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인 The Other
보르헤스
사건은 1969년 2월 케임브리지에서 일어났다. 그 무렵 나는 이 일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을 작정이었다. 당시 내게는 그 사건으로 인한 공포를 털어버리는 게 급선무였으니까. 하지만 세월이 흘렀다. 이제 내가 그 사건에 대해 이야기한다 해도 사람들은 그것을 하나의 소설 작품으로 읽을 것이고, 언젠가는 나 역시 그렇게 느낄 수 있으리라. 사건이 일어나고 있는 동안 나는 공포에 사로잡혀 있었다- 아니, 일이 일어난 직후 불면의 밤이 계속되던 시기에 공포가 훨씬 심했다-그렇다고 이 사건에 대한 서술이 다른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으리라는 뜻은 아니다.
아침 10시경이었다. 나는 찰스 강이 바라다보이는 한 벤치에 앉아 있었다. 내 오른쪽으로 몇백 미터 떨어진 곳에, 이름을 모르는 높은 빌딩 하나가 서 있었다. 얼음덩어리들이 회색빛 강물 위에 떠다니고 있었다. 필연적으로 그 강은 나로 하여금 시간-헤라클레이토스의 천년 주기-에 대해 생각하게 만들었다. 나는 잠을 잘 잤다. 그래서 오전 강의에 참석한 학생들이 흥미를 갖도록 할 자신이 있었다. 그러나 수업에는 한 명의 학생도 들어오지 않았다.
갑자기 나는 과거 어느 순간에 그 상황을 경험했던 것 같은 느낌-정신분석학자들에 의하면, 탈진 상태와 일치하는-을 받았다. 그때 누군가가 의자의 다른 쪽 끝에 앉았다. 나는 혼자 있고 싶었지만, 무례하게 보이지 않기 위해 즉시 몸을 일으키지는 않았다. 그 낯선 사람은 휘파람을 불기 시작했다. 그것이 바로 그날 아침에 일어났던 수많은 기이한 일 중 첫번째 것이었다. 그가 휘파람으로 불었던 것, 혹은 휘파람으로 불려고 했던 것(나는 음악에 귀를 기울이고 있지 않았다)은 엘리아스 레굴레스의 오래된 밀롱가 민요 '폐허'의 곡조였다. 그 멜로디는 이미 오래 전에 없어져버린 한 정원과, 아주 여러 해 전에 죽은 사촌 알바로 멜리안 라피누르에 대한 기억으로 나를 이끌었다. 그러자 가사가 들려왔다. 그것은 노래 도입부였다. 그 목소리는 알바로의 것은 아니었지만, 매우 비슷했다. 그 사실을 깨닫고 나는 깜짝 놀랐다.
나는 그 사람에게 몸을 돌리며 물었다.
"선생, 선생은 우루과이 분이오, 아르헨티나 분이오?"
"아르헨티나입니다. 하지만 1914년부터 제네바에서 살고 있습니다."
그가 대답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내가 그에게 물었다.
"러시아 정교 교회 맞은편 말라뉴 가 17번지?"
그가 그렇다고 대답했다.
나는 마음을 가다듬고 말했다.
"그렇다면, 당신의 이름은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나또한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지금은 1969년이고, 우린 케임블지 시에 있구요."
"아니오."
그가 약간 넋나간 목소리로 대답했다. 얼마간 시간이 흐른 후 그가 말을 이어갔다.
"저는 여기 제네바, 로달노 거리에서 몇 발짝 떨어지지 않은 벤치에 있어요. 기묘한 일은 우리가 서로 닮았다는 거군요. 하긴 머리가 희끗희끗한 것을 보니 당신이 나이가 더 많겠지만요."
내가 그에게 대답했다.
"내 말이 거짓이 아님을 증명해보이지. 생면부지의 사람이라면 도저히 알지 못할 그런 것들에 대해 말해보겠네. 집안 찬장에는 증조부가 페루에서 가져온 뱀 모양으로 휘감긴 다리가 달리 마떼 은찻잔이 있지. 자네 방 옷장에는 두 줄로 늘어 선 책이 있네. 그것들은 금속활자로 인쇄되어 있고, 각 장마다 작은 글씨의 주석이 삽입된 레인의 '천일야화' 세 권, 키체라의 라틴어 사전, 타키투스의 '게르마니아' 라틴어본과 고든의 영어 번역본, 가르니에르 출판사에서 발행한 '돈키호테', 저자가 직접 사인을 한 리베라 인다르테의 '족보' 칼라일의 '다시 바느질하는 양복장이' , 에미엘의 전기, 그리고 다른 책들 뒤에 숨겨져 있던 발칸 반도 지역의 성 풍습에 관한 종이 표지로 된 책이 있지. 나는 또한 두부르그의 2층에서 있었던 어느 날 저녁의 일을 결코 잊지 못하네."
"두푸르지요."
그가 정정했다.
"그래, 두푸르. 이것을 충분치 않나?"
"아뇨. 그것들로는 아무것도 증명할 수 없어요. 만일 내가 당신을 꿈꾸고 있다면 내가 알고 있는 것에 대해 당신이 아는 것은 아주 자연스러운 일이죠. 따라서 아무리 상세하더라도 좀전의 그런 목록은 전혀 소용없는 거예요."
그의 반박은 옳았다. 나는 그에게 말했다.
"만일 이 아침과 이 만남이 꿈이라면 우리 각자는 서로가 꿈꾸는 바로 그 대상이라고 여겨야 하겠지. 아마 우리는 이미 꿈꾸기를 멈췄는지도, 아니면 여전히 꿈을 꾸고 있는지도 모르지. 어찌됐드 우리의 명백한 의무는 우리가 태어난 이 세상과 눈으로 보고 숨쉬는 것들을 받아들이는 것처럼 꿈 또한 받아들여야 한다는 사실이네."
"만일 꿈이 계속되다면요?"
그가 걱정스러운 듯 물었다.
나는 그를 진정시키고, 나 자신을 진정시키기 위해 어떤 동요도 느끼지 않는 척했다. 내가 그에게 말했다.
"내 꿈은 이미 70년이나 계속되었다네. 어찌됐든 깨어 있는 상태에서 자기 자신과 맞부딪혀 보지 않은 사람은 아무도 없지. 그게 바로 지금 우리에게 일어나고 있는 것이지. 단지 우리가 둘이라는 사실을 제외하고는 말이야. 자네를 기다리고 있는 미래이기도 한 내 과거에 대해 알고 싶지 않나?"
그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조금 정신이 빠져 있다가 말을 이었다.
"어머니는 지금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차르카스와 마이푸가 만나는 곳에 있는 집에서 건강히 잘 지내고 계시지. 아버지는 30여 년 전에 돌아가셨다네. 심장병이었지. 반신불수로 끝이 나셨어. 오른손 위에 얹혀진 왼손은 마치 거인의 손 위에 놓인 아이의 손 같았지. 아버지는 세상을 떠나고 싶어 애를 태우셨지. 그렇지만 불평 같은 것은 하지 않으셨어. 우리들의 할머니 또한 같은 집에서 돌아가셨지. 죽기 며칠 전에 할머니는 우리를 모두 불러놓고 말씀하셨네. '나는 아주 천천히 죽어가는 늙은이야. 누구도 모두가 겪는 이런 평범한 일에 대해 당황할 필요는 없어.' 자네 여동생 로라는 결혼을 해서 자식이 둘이지. 아무튼 집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어떤가?"
"다들 잘 지내요. 아버지는 여전히 반종교적인 농담을 즐기시죠. 어젯밤에는 예수가 마치 가우초(목동)들 같다고 하시더군요. 가우초들은 강요당하는 것을 싫어하고, 예수 또한 우화의 형식을 빌려 설교했기 때문이라나요."
그가 주저하며 말했다.
"당신은 어때요?"
"나로서는 앞으로 자네가 쓸 책이 몇 권이 될지 알 수 없다네. 다만 아주 많으리라는 것은 알고 잇지. 자네는 다른 사람을 가질 수 없는 즐거움을 자네에게 줄 시와 환상적인 성격의 소설을 스게 될걸세. 자네 부친이나 우리 가문의 다른 많은 이들처럼 자네 역시 가르치는 일을 하게 될 테고."
나는 그가 그 책들의 성공 여부를 묻지 않아 다행으로 여겼다. 나는 목소리를 바꾸어 이야기를 계속했다. "역사에 대해 말하자면....... 1차세계대전과 비슷한 또 다른 전쟁이 거의 비슷한 국가들 사이에 일어났다네. 프랑스는 얼마 동안 정복당했었지. 영국과 미국이 히틀러라는 독일의 독재자에 대항해 싸웠는데, 워털루 전쟁의 재판이었지. 1946년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는 우리의 친척과 아주 닮은 또 다른 로사스가 등장했다네. 1955년 마치 로사스 시대에 엔트레 리오스가 그랬듯이 코르도바 지역이 우리를 구했지. 지금은 상황이 좋지가 않아. 러시아가 세계를 집어삼키고 있는 반면, 미국은 민주주의라는 명분 때문에 제국이 되기를 주저하고 있어. 하루하루 지날수록 우리 나라는 점점 더 낙후되고 있지. 점점 더 낙후되어가면서도 점점 더 헛된 자만심만 늘어간다네. 아마 라틴어 대신에 과라니어를 가르치게 된다 해도 내게는 조금도 놀라운 일이 되지 않을 정도야."
나는 그가 내 말을 제대로 듣고 있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불가능한 것에 대한 본질적인 공포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다는 사실이 그를 경악시키고 있는 것 같았다. 비록 나는 자식을 가진 아버지였던 적은 없었지만, 내 살과 피로 만들어진 자식보다 더 친밀하게 느껴지는 그 가련한 청년에게 파도처럼 밀려오는 사랑을 느꼈다. 나는 그가 책을 한 권 움켜쥐고 있는 것을 발견하고, 그에게 무슨 책인지 물었다.
"'사로잡힌 자들', 아니면 내가 생각했던 것처럼, 표트르 도스토예프스키의 '악령들'."
그는 조금도 가식 없는 음성으로 대답했다.
"그것은 내 기억 속에서 희미해져버리고 말았네. 어떤 소설이지?"
그 말을 하자마자 나는 금세 그 질문이 일종의 신성모독이라는 것을 느꼈다.
그가 입을 열었다.
"그 러시아의 대가는 슬라브 민족 정신의 미로를 가장 깊이 파고 들었던 사람이에요."
이러한 웅변적 언사는 그가 완전히 평정을 되찾았다는 것을 증명하는 듯했다.
나는 그에게 그 대가의 책들 가운데 다른 어떤 것을 읽었는지 물었다. 그가 '이중인격'을 포함한 두어 가지를 언급했다. 나는 그에게 그거들을 읽으면서 마치 조셉 콘래드의 경우처럼 작중 인물들간의 구분이 확실히 되는지, 그리고 도스토예프스키의 작품에 관한 본격적인 연구를 할 생각인지 물었다.
"사실 그 정도는 아니에요."
그가 조금 놀라워하며 말했다. 나는 그에게 무엇을 쓰고 있는지 물었고, 그는 '빨간 노래'라는 제목의 시집을 준비 중이라고 대답했다. 그는 시집의 제목을 '빨간 리듬'이라고 정할까도 생각했었다고 말했다.
내가 물었다.
"그래서 안 될 것 있나? 그와 비슷한 선례들도 있잖나. 루벤 다리오의 '파란 시'와 베를렌의 '회색 노래' 같은 것들 말이야."
그는 내 말을 묵살하면서, 자신의 책은 인류의 형제애에 대해 노래하게 되리라고 분명히 말했다. 우리 시대의 시이은 당대의 현실에 등을 돌려서는 안 된다고 그는 말을 이었다. 나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그에게 진실로 모든 사람에게 형제 같은 느낌이 드는지, 예컨대 모든 장의사들, 모든 우체부들, 모든 심해의 잠수부들, 거리의 짝수 번지에 사는 모든 사람들, 모든 실성증 환자들 등등에게 형제애를 느끼느냐고 물었다. 그는 자신의 책에서 형제란 억압받고 소외당한 수많은 민중들을 가리킨다고 대답했다.
나는 그에게 말했다.
"자네가 말하는 억압받고 소외당한 민중들이란 단지 하나의 추상에 지나지 않아. 만일 누군가가 존재한다고 말할 수 있다면, 그것은 오직 개인들만이 존재할 따름이네. '어제의 인간은 오늘의 인가이 아니다'라고 어던 그리스인이 말했지. 제네바 또는 케임브리지의 이 벤치 위에 앉아 있는 우리 두 사람이 바로 그 증거지."
엄중한 역사적 사건을 제외하고는, 기념비적인 사건들은 그 어떤 수식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죽음의 순간에 이르러 사람은 어린 시절의 희미한 기억을 떠올리려고 애를 쓴다. 전투에 들어가기 직전의 병사들은 진흙 또는 자신들의 분대장에 대해 얘기한다. 우리가 처했던 상황은 유일무이한 것이었고, 솔직히 말해서 우리는 그것에 대한 어떠한 준비도 되어 있지 않았다. 우리는 마치 그것이 운명이나 되는 듯 문학에 대해 이야기했다. 나는 내가 그때 평소에 신문기자들을 대하는 정도밖에 말하지 않았나 하는 두려움이 든다. 나의 또 다른 자아는 자신이 새로운 은유를 창조하거나 발견했다고 믿고 있었다. 반면 나는 친근하면서 구체적으로 이끌리는, 우리들의 상상력이 이미 받아들이고 있는 그런 은유들을 신뢰하고 있었다. 인간의 노쇠와 황혼, 꿈과 삶, 시간의 흐름과 물이 바로 그것들이다. 나는 몇 년 후 책으로 나오게 될 이러한 견해를 그에게 내보였다.
그는 내 말을 듣고 있지 않았다. 갑자기 그가 말했다.
"만일 당신이 나였다면, 1918년에 자신이 보르헤스라고 밝힌 한 노신사와의 만남을 잊어버린 사실을 어떻게 설명하시겠습니까?"
나는 이토록 곤란한 질문에 대해서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었다.
"아마 너무도 이상한 일이어서 잊어버리기로 한 모양이지."
그다지 설득력 없는 대답이었다.
그가 조심스럽게 질문 하나를 던졌다.
"요즘 당신의 기억력은 어떤가요?"
나는 이제 스물도 안 된 청년에게 일흔이 넘은 사람이란 시체나 다름없는 존재로 비추어질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나는 그에게 말했다.
"자주 심한 망각에 빠져들곤 하지. 그러나 아직도 찾아내야 할 기억이 있다면 찾아내기는 하지. 나는 고대 영어를 공부하고 있는데, 반에서 골찌를 하는 수준은 아니라네."
우리들의 대화는 꿈 속의 대화라고 보기에는 이미 너무 오래 계속되고 있었다.
불현듯 어떤 생각 하나가 떠올랐다.
"지금 곧 자네가 나를 꿈꾸고 있는 게 아니라는 것을 증명해 보이겠네. 내가 기억하는 한 자네가 읽은 적이 없는 이 시구를 잘 들어보게나."
나는 천천히 그 유명한 시구를 읊조렸다.
"히드라의 세계는 우스꽝스럽게도 천체의 굴 껍질 같은 모체를 가지고 있다."
나는 그가 거의 두려움에 가까운 경외에 사로잡힌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가 빛나는 단어 하나하나를 음미하면서 낮은 목소리로 그 시구를 읊조리기 시작했다.
그가 머뭇거리며 말했다.
"사실이에요. 나는 결코 이와 같은 시구는 쓸 수 없을 거예요."
빅토르 위고가 우리를 하나로 만들어주었다.
지금 기억이 나는데, 좀전의 그는 휘트먼의 짧은 시구 한 편, 그러니까 그 시인이 행복에 넘쳐 바닷가에서 보냈던 어떤 밤의 기억을 읊은 짧은 시구를 음송했었다.
나는 말했다.
"휘트먼이 그 밤을 칭송했다면, 그런 일이 일어나기를 바랐기 때문이었지. 그러나 실제로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네. 만일 그 시를 실제 사건이 아닌 욕망의 표현으로 본다면 그 시는 성공한 것이네."
그가 입을 딱 벌린 채 나를 바라보았다.
"당신은 그를 몰라요! 휘트먼은 거짓말을 못하는 사람이에요."
반세기의 시간이 그저 헛되게 지나가는 것은 아니다. 사람들과 이러저런 책과 다양한 취미들에 관해 대화를 나누는 동안 우리가 서로를 결코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우리는 너무 비슷하면서도 또한 너무 달랐다. 우리는 서로를 속일 수 없었기 때문에 대화가 어려웠다. 우리는 각기 서로의 복사판이었다. 이러한 순간이 오래 지속되기에는 상황이 너무나 비정상적이었다. 뭔가를 충고하거나, 토론하는 것은 소용없는 일이었다. 왜냐하면 불가피하게도 그의 운명은 바로 지금의 내가 되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갑자기 코울리지의 환상이 떠올랐다. 어던 사람이 천국을 여행하는 꿈을 꾸었는데, 그곳에서 꽃 한송이를 받았다. 깨어난 그는 그 꽃을 발견한다. 비슷한 계교가 내 머릿속에 떠올랐다.
"혹시, 돈 좀 가지고 있나?"
그가 대꾸했다.
"네. 20프랑쯤 가지고 있는데요. 오늘밤 시몬 히칠린스키와 크로코딜에서 만나기로 했거든요."
"시몬에게 장차 카루지에 있는 병원에서 일하게 되고, 크게 성공하게 될 거라고 전해주게나. 그건 그렇고, 자네가 가진 돈에서 동전 하나만 주게나."
그가 커다란 세 개의 은화와 몇 개의 동정을 꺼냈다. 그러고는 어리둥절한 채로 5프랑짜리 동전 하나를 내게 건넸다.
나는 값어치는 틀리지만 크기가 모두 같은 무미건조한 미국 지폐 중 하나를 그에게 내밀었다. 그는 탐욕스럽게 그것을 살펴보았다. 그는 언성을 높이며 말했다.
"이럴 수는 없어. 연도가 1964년이라고 되어 있어요. 이 모든 것은 기적이에요."
그리고는 그가 간신히 말했다.
"하지만 기적은 공포를 동반하지요. 예수의 부활을 목격했던 사람들은 모두가 공포에 사로잡혔잖아요."
우리는 조금도 바뀐 게 없구나, 하고 나는 생각했다. 달라지는 것은 항상 학문적 견해들뿐이다. 그가 지폐를 찢어버린 뒤 동전들을 주머니에 담았다. 나는 손에 들려 있는 은화를 강에 내던져 버리기로 했다. 은빛 강물 속으로 사라지는 둥근 모양의 커다란 은판은 내 이야기에 생생한 이미지를 부여해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운은 그렇게 되어주지 않았다. 나는 그에게 만일 초자연적인 일이 두 차례 일어나면 그것은 더 이상 공포스러운 게 아니라고 말했다. 나는 그에게 두 개의 시간과 두 개의 공간 속에 존재하는 이 벤치에서 내일 다시 만날 것을 제안했다.
그는 곧바로 동의하고는, 시계를 보지도 않은 채 시간이 늦었다고 말했다. 우리는 둘 다 거짓말을 하고 있었고, 또한 우리는 그런 상대방을 서로 잘 알고 있었다. 나는 그에게 누군가가 나를 데리러 올 거라고 말했다. 그러자 그가 물었다.
"당신을 데리러 온다구요?"
"그래. 당신도 내 나이에 이르면 거의 시력을 잃게 되지. 눈앞에 노란 빛깔과 그림자들과 빛들이 어른거리게 돼. 하지만 걱정하지 말게나. 점진적인 시력 상실은 비극적이 일이 아니니까. 그것은 마치 천천히 어둑어둑해지는 여름밤과도 같다네."
우리는 악수도 나누지 않은 채 작별했다. 다음날 나는 약속 장소에 가지 않았다. 아마 그도 약속 장소에 나오지 않았을 것이다.
그 만남에 관한 생각은 나의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그러나 나는 아무에게도 그 얘기를 털어놓지 않았다. 이제야 나는 그 까닭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그 만남은 진실이었다. 그는 꿈속에서 만난 나를 쉽사리 잊어버릴 수 있었으리라. 그러나 나는 깨어 있는 상태에서 그를 만나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래서 그 만남이 여전히 나를 괴롭히고 있는 것이리라.
그는 나를 꿈꾸었다. 그러나 그것은 명확하지 않은 꿈이었다. 이제야 나는 이해가 되는데, 그가 꿈꾸었던 것은 달러 지폐에 찍혔던 그 불가능한 날짜였던 것이다.
'운문과 산문' 카테고리의 다른 글
보르헤스<詩學> (0) | 2009.08.02 |
---|---|
유종인<신부님의 뒷담화> (0) | 2009.08.01 |
정연수<나무와 함께 걸어가는 삶> (0) | 2009.07.26 |
김창식<아내는 지금 서울에 있습니다> (0) | 2009.07.22 |
기형도<이 겨울의 어두운 창문> (0) | 2009.07.1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