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나는 흐린 주점에 앉아 있을거다 / 황지우
초경(初經)을 막 시작한 딸아이, 이젠 내가 껴안아줄 수도 없고
생이 끔찍해졌다
딸의 일기(日記)를 이젠 훔쳐볼 수도 없게 되었다
눈빛만 형형한 아프리카 기민들 사진;
"사랑의 빵을 나눕시다"라는 포스터 밑에 전 가족의 성금란을
표시해놓은 아이의 방을 나와 나는
바깥을 거닌다, 바깥
누군가 늘 나를 보고 있다는 생각 때문에
사람들을 피해 다니는 버릇이 언제부터 생겼는지 모르겠다
옷걸이에서 떨어지는 옷처럼
그 자리에서 그만 허물어져버리고 싶은 생,
뚱뚱한 가죽 부대에 담긴 내가, 어색해서, 견딜 수 없다
글쎄, 슬픔처럼 상스러운 것이 또 있을까
그러므로, 어느 날 나는 흐린 주점에 혼자 앉아 있을 것이다
완전히 늙어서 편안해진 가죽 부대를 걸치고
등 뒤로 시끄러운 잡담(雜談)을 담담하게 들어주면서
먼 눈으로 술잔의 수위(水位)만을 아깝게 바라볼 것이다
문제는 그런 아름다운 폐인(廢人)을 내 자신이
견딜 수 있는가, 이리라.
20171108-20190922
'운문과 산문' 카테고리의 다른 글
진이정 <애수의 소야곡> (0) | 2017.12.10 |
---|---|
李箱 <이런시> (0) | 2017.12.04 |
보를레르 <이 세상 밖이라면 어디라도> (0) | 2017.11.05 |
심보선 <갈색 가방이 있던 역> (0) | 2017.10.26 |
안상학 <그 사람은 돌아오고 나는 거기 없었네> (0) | 2017.08.3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