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게는 낡은 악기가 하나 있다 여섯 개의 줄이 모두 끊어져 나는 오래 전부터 그 기타를 사용하지 않는다 한때 나의 슬픔과 격정들을 오선지 위로 데리고 가 부드러운 음자리로 배열해주던 알 수 없는 일이 있다 가끔씩 어둡고 텅빈 방에 홀로 있을 때 그 키타에서 아름다운 소리가 난다 나는 경악한다 그러나 나의 감각들은 힘센 기억들을 품고 있다 나에게는 낡은 악기가 하나 있는 것이다 그렇다 나는 가끔씩 어둡고 텅 빈 희망속으로 걸어들어간다.
―기형도 ‘먼지투성이의 푸른 종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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