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문과 산문

최명희 [언어는 정신의 지문]

미송 2017. 5. 25. 20:18

 

언어는 정신의 지문

 

최명희

 

 

에는 정령이 붙어 있다고 한다. 그래서 말이 '씨'가 된다고 한다. 나는 모국어의 모음과 자음이 어우러져 빚어내는 울림과 높낮이, 장단을 사랑하여 이 말의 씨를 이야기 속에 뿌리는 사람일 것이다. 지금 우리는 백 년이 아니라 천 년 단위가 바뀌려는 세기 말의 퇴폐 향락적이며 무의미가 창궐하는 지금, 자본주의 산업사회 정보화 영상시대를 살고 있다. 이러한 가운데 수천 년 동안 면면히 우리의 삶이 녹아서 우러난 모국어마저도 단순한 기호로 흩어져 버리려 한다. 모국어는 우리 삶의 토양에서 우리의 생각과 느낌을 품고 길러 정신의 꽃으로 피워 주는 씨앗인데, 진정한 말의 참다운 의미를 담지 못한 탓인가. 요즘은 말을 제일 하찮게 여기는 것 같다. “때때로 나는 엎드려 울었다.” 

 

그리고 갚을 길도 없는 큰 빚을 지고 도망 다니는 사람처럼 항상 불안하고 외로웠다. 좀처럼 일을 시작하지 못하고 모아놓은 자료만을 어지럽게 쌓아둔 채, 핑계만 있으면 안 써보려고 일부러 한눈을 팔던 처음과는 달리 거의 안타까운 심정으로 쓰기 시작한 이야기 『혼불』은 드디어 나도 어쩌지 못할 불길로 나를 사로잡고 말았었다. 나는 마치 한 사람의 하수인처럼, 밤마다 밤을 새우면서 한번도 본 일이 없는 사람들의 넋이 들려, 그들이 시키는 대로 말하고 가라는 대로 내달렸다. 그것은 휘몰이 같았다. 그러다가 그만 아찔한 낭떠러지 끝에 이른 것마냥 갑자기 이야기를 멈추고 만 것은 닥쳐온 응모 마감시간과 제한된 원고의 매수 때문이었다. 그래서 도저히 ‘끝’이라고 쓸 수는 없었지만 우선 그렇게 적어서 제출하였다. 마음 같아서는 그 말 대신 ‘이제부터 시작’이라고 하고 싶었다. 당선된 뒤, 제1부로 나온 책의 말미 후기에 나는 이렇게 썼다. “지금 이토록 한 시대와 한 가문과 거기 거멍굴 사람들의 쓰라린 혼불들은 저희끼리 스스로 간절하게 타오르고 있으나 나는 아마도 그 불길이 소진하여 사윌 때까지 충실하게 쓰는 심부름을 해야만 할 것 같다. 그래서 지금도 나는 다 못한 이야기를 뒤쫓느라고 밤이면 잠을 이루지 못한다. 이 일을 위하여 千軍萬馬가 아니어도 좋은, 단 한 사람만이라도 오래오래 나의 하는 일을 지켜보아 주셨으면 좋겠다.

 

그 눈길이 바로 나의 울타리인 것을 나도 잊지 않을 것이다. 그러고는 이렇게 제2부를 쓰기까지 만 7년 6개월. “웬일인지 나는 원고를 쓸 때면, 손가락으로 바위를 뚫어 글씨를 새기는 것만 같은 생각이 든다.” 나는 동구 밖의 그 해묵은 장승처럼 오직 한 자리에 붙박히어 서 있었다. 보이지 않는 넋에 사로잡힌 큰칼을 목에 쓰고, 서럽게 홀로. 이제 그 무거운 칼을 잠시 풀고, 새로 꾸민 제1부에다 그 동안에 이어 쓴 제2부를 묶어 우선 매듭을 짓는다. 아직도 ‘우선’이라고 말하는 까닭은 여전히 이 이야기가 끝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혼불』 제3부는 1988년 9월부터 지금까지 제2부를 연재하였던 월간 『신동아』에 계속 한 자 한 자 새기며 쓰고 있다. 웬일인지 나는 원고를 쓸 때면, 손가락으로 바위를 뚫어 글씨를 새기는 것만 같은 생각이 든다. 그것은 얼마나 어리석고도 간절한 일이랴. 날렵한 끌이나 기능 좋은 쇠붙이를 가지지 못한 나는, 그저 온 마음을 사무치게 갈아서 손끝에 모으고, 생애를 기울여 한 마디 한 마디, 파나가는 것이다. 그리하여 세월이 가고 시대가 바뀌어도 풍화마모되지 않는 모국어 몇 모금을 그 자리에 고이게 할 수만 있다면 그리고 만일 그것이 어느 날인가 새암을 이룰 수만 있다면. 새암은 흘러서 냇물이 되고, 냇물은 강물을 이루며, 강물은 또 넘쳐서 바다에 이르기도 하련만, 그 물길이 도는 굽이마다 고을마다 깊이 쓸어안고 함께 울어 흐르는 목숨의 혼불들이, 그 바다에서는 드디어 위로와 해원(解寃)의 눈물나는 꽃빛으로 피어나기도 하련마는.

 

나의 꿈은 그 모국어의 바다에 있다. 어쩌면 장승은 제 온몸을 붓대로 세우고, 생애를 다하여, 땅 속으로 땅 속으로, 한 모금 새암을 파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리운 마을, 그 먼 바다에 이르기까지. 제가 홀로 이 원고를 쓰면서 긴세월동안 울기도 많이했고, 대체로 가장 많이 운 대목은 나는 왜 이리도 재주가 없을까였습니다. 너무 절망적이고 너무 괴롭고, 너무 외롭고 그 주제는 정말 저의 재주 없는 것에 대한 절망이었지요. 그런 괴로움과 외로움속에서 항상 제가 제 마음속에 늘 홀로 격려했던 것은 저의 눈물이 깊어질수록 저의 가지가 자라오른다라고 하는 그 믿음이었습니다. 그것은 단순히 저의 믿음만이 아니라 우리의 역사나 우리의 어머니나 아버지들의 삶을 돌아보면은 그게 실제로 몸속에서 이루어지고 있었던 것을 저는 절망한 때가 참 많았습니다. “언어는 정신의 지문이고 모국어는 모국의 혼이기 때문에 저는 제가 오랜 세월 써오고 있는 소설 혼불에다가 시대의 물살에 떠내려가는 쭉정이가 아니라 진정한 불빛 같은 알맹이를 담고 있는 말의 씨를 심고 싶었습니다.”

 

98년 6월 1일 호암상 수상 소감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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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최명희입니다.

 

사람들은 말에는 정령이 붙어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말이 씨가 된다고도 하지요.

 

생각해보면 저는 소설이라는 이야기속에 말의 씨를 뿌리는 사람인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은 어떤 씨를 뿌려야 할까? 그것은 항상 매혹과 고통으로 저를 사로잡고 있었습니다. 언어는 정신의 지문이고 모국어는 모국의 혼이기 때문에 저는 제가 오랜 세월 써오고 있는 소설 혼불에다가 시대의 물살에 떠내려가는 쭉정이가 아니라 진정한 불빛 같은 알맹이를 담고 있는 말의 씨를 심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사실 이 혼불을 통해서 단순한 흥미의 이야기가 아니라 정말 누천년동안 우리의 삶속에 면면히 이어져 내려온 우리 조상의 순결과 삶의 모습과 언어와 기쁨과 슬픔을 발효시켜서 진정한 우리의 얼이, 넋이 무늬로 피어나는 그런 글을 쓰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훼손되지 않은 순결한 우리의 모국어를 살려보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저의 언어가 사실 모든 것이 이렇게 바뀌고 또 새로워지고 있는 이 시대에 변하지 않는 고향의 불빛같은 징검다리 하나가 되서 제가 알고 있는 언어들을 한 소쿠리 건져내서 제 모국에, 제가 살다가는 모국에 바치고 싶습니다. 그래서 언어가 언어의 소쿠리가 변화하는 시대에 징검다리 하나가 되어서 고향의 불빛처럼 그 언어를 딛고, 가고 싶은 곳으로 갈 수 있는 그런 따뜻한 불빛 같은 그런 징검다리가 됐으면 하고 생각합니다. ­

 

철저히 발로 뛰며 취재해서 썼다고 들었습니다. 취재과정의 일화나 어려움을 들려주시지요

 

『만주지방의 역사와 풍습, 지리를 취재하려고 64일간 취재여행을 떠난 것을 비롯, 작품 속 무대를 샅샅이 뒤졌지요.특히 남원을 중심으로 한 남도일대는 지금도 손에 잡힐 듯 눈에 선합니다. 취재수첩만 해도 수십권에 달하고 만난 사람도 헤아릴 수 없지만 그때마다 설렘에 사로잡히곤 했지요』 최씨는 「혼불」을 쓰며 17년간 원고 한줄을 보탤 때마다 이야기를 들려주듯 문장을 소리내어 읽어왔다.  판소리용어를 빌리자면 소설속의 활자들이 눈으로 읽히는 것이 아니라 『운율을 타고 가슴에 척 안겨드는가 아닌가』를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김열규 교수의 {혼불} 언어론을 잠깐 다시 읽어보자. 김교수는 먼저 {혼불}의 소설언어에 관심을 보였다. “말 의 장단, 가락까지 느껴지는 각별한 말의 분위기가 먼저 독자를 사로잡는다. 우리들 한국인의 지나간 몇 세대를 말하기 알맞은 가장 한국적인 말, 주어진 시대성을 반영하고 있는 말, 그래서 으뜸으로 한국적인 말로써 기술된 소설언어가 거기 있었다”고 밝힌 바 있다. 문학은 언어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최명희씨는, 작가의 사명은 모국어 갈고 닦기라는 명제에 누구보다 충실하다.

 

“모국어는 정신의 지문(指紋)”이라고 규정한 작가가 구사하는 {혼불}의 언어는 바람과 햇빛 속으로 들어가 뒤범벅되기도 하고, 복식이며 먹거리 앞에서는 어머니처럼 낮고 자상하며 엄격하고 정밀해지고, 혼례나 장례를 만났을 때는 절차를 놓치지 않으면서도 그 설렘과 서러움을 넘치지 않게 담아낸다. 하층 계급의 삶을 껴 안을 때는 흐벅졌고 애타는 연인들이 만나 불꽃이 일 때는 흐드러졌다. 달과 어둠을, 혼과 백을, 이승의 안타까움과 저승의 무심함을, 상처와 극복을, 부재와 희원을, 양반과 상민을, 음과 양을, 삶과 죽음을, 사유와 감각을, 인간과 자연을, 인간과 인간 사이를, 한 인간의 안과 밖을, 그 안의 여러 겹 마음의 지도를 {혼불}의 언어는 차가운 관능과 뜨거운 주술을 씨줄과 날줄로 삼아 교직해 낸다. 그 직물은 마침내 '민족혼의 대해원'이라는 서사의 바다를 펼쳐내는 것이다. “이제 한국 소설도 문체로서 읽혀질 단계”라고 최명희씨는 말한 바 있다. 그리하여 작가는 스토리에 대한 고정관념을 무너뜨린다. 사건의 배열인 스토리가 아니라 “소리와 향기, 빛에 관한 이미지, 자연과 우주의 교감도 나에게는 중요한 스토리”라는 것이다.

 

{혼불}을 기왕의 소설 형식들이 강조해온, 그래서 거기에 갇혀버린 기승 전결의 독법으로 읽는다면 '혼불'은 희미해진다. 사건과 사건 사이에서 서로 삼투하는 극채색 이미지들의 활약을 눈여겨보아야 하는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혼불}이 복원해내고 있는 민족문화의 다양한 목록들, 예컨대 기후와 풍토, 세시풍속, 사회제도, 촌락구조, 역사, 관혼상제, 통과의례, 주거 형태, 가구, 그릇, 소리 등 민족문화의 커다란 저수지를 무시하라는 권유는 아니다. {혼불}은 따로 사전을 만들어야 할 만큼 민족문화의 방대한 보고인 것이다. 차가운 관능과 뜨거운 주술의 예술소설 2년 걸려 {혼불} 드디어 마무리한 작가 최명희의 작품세계 작가 최명희씨는 만년필로 글을 쓴다. 만년필과 최명희씨와의 '문학사'는 각별하다. 만년필 꿈을 꾸고 10년 동 안의 고독(고독의 깊이가 시간에 비례하는 것은 아니지만)에서 벗어났으며, 이번에 완성한 {혼불} 제3·4부, 아니 그 이전에 나온 1·2부는 물론이고 그의 모든 글을 만년필이 아니었다면 세상에 나오지 못했을 것이다.

 

최씨는 '독실한 만년필주의자'이다. 독실한 만년필주의와 승화된 영물의 전율 시간이 지날수록 만년필이 돌올해지는 까닭은 두말할 나위없이 컴퓨터의 위력 탓이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워드 프로세서. 종이와 잉크를 없애겠다, 종이와 활자문화를 박물관으로 보내겠다고 천명했던 워드 프로세서는, 그러나, 오히려 만년필을 '귀족의 문방구'로 격상시키는 듯하다. 이때의 귀족이란 신분이나 계급이 아니라, 후기 산업사회·정보화 사회·대량 소비사회·대중문화 시대의 가공할 가속도에 다리를 거는(브레이크를 밟는) 도저한 정신주의자들이다. 부정의 정신을 소유한 인문주의자들. “많이 쓰고 빨리 쓸 수 있고 정보를 입력할 수 있으며 얼마든지 수정이 가능하다고 사람들은 나한테 컴퓨터 쓰기를 권한다(…) 그러나 문득 한번만 돌이켜보면 그렇게 '많이' 쓰고 '빨리' 써서 무엇을 남길 것인가 사뭇 의아해진다.” 최명희씨가 한 신문의 칼럼에 적은 만년필 예찬론의 한 대목이다. 그 글에서 그의 만년필은 확장된 손가락(지문이 선명하게 남는)이며, 먼길을 떠나는 말(馬)이고, 인광을 밝히며 접신하는 도구(神物)이다. 그 글을 조금만 더 읽자. “그러나 무엇보다 나를 황홀하게 사로잡는 것은 만년필의 촉끝이다. 글씨를 쓰면서도 흘리어 순간순간 그 파랗게 번뜩이는 인광에 한숨을 죽이게 하는 촉끝은, 한밤중에도 눈뜨고 새파란 불을 밝힌다(…)나는 때때로 내가 본 이 세상의 모든 것 가운데 가장 아름다운 것이 이 만년필 눈이 아닌가, 찬탄을 금치 못한다.”

 

이 영물은 마침내 우주와 혼교(魂交)하는데, 우주의 혼인 새벽 푸른빛을 만년필은 우선 등으로 받아들인다. 만년필에 내려앉은 푸른빛이 “만년필 등에서 날렵한 촉끝으로 쏟아지며 또 다른 불꽃을 일으킬 때, 나는 우주와 만년필의 교감에 전율하였다.” 이 순간, 만년필은 변신하며 확장하는 것이어서 결국에는 작가 자신일 것이었다. 그렇게 혼불은 한 자 한 자 씌어졌으니 {혼불}은 암각화였다. 15년 10개월의 각고의 시간 80년 봄 4월부터 쓰기 시작한 {혼불}은 지금까지 제1부(82년, 동아일보사), 제1·2부(91년, 한길사)로 먼저 출간 된 바 있다. 이번에 묶여지는 3·4부는 91년에 나온 1·2부에 이어지는 것으로 1부에서 4부(전8권)에 이르기까지 모두 15년 10개월이 걸렸다. 특히 3·4부는 88년 9월부터 95년 10월까지 월간 {신동아}에 7년 2개월 동안 총85 회가 연재되었다. {혼불}은 한국 월간지 사상 가장 오랫동안 연재된 소설이란 새 기록을 세웠다. 그러나 시간과 기록이 작품성을 담보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작품이 씌어지는 시간은 산술적으로 계산하기 어려운 성질의 것이다. 

 

문학은 문학의 이름으로 평가받고 문학으로서 독자들과 살아 있어야 한다는 믿음을 최명희씨는 어느 작가 못지 않게 갖고 있다. 그의 생애가 이 믿음을 떠받치고 있는데, 그의 삶은 ‘문학적’이 아니다. 그의 생은 문학 그것이었다. {신동아}에 {혼불}을 연재하는 동안 그의 캘린더는 특수했다. 그의 한달은 30일이나 31일이 아니고 매달 10일에 끝났다. 원고 마감일이 10일이었다. 매일 밤을 새우며 '혼불'의 파아란 불빛을 원고지에 담아내다 보면, 마감날 원고 뭉치를 들고 신문사로 향하는 작가의 '몰골'은 말이 아니었다. 밤을 새워도 모자라 신문사로 가는 택시 안에서 원고를 또 보고 있는데 택시 운전사가 말을 걸어왔다고 한다. 그는 스물 대여섯, 펑크머리를 하고, 금사슬 목걸이에 팔찌까지 주렁주렁 감은 신세대였다. “손님, 글 쓰시나 보죠?” 최명희씨가 엉겁결에 그렇다고 하자 운전기사는 무슨 글을 쓰느냐고 물어왔고 최씨는 소설을 쓴다고 답했다. 그때 운전사는 미묘하고 야릇한 미소를 머금더니 힐끗 돌아보며 느닷없이 물었다. “그런데, 메이커 있는 작가예요?” 아마도 운전기사에게는 '메이커'가 없는 작가로 보였던 최명희씨는 웃었다. 만일 최씨의 작가로서의 삶이 '문학적'이었다면 벌써 '메이커'가 있었을 터였다. 스무살까지는 천분, 스무살이 넘으면 현실 최명희씨는 학창시절부터 이른바 '날리는 문사'였다.

 

10대 때 이미 각종 백일장에서 장원을 휩쓸고, 고3 때 쓴 수필 [우체부]는 고등작문 교과서(박목월·전규태 공저, 정음사 편)에 예문으로 실리기도 했다. 그러나 전북대 국문과 3학년 시절 '절필'하고 만다. 숙명여대가 주최한 전국대학생 문예콩쿨에 소설이 당선되었는데 당시 심사 위원이었던 안수길씨가 '구성이 너무 완벽해서 흠'이라고 평했다. 그 이후 10년 동안 글을 쓰지 못했다. “스무 살까지는 천분으로 쓸 수 있다. 그러나 스무살이 넘으면 재능만으로는 불가능하다. 구체적인 현실이 필요했다” 고 작가는 말했다. 그 절망적인 절필의 시절, 그는 매일 밤 대학노트에다 울며 일기를 썼다. 일기는 10페이지가 넘어가기가 일쑤였다. “나는 '하늘의 사랑'을 믿는다. 그것은 안 믿으면 없는 것이지만 믿으면 내것이다. 운명이나 사랑도 마찬 가지다.”라는 작가는 그 10년의 공백기, 즉 '땅속 씨앗의 시절'을 고마워한다. 한국문학이 상업주의와 최초로 악수를 나누던 70년대에 문단에 나왔다면 상업화의 물결로부터 자유롭지 못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80년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단편 [쓰러지는 빛]이 당선되어 문단에 나온 그는 그해 봄 뜻밖의 교통사고를 당해 병상에 눕고 말았다.

 

그 병상에서 씌어진 첫 장편이 바로 {혼불} 제1부였다. 그때로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혼불}에 쏟아온 그의 열정은 거의 종교적이었다(작가의 절친한 친구들은 그가 살던 아파트에 庵자를 붙여 ‘성보암’이라고들 불렀다). {혼불}은 흡월(吸月)의 소설이었던 것이다. 작가는 우선 근원, 즉 작가 자신의 존재에 대한 그리움을 흡월하였다. “우주 공간에 구체적인 존재로서 생물학적인 '나'를 있게 한 어머니와 아버지를 비롯, 그 어머니의 어머니와 아버지의 아버지, 그리고 그 형제들과 그 보다 더 윗대로 거슬러 올라가는 세보(世譜)의 사다리는 항상 나에게 설레는 상상력을 불러일으켰다”고 작가는 말했다. 저러한 상상력은 추상이나 관념이 아니었으니 그 조상들이 언제, 어디서, 어떤 모습으로, 무엇을 생각하며, 어떤 옷을 어떻게 또 왜 입었고, 어떤 집에서 무엇을 먹었는지, 위와 아래 그리고 좌와 우와는 어떤 관계와 입장이었는지를 궁금해한 것이었다. 이 궁금증이 {혼불}이라는 극사실주의 세밀화를 가능케 한 추진력이었다.

 

[출처] 고 최명희 작가- 언어는 정신의 지문

 

20100729-201705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