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마라집, 대승으로 개종하다 (p161~181)
보살은 공(空)의 법으로 반야바라밀에 머무름으로써 거룩한 서원으로 장엄된 가르침과 대승의 가르침을 따릅니다. 색에 머무르지 않고 수·상·행·식에도 머무르지 않습니다. 영원하든 영원하지 않든 색에 머무르지 않고, 영원하든 영원하지 않든 수·상·행·식에도 머무르지 않습니다. 즐겁든 괴롭든 색에 머무르지 않고, 즐겁든 괴롭든 수·상·행·식에도 머무르지 않습니다. 청정하든 청정하지 않든 색에 머무르지 않고, 청정하든 청정하지 않든 수·상·행·식에도 머무르지 않습니다. 나(我)라는 것이 있든 나라는 것이 없든 색에 머무르지 않고, 나라는 것이 있든 나라는 것이 없든 수·상·행·식에도 머무르지 않습니다. 성인(聖人)의 맨 처음 단계인 수다원과에도 머무르지 않고, 한 차례 외에 더 이상의 윤회가 없는 사다함과에도 머무르지 않으며, 욕망의 세계에 다시 태어나지 않는 아나함과에도 머무르지 않고, 성문 가운데 최고의 지위인 아라한과에도 머무르지 않으며, 홀로 깨치는 벽지불도에도 머무르지 않고, 부처님의 법에도 머무르지 않습니다. 사리불이여, 보살마하살은 반드시 여래가 모든 대상에 머무르되 머무르는 것도 아니고 머무르지 않는 것도 아닌 것처럼 머물러야 합니다.
(《소품반야바라밀경小品般若波羅蜜經》 권1)
구마라집은 수보리가 보살들을 위해 말한 법, 즉 진리는 무상(無上) 무비(無非) 무등(無等)하다는 것과 나아가 이길 자 없는(無勝者) 지혜라는 것을 체득했다.
“공의 법으로 반야바라밀에 머문다”라는 것은 곧 제일의 지혜가 실상을 비추고, 실상이 공이라는 것이다. 공법(空法)은 생사의 차안을 건너 치안에 이르는 배이다. “수 상 행 식에도 머무르지 않는다”라는 것은 오온(五蘊)에 집착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 모든 감각과 의식이 이르는 물상(物相)과 심상(心相)은 모두 금방 일어났다가 금방 사라지는 것으로 멈출 수도 없고 변하지도 않는다. ‘색(色)은 견고하지 못한 것이고 단단하지도 못하며 볼 수도 없고 거짓되어 진실하지 못한 것입니다. 통(痛, 수受)은 튼튼함이 없고 견고하지도 않은 견고하지 못한 것이고 단단하지도 않으며 거짓되어 진실하지 못한 것이 또한 아지랑이와 같습니다. 행(行)도 또한 견고하지 못한 것이고 단단하지도 않으며 파초와 같아서 알맹이가 없습니다. 식(識)도 견고하지 못한 것이고 단단하지도 않으며 거짓되어 진실하지 못한 것입니다’
(《증일아함경》 권27)
여래는 일체법이 머무르지 않는 것은 일체법이 드러나는 법상(法相)이 환상이고 가상이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일체법의 본질은 공이다. 여래는 머무르지 않는 것이 아니라 유와 무 사이에 머무는 것이다. 세속이 유에 집착하기 때문에 일체법이 진실로 실유(實有)라고 한 것이다. 그러나 일체법의 자성(自性)은 공이고 일체법은 가유(假有)이다. 그 때문에 세계는 세계가 아니고 단지 이름만 세계인 것이다. 부처도 부처가 아니고 단지 이름만 부처인 것이다. 이전에 구마라집이《아뇩달경》이 일체법을 파괴했다고 말한 것은 ‘일체법개공여환(一切法皆空如幻)’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구마라집은 《소품반야바라밀경》을 독송하고 깊이 생각하면서 눈에 드리웠던 장막이 걷히는 듯했고, 홀연히 삼라만상의 실상(實相) 즉 일체는 모두 망상(妄)이고 머무르는 바 없이 머무르는(住無所住) 것임을 간파했다. 이전에는 안근(眼根)에 집착해서 소마와 변론했고, 눈에 보이는 것이 실제라는 속제에 집착해서 색(色)에 머문 것이었다. 여기에 이르자 구마라집은 왜 수리야소마가 스스로를 수리야소마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사람이라고 했는지를 분명히 알게 되었다. ‘소마는 가상이고 나 역시 가상이다. 보살조차 보살이 아니고 이름만 보살인 것이다. 요컨대 일체법은 일체법이 아니고 이름만 일체법인 것이다.’ 구마라집은 크게 깨달았다.
“대승경이 옳다. 나는 예전에 소승을 배웠는데, 이는 마치 사람이 금을 모르고 구리가 든 광석을 금이라고 한 것과 같다.” 이치상으로 매우 만족하여 흥분을 감추지 못한 구마라집은 마음속에서 한 줄기 빛이 비추는 것을 깨달았다.
머지않아 소마가 구마라집에게 중론, 백론, 십이문론 등 대표적인 대승 경전을 전해 주었다. 이 경전들의 철저한 성공설(性空說)과 엄밀한 논리 체계가 구마라집을 깊이 끌어당겼다. 아침저녁으로 독송한 구마라집은 점차 깨달음이 높아갔고 활연히 이해하게 되었다.
서역에 대승을 전파하며 명성을 떨치다 (p184~206)
세존께서 물으셨다.
“그 고향 마을의 여러 비구 중에서 누가 많은 비구의 칭찬을 받는가? 제 자신이 욕심이 적어 만족할 줄 알며 남이 욕심이 적어 만족할 줄 아는 것을 칭송해 말하고, 제 자신이 한가롭게 머물고 또 남이 한가롭게 머무는 것을 칭송해 말하며, 제 자신이 정진하고 남이 정진하는 것을 칭찬해 말하며, 제 자신이 바른 생각을 하고 남이 바른 생각하는 것을 칭찬해 말하며, 제 자신이 일심을 지키고 남이 일심을 지키는 것을 칭찬해 말하며, 제 자신이 지혜롭고 남이 지혜로운 것을 칭찬해 말하며, 제 자신이 번뇌를 다 끊어 없애고 남이 번뇌가 다한 것을 칭찬해 말하며, 제 자신이 마음을 내고 못내 우러르며 성취함을 기뻐하고 남이 마음을 내고 못내 우러르며 성취함을 기뻐하는 것을 칭찬해 말하는 비구가 누구인가?”
― 《중아함경》 <칠법품(七法品)> 칠거경(七車經) 제9
구마라집은 왕신사에서 머물며 불경 암송과 설법을 쉬지 않았다. 왕신사는 백순이 새로 건축한 이름난 사원으로서, 전대(前代) 구자왕의 옛 행궁을 기초로 해서 확대 건설한 사찰이었다. 사찰 한가운데의 불당 장식은 화려하고 정교했으며, 그 안의 불상은 장엄했다. 불당 주변에 있던 건축물에는 각종 법기와 불경이 보존되어 있었다. 불사(佛事)를 할 때 법기를 고르는 경우를 제외하면 평소에는 일부 승려만 찾는 곳이었다.
어느 날 해 질 무렵 독송을 마친 구마라집이 사찰 안에서 산책을 하고 있었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옛 행궁의 입구에 다가선 구마라집이 발걸음을 멈추었다. 잠시 머뭇거리는 듯하더니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문 입구를 통해 들어오는 한줄기 빛이 비치며 행궁 안 기물의 모습이 대략 윤곽을 드러냈다. 구마라집은 꼼짝 않고 그 자리에 섰다. 사방의 기물들이 점점 또렷하게 보이기 시작했다. 그때 갑자기 눈앞이 환해지는 것을 느꼈다. 한 꾸러미는 됨 직한 불경 더미 속에서 뭔가 빛을 발하고 있었다. 이상했다! 불경 가까이로 간 구마라집은 경전 두 권에서 빛이 나는 것을 발견했다. 몸을 숙이고 경전을 끄집어내고는 문 입구로 가서 그것을 햇볕에 비추었다. 역시 이상했다. 경전에서 빛이 나지 않는 것이었다. 질긴 소가죽으로 만든 표지의 경전 두 권이었다. 경전 안쪽은 얇고 촘촘하게 짜인 삼베로 되어 있었고, 범문이 반듯하게 필사되어 있었다. 제일 위에 큼지막한 글자가 뚜렷하게 새겨져 있었다.
放光般若經
‘방광반야경’ 이제껏 본 적이 없는 불경이었다! 구마라집은 너무나 기뻤다. 진귀한 보석을 손에 넣은 것 같았다.
밤새 수유 등불이 승방 안을 밝혔다. 구마라집이 방광반야경을 읽는 모습은 걸신들린 자가 밥을 먹어치우는 것만 같았다.
일체는 허깨비(幻)와 같고 꿈과 같고 메아리와 같고 빛과 같고 그림자와 같고 변화(化)와 같고 물거품(泡)과 같고 거울 속에 비친 모습과 같고 뜨거울 때의 불꽃과 같고 물 위에 비친 달과 같다고 말씀하셨으니, 항상 이 법으로 모든 것을 깨달았다…….
구마라집에 첫 부분을 읽기 시작하자 갑자기 삼베에 쓰인 경문이 모두 사라졌다. 이러한 현상은 마(魔)가 와서 글자를 가리는 것임을 잘 알고 있던 구마라집은 등불을 더욱 밝히고 옷매무새를 단정히 하고 앉아 다시 읽기 시작했다. 경문이 다시 나타났다. 구마라집이 소리 높여 독송했다.
그때 삼천대천국토에 있는 모든 눈먼 자는 볼 수 있게 되고, 귀먹은 자는 들을 수 있게 되고, 벙어리는 능히 말을 할 수 있게 되고, 구부러진 자는 펴지고, 두 다리로 걷지 못하는 자는 수족을 얻고, 미친 자는 정신이 올바르게 되고, 산란스러운 자는 선정을 얻게 되었다. 병이 있는 자는 회복되고, 배고프고 목마른 자는 포만하게 되고, 힘이 없는 자는 힘을 얻게 되고, 늙은 자는 젊어지고, 옷이 없는 자는 옷을 얻게 되었다. 모든 중생이 같은 뜻을 얻어 서로를 아버지 같이 어머니같이 형같이 아우같이 보았다. 십선(十善)을 똑같이 행하고 범사를 꾸밈없이 닦으니 번뇌가 없고 조용하면서 즐거웠다. 비유하면 마치 비구가 삼선(三禪)을 얻음과 같아 중생은 모두 지혜에 이르게 되어 이미 조복하여 자신을 지켜서 중생을 어지럽게 하지 않았다.
마가 와서 다시 글자를 가리면 구마라집은 거듭 등불을 밝히며 독송했다.
보살마하살이 내공 외공 대공 최공 공공 유위공 무위공 지경공 무한공 소유공 자성공 일체제법공 무소리공 무소유공 등 이러한 공(空)의 법을 알려고 한다면 마땅히 반야바라밀을 배워야 한다. 보살마하살이 모든 부처님과 모든 법이 여여함을 깨달으려고 한다면 마땅히 반야바라밀을 배워야 한다. 일체 모든 법의 진제를 알려고 한다면 마땅히 반야바라밀을 배워야 한다. 사리불이여, 보살마하살이 이와 같음이 반야바라밀을 행함이니 마땅히 여기에 머물러야 한다.
갑자기 공중에서 소리가 들렸다. 짧지만 단호한 소리였다.
“그대는 지혜로운 사람이다. 어째서 이 경을 읽는가!”
구마라집이 두려워하지 않고 말했다.
“너는 작은 마귀구나. 어서 사라지지 못할까! 내 마음은 대지와 같아 마음대로 부릴 수 없을 것이다!”
그 후 경문은 다시 사라지지 않았고, 구마라집의 독송 소리는 날이 밝을 때까지 끊이지 않았다.
불경과 역대 고승전에서 깨달은 자와 지혜로운 자가 마귀를 쫓아낸 기이한 일을 접할 수 있다. 이러한 전설이 지닌 실제 의미는 마귀를 쫓아야만 불과를 증득할 수 있다는 것이다. 사실 마귀는 장애의 상징일 뿐이다. 심신을 어지럽게 만들어 수행을 방해하는 것은 모두 그것이 물질이든 정신이든 상관없이 ‘마귀’라고 부를 수 있다. 밤에 구마라집이 방광반야경을 읽으면서 쫓아낸 마귀가 은유하는 것은 소승교의 장애를 제거하고 철저하게 대승에 귀의하고, 그 마음이 대지와 같아 마음대로 부릴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이다.
(중략)
불당 안에는 빈자리가 없었다. 구자 왕, 왕공 대신, 국내외 고승이 정갈한 옷을 차려입고 하나같이 진지한 얼굴로 앉아 있었다. 금사자좌 앞에서 어린 사미승 두 명이 북을 두드렸고, 다른 두 명의 사미승은 동발(銅魃)을 부딪쳤다. 북과 동발 소리가 울리는 사이 구마라집이 대진국에서 보낸 비단으로 만든 요를 밟고 불당 안으로 들어섰다. 구마라집이 금사자좌로 가서 가부좌를 했다. 참석한 사람들 눈에는 구마라집의 고귀한 기운과 대범한 표정과 평온한 눈빛만이 보일 뿐이었다. 구마라집이 말하는 경문은 마치 설산에서 흘러 내려온 물처럼 맑고 투명했다.
부처께서 수보리에게 고했다.
“보살이 이와 같이 반야바라밀을 행할 때 모든 법에 대해서 보는 바(所見)가 없으며, 비록 모든 법을 보지 않아도 또한 두려워하지도 않고 또한 무서워하지도 않고, 후회하지도 않고 또 게으르지도 않다. 왜냐하면 오음을 보지 않고, 안 이 비 설 신 의도 보지 않고, 또한 색 성 향 미 세활(細, 촉觸) 법도 보지 않기 때문이다. 또한 음욕 성냄 어리석음도 보지 않고 또한 십이연도 보지 않고 또한 나도 보지 않고 또한 지견을 쓰는 일도 보지 않고 또한 삼계도 보지 않고 또한 성문 벽지불의 뜻도 보지 않고 또한 보살도 보지 않고 또한 보살법도 보지 않고 또한 부처도 보지 않고 또한 불법도 보지 않고 도(道)도 보지 않고 일체 모든 법을 모두 보지 않는다. 또한 두려워하지도 않고 무서워하지도 않고 겁먹지도 않는다.”
(《방광반야경》 권2, <9,행품>)
불당 안은 조용하고 엄숙했다. 주의를 기울여 자세히 듣는 자들의 끊임없이 변하는 안색을 통해서, 마음을 감동시키는 이 심오한 불경이 만들어 내는 비범한 힘을 확인할 수 있었다.
구마라집이 강경을 마치자 불당 안에서 논의가 벌어졌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유위는 무위를 보지 못하고, 무위는 유위를 보지 못한다. 유위는 무위와 떨어져 있지 않고, 무위는 유위와 떨어져 있지 않다’라는 것은 대체 무슨 뜻입니까?”
“유위와 무위는 서로 상대를 보지 못하고, 유위는 공이기 때문에 무위 역시 공입니다.”
“부처님께서 ‘일체 모든 법을 보지 못한다’고 하셨으니, 당연히 유위를 보지 못하고 무위도 보지 못합니다.”
“유위와 무위 모두 공인데 어째서 유위가 무위와 떨어지지 않고, 무위가 유위와 떨어지지 않는 것입니까?”
“이것이 바로 중도란 것이로구나.”
대승의 ‘성공(性空)’설은 그 불가사의한 지혜, 정교하고 어마어마한 이론 체계를 내세워 수많은 승려와 속인들을 굴복시켰다. 이 같은 심오한 학설의 도리를 상세히 설명하는 구마라집은 사람들 눈에는 더할 바 없는 지혜를 지닌 초인처럼 비쳤다. 이런 천재는 구자의 자랑이었다. 서역 여러 나라의 왕공(王公) 귀족들이 금사자좌 아래에서 엎드려 구마라집이 자신들의 등을 밟고 금사자좌에 오르도록 했다. 그들은 구마라집을 우러러보면서 그를 용수보살의 재림이라고 여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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