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색 가방이 있던 역*
작업에 몰두하던 소년은
스크린도어 위의 시를 읽을 시간도
달려오는 열차를 피할 시간도 없었네.
갈색 가방 속의 컵라면과
나무젓가락과 스텐수저
나는 절대 이렇게 말할 수 없으리.
“아니, 고작 그게 전부야?”
읽다 만 소설책, 쓰다 만 편지,
접다 만 종이학, 싸다 만 선물은 없었네.
나는 절대 이렇게 말할 수 없으리.
“더 여유가 있었더라면 덜 위험한 일을 택했을지도.”
전지전능한 황금열쇠여,
어느 제복의 주머니에 숨어 있건 당장 모습을 나타내렴.
나는 절대 이렇게 말할 수 없으리.
“이것 봐. 멀쩡하잖아, 결국 자기 잘못이라니까.”
갈가리 찢긴 소년의 졸업장과 계약서가
도시의 온 건물을 화산재처럼 뒤덮네.
나는 절대 이렇게 말할 수 없으리.
“아무렴. 직업엔 귀천이 없지, 없고말고.”
소년이여, 비좁고 차가운 암흑에서 얼른 빠져나오렴.
너의 손은 문이 닫히기 전에도 홀로 적막했으니
나는 절대 이렇게 말할 수 없으리.
“난 그를 향해 최대한 손을 뻗었다고.”
허튼 약속이 빼앗아 달아났던
너의 미래를 다시 찾을 수만 있다면
나는 절대 이렇게 말할 수 없으리.
“아아, 여기엔 이제 머리를 긁적이며 수줍게 웃는 소년은 없다네.”
자, 스크린도어를 뒤로하고 어서 달려가렴.
어머니와 아버지와 동생에게로 쌩쌩 달려가렴.
누군가 제발 큰 소리로 “저런!” 하고 외쳐주세요!
우리가 지옥문을 깨부수고 소년을 와락 끌어안을 수 있도록.
* 이 시는 비스와바 쉼보르스카의 시 「작은 풍선이 있는 정물」을
2016년 5월28일 구의역에서 스크린도어 정비 중 사망한 열아홉 살
소년을 생각하며 고쳐 쓴 것이다.
—시집 『오늘은 잘 모르겠어』(2017)
심보선 / 1970년 서울에서 태어나 서울대학교 사회학과 졸업, 컬럼비아대학교 사회학 박사. 1994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시 「풍경」이 당선되면서 등단. 시집으로 『슬픔이 없는 십오 초』『눈앞에 없는 사람』『오늘은 잘 모르겠어』, 산문집으로 『그을린 예술』이 있다. ‘21세기 전망’ 동인이다.
작은 풍선이 있는 정물
비스와바 쉼보르스카
죽음의 순간에 이르면
추억을 되돌리기보다는
잃어버린 물건들을 되찾고 싶다.
창가와 문 앞에
우산과 여행 가방, 장갑, 외투가 수두룩.
내가 한번 쯤 이렇게 말할 수 있도록.
"아니, 도대체 이게 다 뭐죠?"
이것은 옷핀, 저것은 머리빗.
종이로 만든 장미와 노끈, 주머니칼이 여기저기
내가 한번쯤 이렇게 말할 수 있도록
"뭐, 아쉬운 게 하나도 없네요."
열쇠여, 어디에 숨어 있건 간에
때맞춰 모습을 나타내주렴.
내가 한번쯤 이렇게 말할 수 있도록.
"녹이 슬었네. 이것 좀 봐. 녹이 슬었어."
증명서와 허가증, 설문지와 자격증이
구름처럼 하늘을 뒤덮었으면.
내가 한번쯤 이렇게 말할 수 있도록.
"세상에, 태양이 저물고 있나 보군."
시계여, 강물에서 얼른 헤엄쳐 나오렴.
너를 손목에 차도 괜찮겠지?
내가 한번쯤 이렇게 말할 수 있도록.
"넌 마치 시간을 가리키는 척하지만, 실은 고장 났잖아."
바람이 빼앗아 달아났던
작은 풍선을 다시 찾을 수 있었으면.
내가 한번쯤 이렇게 말할 수 있도록.
"쯧쯧, 여기엔 이제 풍선을 가지고 놀 만한 어린애는 없단다."
자, 열려진 창문으로 어서 날아가렴.
저 넓은 세상으로 훨훨 날아가렴.
누군가 제발 큰 소리로 "저런!" 하고 외쳐주세요!
바야흐로 내가 와락 울음을 터뜨릴 수 있도록.
—비스와바 쉼보르스카 시선집 『끝과 시작』pp. 55-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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