 마치 경전에 글자 하나를 새길 때마다 부처님께 절을 올렸다는 옛 목공의 마음과 다를 것이 없다.
정호승은 새벽에 내린 흰 눈 위에 시를 쓴다. 그의 시의 배경에는 계절과 관계없이 자주 눈이 내린다. 혹은 그의 시의 계절은 대체로 겨울이다. 정호승이 시린 눈 위에 쓴 시들 <슬픔이 기쁨에게> <서울의 예수> <새벽 편지> <별들은 따뜻하다>에서는 시대의 고통을 끌어안았고, <사랑하다 죽어버려라> <외로우니까 사람이다><눈물이 나면 기차를 타라>에서는 상처받은 인간의 손을 잡아주었다. 정호승의 시심(詩心)이란 착하고 맑은 인간의 마음 자체이며, 타인과 나의 고통은 서로 이어져 있음을 증명해왔다. 실제로 정호승의 시에서 눈은 유독 세상의 아름다운 곳과 막다른 곳에 깊게 쌓인다. 두 곳은 하나가 되기도 하는데, 그 오버랩의 장소는 삶의 낮고 쓸쓸한 '바닥'이다. 눈은 세상의 어디에서든 바닥에 쌓이며, 인간의 고통과 진실 또한 내면의 바닥에 쌓인다. 그리고 인간에게는 바닥에 닿지 않으면 구할 수 없는 진실이 있다. 정호승의 시에서 힘겨운 삶(그 외연이 현실이든 역사든 일상이든)과 외로운 인간, 새벽의 눈은 이렇게 바닥을 통해 하나가 된다. 아니, 실은 처음부터 바닥 위에 있다.
등단 30년 만에 펴낸 여덟번째 시집에서 정호승은 그 '바닥의 길'을, "내가 가지 않으면 안 되는 인간의 길" <살모사>라고 부른다. 지난 몇 년 동안 시를 쓰지 못했던 정호승은 다시 펜을 잡고 '바닥의 길'로서의 '인간의 길'을 절실하게 묘사한다. 절심함은 정호승 시의 기질적 특징인 사랑과 용서, 정직과 참회가 빚어낸 진정성의 농도이다. 슬프면서도 따뜻하고, 섬세하면서도 견고한 정호승의 시는 이 절실함으로 많은 이들의 가슴을 적셔왔다. 그러나 정호승의 시가 아름다운 감동과 위안만을 선사해온 것은 아니다. 정호승의 시는 삶의 견딜 수 없는 상처를 견디는 법을 일러주었고, 사랑을 잃은 후에도 타인과 더불어 따뜻하게 살아가는 법을 가르쳐주었다. 그러기 위해서 끊임없는 자기 정화와 희생이 필요하다는 것도 말해주었다. 요약하자면, 정호승은 사랑과 이별의 (슬픈)지혜와, 절망과 희망의 (역설적인)비밀을 전파하는 전령사가 되어왔다. 정호승은 눈물을 시로 구울 줄 아는 시인이며, 그 시가 다시 현실의 양식이 될 수 있도록 구운 눈물을 뒤집을 줄도 아는 시인인 것이다.
이런 정호승의 시에는 도덕적으로 승화된 마조히즘의 요소가 짙게 깔려 있다. 도덕적으로 승화된 마조히즘이란, 고통을 통해 타인과 세계를 구원하려는 고결한 자기희생의 정신을 의미한다. 정호승의 시가 어둠의 시대에는 한 점 불빛이 되기를 원했고, 꽃과 돈의 시대에는 상처로 곪은 사람들에게 소독제의 역할을 하기를 바라는 것은 이러한 자기희생적 지향성의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이를 반증하듯, 정호승은 모두가 바닥을 피하는 삶 속에서 스스로 바닥을 향해 떨어져내린다. 떨어져 죽어야 사는 것이며, 자신이 밑바닥이 되어 멀리 흘러가지 않으면 / 흐르는 물처럼 언제나 새롭게 / 살 수 없는 것 <불일폭포> 이라고 믿는 까닭이다. 그 추락한 바닥의 삶을 정호승은 일상의 곳곳에서 다양한 풍경으로 포착한다.
룸비니에서 사온
흙으로 만든 부처님이
마룻바닥에 떨어져 산산조각이 났다
(...)
그때 늘 부서지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불쌍한 내 머리를
다정히 쓰다듬어주시면서
부처님이 말씀하셨다
산산조각이 나면
산산조각을 얻을 수 있지
산산조각이 나면
산산조각으로 살아갈 수 있지
-<산산조각> 부분
혹한이 몰아닥친 겨울 아침에 보았다
무심코 추어탕집 앞을 지나가다가
출입문 앞에 내어놓은 고무함지 속에
꽁꽁 얼어붙어 있는 미꾸라지들
결빙의 순간까지 온몸으로
시를 쓰고 죽은 모습을
-<시인> 부분
바닥에 떨어졌다고 삶이 끝나는 것은 아니다. 삶은 바닥에서도 계속된다. 그런데 바닥에서는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 정호승이 내놓는 답은 이러하다. 바닥에 떨어져 산산조각이 나면 산산조각을 얻어 산산조각으로
살아갈 수 있다. (산산조각으로 살아갈 수 있다니! 가혹하지만 이상하게도 안심이 되는 말이다.) 만일 바닥에 얼어붙어 죽게 된다면 결빙의 순간까지 온몸으로/시를 써 자신의 전존재를 한편의 시로 바꿀 수 있다. 추락과 죽음은 삶을 종결시킬 수는 있어도 위협할 수는 없다. 산산조각과 결빙의 순간조차 삶의 지독한 부분에 속해 있는 까닭이다. 때문에 바닥의 바닥까지 갔다가/돌아온 사람들도 말한다/더 이상 바닥은 없다고/ 바닥은 없기 때문에 있는 것이라고/(...)/ 그냥 딛고 일어서는 것이라고. <바닥에 대하여> [중략]
밤의 서울 하늘에 빛나는
붉은 십자가를 가만히 들여다보면
십자가마다 노숙자 한사람씩 못 박혀
고개를 떨구고 있다
-<밤의 십자가> 부분
제발 함박눈이라도 내려
고이고이 저 시체를 덮어주었으면 좋겠다
-<버려진 골목> 부분
언제나 한 마리 짐승에 지나지 않았던 저는
늘 지옥말고는 갈 데가 없었습니다
-<시립 화장장 장례지도사 김씨의 저녁> 부분
개는 주인을 만나려고
떠돌아다니는 나무가 되어 이리저리 바람에 흔들리다가
바람에 떠도는 비닐봉지가 되어 이리저리 거리를 떠돌다
마음이 가난해진다
마음이 가난한 개는 울지 않는다
천국이 그의 것이다
-<유기견(遺棄犬)> 부분
이 시들을 읽노라면, 연민과 슬픔이야말로 사랑의 지극한 기원임을 느끼게 된다. 천국이란 삶의 안에서 이루어질 수 없는 평등을, 삶의 밖에서라도 이루려는 열망의 산물이라는 점도 이해하게 된다. 그런데 놀랍게도, 삶의 바닥에 놓인 사람들은 정호승이 그토록 우러러보던 초월의 가장 가난한 자세를 보여준다. <이별> 무릎 없는 걸인은 성철스님 돌아가신 날 평생 가장 많은 돈을 벌었다며 웃고 <걸인>, 꽁보리밥을 맛있게 먹으며 탄광에서 일하는 김장순씨는 다음 달이면 농협 빚을 다 갚을 수 있다고 자랑한다. <막장에서> 눈먼 아들을 위해 스님께 등(燈)을 부탁하는 늙은 어머니를 보며 맹인수녀는 가슴에 촛불 하나 밝히고 길을 떠난다. <맹인수녀> 또한 이 가난한 초월의 중심에 있을 법한 시각장애인 식물원에서는 꽃들이 모두 인간의 눈동자가 되어준다. <시각장애인 식물원>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에 관심을 갖는 데 이어, 정호승은 가족과 자신에 대해서도 진솔한 이야기를 털어놓는다. 지금까지 정호승은 가족과 개인사를 시의 표면에 드러내는 일이 많지 않았다. 예외적으로 이번 시집에는 그의 어머니와 아버지, 아들과 자신에 대해 많은 지면을 할애한다. 가족에 대해 그가 보여주는 감정과 태도는 의외로 복잡하다. 노쇠한 어머니에게는 한없는 사랑과 인간적인 연민을 표현하는 반면, 아들에 대해서는 안타까운 단절감과 거절당한 사랑의 비애를, 자신에 대해서는 상실감과 냉소를, 아버지에 대해서는 거리감에 가까운 경외를 표출한다.
너는 오늘도 아버지를 미워하느라 잠 못 이루고
끊었던 담배를 다시 피우고
술을 사러 외등이 켜진 새벽 골목길을
그림자도 떼어놓고 혼자 걸어가는구나
(...)
부디 아버지를 미워하는 일로 너의 일생이
응급실 복도에 누워 있지 않기를
어두운 법원의 복도를 걸어가지 않기를
-<겨울부채를 부치며> 부분
나는 아직 돈도 사랑도 버리지 못하고
꾸역꾸역 밥과 국만 먹는다
처마 끝에 맺힌 고드름도
한순간에 마당에 툭 떨어지는데
나는 아직 이별의 순간을 떨치지 못하고 운다
-<이별> 부분
아무도 나를 찾으러 오지 않는다
(...)
지옥은 여기에서 먼가
-<유실> 부분
이 세상에 더 이상 남길 것은 없다
나는 그저 간다
어디로 가는지 나는 모른다
좀 있다가 목이 마르면
그저 물이나 한잔 마시다가
너도 너 혼자 어디로 가라
-<미리 읽어본 아버지의 유서> 부분
이처럼 정호승이 고백하는 가족 이야기는 아름답거나 따뜻하지 않다. 오히려 서글프고 참담하다. 가족들이 서로 미워하거나 헤어져 있기 때문이 아니라, 그 미움과 헤어짐 속에 사랑이 뿜어내는 필연적인 독(毒)이 있기 때문이다. “오늘도 아버지를 미워하느라 잠 못 이루”는 아들과 “돈도 사랑도 버리지 못하고/ 꾸역꾸역 밥과 국만 먹는” 나, 홀로 떠나며 “너도 너 혼자 어디로 가라”고 말하는 아버지는 서로에 대한 사랑과는 별개로 쓸쓸히 각자의 길을 간다. 심지어 ‘나’는 지하철에서 길을 잃고 “아무도 나를 찾으러 오지 않는다”는 절망 속에 ‘지옥’을 경험하기도 한다.
정호승이 뜨겁게 소통하는 유일한 가족은 어머니이다. 부엌 냉장고에 들어가 나중에 영안실 냉장고에 들어갈 연습을 하신다는 어머니 <노인들의 냉장고>를 위해 그는, “잘 자라 우리 엄마/할미꽃처럼/당신이 잠재우던 아들 품에 안겨/장독 위에 내리던/함박눈처럼” <어머니를 위한 자장가> 라고 자장가를 불러주기도 한다. 그러나 어머니는 지금 “낡고 텅 빈 노인”일 뿐이며, “사랑하는 모든 것은/곧 헤어지지 않으면 안되”<통닭>는 운명을 지니고 있다. 그에게 아버지가 “너도 혼자 어디로 가라”는 유언을 남긴(길) 것도 이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사랑하는 모든 것은 끝내 헤어져야 하기에, “너도 너 혼자 어디로 가라”는 냉정한 유언은 아버지가 아들에게 주는 최후의 사랑이 된다. 이것을 깨닫는 순간, 바닥에 놓여 있던, 정호승의 가족과 자신에 대한 관계는 화해의 길로 접어든다. 그는 사랑 앞에 무릎 꿇고 상실의 운명을 받아들이며, 사랑 속에 들어 있는 독을 없애 버리고자 한다.
사랑이여
나는 이제 나의 눈물에 독이 없기를 바란다
더 이상 나의 눈물이
당신을 해치지 않기를 바란다
(...)
살아간다는 것은 독을 버리는 일
그동안 나도 모르게 쌓여만 가던 독을 버리는 일
-<사랑에게> 부분
너도 무릎을 꿇고 나서야 비로소
사랑이 되었느냐
-<무릎> 부분
이제 우리 헤어질 때가 되었다
어둠과 어둠 속으로만 떠돌던 나를
그래도 절뚝거리며 따라와주어서 고맙다
(...)
가라
인간이 사는 곳보다
새들이 사는 곳으로 가서
어린 나뭇가지에서 어린 나뭇가지로 날아다니는
한 마리 새의 그림자가 돼라
-<내 그림자에게>부분
살아가는 일이란 사랑하는 일인 동시에, 사랑의 눈물속에 든 독을 버리는 일이다. 삶과 사랑은 끊임없는 해독과 자정(自淨)을 거쳐야만 진정으로 자신과 타인을 위한 것이 될 수 있다. 해독과 자정 작업은 궁극적으로는 자아와 존재의 비상으로 이어진다. 정호승의 시에서 승화된 자아와 존재는 ‘새’의 이미지로 집약된다. 더불어, 자아와 존재의 비상은 ‘인간이 사는 곳’에서 ‘새들이 사는 곳’으로 가는 일로 나타난다. 이처럼 정호승이 동경하는 마음의 새들은 세상의 가장 높고 청정한 곳에 살고 있다. 가파른 빙벽이나 눈 덮인 ‘나의 수미산’이나 눈 내린 월정사의 부도밭 같은 곳이 그 단적인 예이다. 그 아득한 마음의 산정을 갈망하며 정호승은 자신의 “발자국이 소금이 될 때까지” “장다리물떼새와 함께/외로운 소금밭을 서성거리고” <도요새>, “내 비록 돈을 벌기 위해 평생 동안 잠 못 이루던/서러운 마음이지만/돌아오라 새들아 밤안개를 데리고/고요히 미소를 지으며 돌아와 나를 쪼아먹어라” <헌식대에 누워>라고 새들을 향해 간절히 호소한다. 한걸음 더 나아가, “폭설이 내린 날/내 관을 끌고 올라가” “평생토록 참회해도 참회할 수 없는 참회를/관 속에 집어넣고” “산정의 산정에 홀로 서서” <나의 수미산> 그 관을 던질 것이라고 자신에게 맹세하기도 한다.
인간의 작은 탑 하나 세우기 위해
평생 동안 다시 산을 오른다
발도 없이 손도 없이 산을 오른다
(...)
오늘밤에는 산정에 고요히 눈이 내린다
인간의 얼굴을 한 작은 새 한 마리
눈 속에 파묻힌다
-<나의 수미산> 부분
삶의 바닥에서 수미산의 정상에 오르는 길은 ‘인간이 사는 곳’에서 ‘새들이 사는 곳’으로 가는 길이지만, 인간을 버리고 새가 되는 길은 아니다. 시에서 보듯, 정호승의 내생(來生)이 될 작은 새는 너무도 또렷하게 인간의 얼굴을 하고 있다. 여기에 이르면, 정호승의 시에서 인간과 새, 바닥과 산정은 다르면서도 같은 세계임이 밝혀지게 된다. 두 세계를 연결하는 힘은 말할 것도 없이, 발도 없이 손도 없이 산을 오르는 인간이며 시인인 정호승의 수고이다. 지천명의 나이에 정호승이 삶의 바닥에 엎드린 사람들을 찾아다니고, 가족과 자신의 부끄러운 면까지도 솔직하게 토로하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이번 시집에서 불교적 지향성과 기독교적 색채가 무리 없이 공존하며, 그것을 특별히 문제 삼거나 따로 분석할 필요가 없는 이유도 같은 곳에 있다. 굳이 성(聖)과 속(俗)의 통합이라는 거창한 이름을 붙이지 않아도 될, 이 화합의 풍경 속에는 그저 소리 없이 눈이 내릴 뿐이다.
사람은 죽었거나 살아 있거나
그 이름을 불렀을 때 따뜻해야 하고
사람은 잊혀졌거나 잊혀지지 않았거나
그 이름을 불렀을 때 눈물이 글썽해야 한다
-<부도밭을 지나며> 부분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자신의 마음에서 우러나는 가슴 뭉클한 진실이며, 그 진실을 향해 가는 한결같은 마음이다. 정호승이 따뜻하면서도 시린 언어로 우리에게 전해주는 것은 이 소박하지만 소유하기 힘든 진실이다. 그를 따라 삶의 바닥에서 수미산에 이르는 길을 차가운 눈을 맞으며 오를 것인가, 아니면 여기에 머물 것인가? 지금 창밖에서 우는 것은 내생의 ‘나’를 예언하는 ‘인간의 얼굴을 한 작은 새’인지도 모른다.
金壽伊 평론가
시집<이 짧은 시간 동안> (창비시선2004)中
20120406-20230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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