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문과 산문

황지우 <어느 날 나는 흐린 주점에 앉아 있을거다>

미송 2017. 11. 8. 00:16


어느 날 나는 흐린 주점에 앉아 있을거다 / 황지우


초경(初經)을 막 시작한 딸아이, 이젠 내가 껴안아줄 수도 없고

생이 끔찍해졌다

딸의 일기(日記)를 이젠 훔쳐볼 수도 없게 되었다

눈빛만 형형한 아프리카 기민들 사진;

"사랑의 빵을 나눕시다"라는 포스터 밑에 전 가족의 성금란을

표시해놓은 아이의 방을 나와 나는

바깥을 거닌다, 바깥

 

누군가 늘 나를 보고 있다는 생각 때문에

사람들을 피해 다니는 버릇이 언제부터 생겼는지 모르겠다

옷걸이에서 떨어지는 옷처럼

그 자리에서 그만 허물어져버리고 싶은 생,

뚱뚱한 가죽 부대에 담긴 내가, 어색해서, 견딜 수 없다

글쎄, 슬픔처럼 상스러운 것이 또 있을까

 

그러므로, 어느 날 나는 흐린 주점에 혼자 앉아 있을 것이다

완전히 늙어서 편안해진 가죽 부대를 걸치고

등 뒤로 시끄러운 잡담(雜談)을 담담하게 들어주면서

먼 눈으로 술잔의 수위(水位)만을 아깝게 바라볼 것이다

 

문제는 그런 아름다운 폐인(廢人)을 내 자신이

견딜 수 있는가, 이리라.


20171108-201909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