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론과 칼럼

그러므로 크리스마스

미송 2016. 12. 24. 08:45

올해도 캐럴이 들리지 않는다. 차라리 잘됐다고 생각한다. 그날이 다시 왔으니 놀아보자, 마셔보자, 흥청대는 것보다 경건하고 아름다웠던 성인의 삶을 반추하며 고요에 젖어드는 게 백 번 낫다. 함부로 “기쁘다, 구주 오셨네!” 할 일도 아니다. 서력기원의 주인공이 된 분의 삶이 너무나 고단했고, 사랑에 관한 그의 생각 또한 너무나 급진적이어서 받아들이기 쉽지 않으니 말이다. 생각해보라. 마구간에서 시작하여 교수대 위에서 끝나버릴 자에게 ‘메리’ 혹은 ‘해피’라며 환영인사를 건네다니 미안하지 않은가.

 

그렇다고 풀 죽어 지낸 일 없이 “오늘도 내일도 내 길을 갈 뿐”이라며 참혹하게 부서져가는 세상에서도 거뜬히 인간의 기개를 보여주었던 예수. 모름지기 종교사상은 엄청난 불안과 공포 그리고 새카만 어둠이 지배하던 시대를 못자리 삼아 싹 틔웠다. 지난여름 원불교 백주년에 맞춤하게 출간된 <소태산 평전>을 읽으며 새삼 깨달았다. 불법무도의 불인한 시대가 오히려 위대한 성자를 잉태하는 최적의 조건이라는 사실을.

 

1세기에는 신의 아들, 신이 보낸 신, 주님, 구세주라는 직함을 가진 자가 있었다. 누구인가? 이런 호칭들은 예수가 나기 훨씬 전에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에게 속해 있었다. 그리스·로마 전통은 세상을 지배하는 불멸의 신들 외에 ‘신이 된 인간’들의 존재도 인정하였다. 세상을 위해 비범한 봉사를 한 사람들을 그렇게 대접했다. 예를 들어 시인 호라티우스는 악티움해전에서 거의 100년 동안 계속된 혼란과 내전을 끝내버린 옥타비아누스를 이렇게 노래했다. “그가 신이 아니면 도대체 무엇인가? 그가 구세주가 아니면 세상에 누가 구세주란 말인가?” 정점에 올라선 황제를 신으로 승격시킨 것은 아부나 시적 과장이 아니었다. 무력으로 세계를 제패한 위업을 평화의 성취로 포장하려는 신학적 필요 때문이었다. 신들을 예배하는 자들이 신들의 도움으로 전쟁에서 승리하고, 마침내 평화를 이룩하였으니 다들 고분고분하라고 말하기 위함이었다. 

 

이토록 지엄한 이름들을 목수 출신의 평민에게 몰아주었으니 익살인가 아니면 풍자인가. 도발이며 반역이었다. 어쩌자고 그랬을까? 원불교 대종사 소태산은 일경의 매서운 감시와 의심을 따돌리기 위해서 ‘천하의 농판’ 행세를 하였다. “집에 들면 노복 같고/ 들에 나면 농부 같고/ 산에 가면 목동 같게” 살았으므로 가까스로 원불교의 모태인 불법연구회를 지킬 수 있었다. 하지만 엎드려 숨죽인 채 힘을 기르고 키웠으면 몸을 일으켜 구제와 자비의 수고를 감당해야 하는 법.

로마는 로마의 지배를 통한 평화, ‘팍스 로마나’를, 일본은 ‘대동아공영’을 외쳤다. 우승열패와 강자독식을 합리적 인간사라고 가르치는 조잡한 프로파간다는 오늘날 기업과 정부의 짬짜미를 통해서 버젓이 재현되고 반복되고 있다. 

 

예수야말로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호명했던 것은 이런 식의 ‘승리를 통한 평화’가 대다수를 피눈물 나게 만들며, 조만간 또 다른 전쟁과 폭력을 부르고 마는 엉터리 평화임을 폭로하는 동시에 이런 꼼수에 목숨 걸고 저항하겠다는 선전포고나 다름없었다. 

 

오늘 밤, 세상의 권력자들도 가난한 아기 앞에 무릎 꿇고 경배할 것이다. 그렇다고 ‘군대들아 칼을 녹여서 보습을, 창을 쳐서 낫을 만들어보자. 너희 사나운 맹수들도 이기적인 육식본능을 버리고 양과 염소와 송아지와 함께 풀을 뜯어보자. 그러면 상상도 못한 기쁨과 평안을 누리게 되리라’는 거룩한 아기의 평화 구상에 선뜻 동의할 것 같지는 않다. 

 

엊그제 청문회에서 거짓말만 줄줄 늘어놓던 어느 난쟁이 권력자의 능청스러운 얼굴을 보다가 끝끝내 특권과 독점의 나라에서 살아가고 싶었던 자들이 장차 임금이 될 아기가 태어났다는 소식을 듣고 벌컥 화를 냈다는 성경 이야기가 무슨 뜻인지 실감했다. 예수가 난 다음 숱한 어머니들이 아기를 잃고 통곡했다. 이런 슬픈 사연 때문인지 윤종신은 ‘그래도 크리스마스’라고 노래하고 있다. 맞다. 그래도 크리스마스. 성탄은 썩은 그루터기에서 그것도 한겨울 밤에 새순 하나가 슬며시 움튼 사건이었으니. 그토록 무참히 짓밟아 버렸지만 ‘그래도’ 꺾이지 않았으니 말이다. 

그런데 이번만큼은 ‘그래도’ 하는 위안보다 ‘그러므로 크리스마스’라고 해야 할 듯싶다. 주말마다 빛들이 또 다른 빛들을 만나 신나게 세상을 비추는 사상 초유의 성탄전야가 이어지고 있어서 그렇다. 아무리 “모른다, 그런 적 없다”고 우겨봤자 헛수고. 우리는 알고 있다. 매서운 겨울은 이제 막 시작되었지만 밤은 벌써 짧아지기 시작하였음을. 언제나 성탄은 동지 그 다음에 온다. 그러므로 크리스마스, 메리 크리스마스!


 

 김인국 청주 성모성심성당 주임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