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하라, 어두워지기 전에 / 노혜경
이미 당신은 문밖에서 저문다
굳센 어깨가 허물어지고 있다
말하라, 어두워지기 전에
내가 가고 있다고
시인의 말
사랑, 용기, 행동, 이런 일련의 아름다운 말들 속에는 비겁함, 머뭇댐, 뒤돌아서기, 놓아버리기 같은 깊은 틈새가 있다.
틈새를 이해하기 위하여 눈을 감고 들여다본다. 손이 길다란 촉수가 되고 다시 칼이 되어 더듬고 저며본다. 캄캄하다.
벌써 네 번째 시집에 이르는 동안, 내 시는 더욱더 우울해지고 괴로워진다. 어찌할 수가 없어서다.
시절은 불안을 향해 나부끼는 깃발 같아서 어떤 침묵으로도 잠재울 수가 없다. 어떻게 이길까. 어떻게 이길까.
사랑하는 당신, 우리는 살아남을 수 있을까. 살아남아 비루하고 구차한 생의 마지막에 그래도 빛나는 것이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
두 손 가득 너를 뜯어먹은 나의 잔해가 우리는 모두 식인종임을 증명해주는데. 그래도 말하고 싶다. 염치없지만, 혁명하자고.
게처럼 기어서 바다 끝까지 가자고.
시집<말하라, 어두워지기 전에>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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