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과 신화

수다에 관하여<플루타르코스 윤리론집 중에서>

미송 2022. 1. 17. 18:24

'수다'라고 번역한 그리스어는 이 글에서 '악의 없는 지루한 잡담'이라는 뜻과 '경솔하고 위험한 발성'이라는, 어떤 면에서 보면 두가지 상반된 뜻으로 사용되기 때문에 '수다'가 과연 적절한 번역어인지 의심스러울 때도 있다. 그러나 여기서 '수다'가 진지한 주제가 될 수 있는 것은 이렇게 두가지 상반된 뜻을 담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 글은 먼저 '수다'의 증세를 진단한 다음 이에 대한 처방을 제시하는 방법으로 논의를 펼치고 있는데, 독자는 플루타르코스의 재미있고 진지한 논리전개에 거부감 없이 빠져들 것이다.

 

철학이 수다를 치유하려 한다면 까다롭고 힘든 과제를 떠맡는 셈이다. 수다의 치료약은 말이고, 말은 듣는 사람이 있어야 하는데, 수다쟁이들은 계속 지껄이느라 어느 누구의 말도 듣지 않기 때문이다. 또한 침묵하지 못하는 상태가 듣지 못하는 상태로 이어지는 것, 이것이 바로 수다쟁이들이 걸린 병의 첫 징후이다. 이것은 스스로 자초한 귀머거리 현상인데, 그 희생자들은 아마도 귀는 둘인데 입은 하나밖에 주지 않았다고 자연을 탓할 것이다. 따라서 아둔한 청자(聽者)에 관한 다음과 같은 에우리피데스의 말이 옳다면,

 

현명하지 못한 사람에게 현명한 말을 들이붓는 것은 시루에 물 퍼붓기와 같다.

 

현명하지 못한 사람에게 현명한 말을 들이붓는 것은 밑 빠진 독에 물 붓기와 같다.

 

그러니 남들이 듣지 않을 때 말하고 남들이 말할 때 듣지 않는 사람은 더욱더 그럴 것이다. 그의 수다가 일종의 썰물을 만나 그가 잠시 귀를 기울인다 하더라도, 다음 순간 그의 바로 그 몇 배를 되돌려주기 때문이다.

 

올림피아에는 한 번만 소리쳐도 여러 번 메아리치는 주랑(柱廊)이 있는데, 그래서 그것은 '일곱 목소리의 주랑'이라 불린다. 그러나 수다는 가장 작은 말이 와닿아도 지체 없이 사방으로 되울린다. 아직까지 울린 적 없는 마음의 거문고 줄을 울리며.

 

수다쟁이들은 아마도 귀가 마음과 연결된 것이 아니라 혀와 연결되어 있는 듯하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은 말을 마음에 간직하는데 반해, 수다쟁이들은 말을 흘려보내며 실속 없이 시끄럽기만 한 빈 수레처럼 요란스레 사방으로 돌아다니는 것이다.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이든 다 해보기 위해 수다쟁이에게 다음과 같이 말해봅시다.

 

이봐요, 입 좀 다무시오. 침묵에는 여러 이점이 있다오.

 

그중에서도 으뜸가는 두 가지 이점은 내가 듣는 것과 남이 들어주는 것이다. 그러나 그 중 어느 것도 수다쟁이들에게는 주어지지 않으니, 그들은 자신들이 바라는 것을 참을성이 없어 포기해버리는 것이다. 금전욕, 명예욕, 쾌락의 추구 같은 마음의 다른 병들이라면 만족시킬 가능성이라도 있지만, 수다쟁이들에게 가장 고통스러운 것은 누가 그들의 말을 들어주기를 바라지만 그럴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것이다. 모두들 그를 보면 허둥지둥 달아나기 때문이다. 친구들이 만남의 장소에 모여 앉았거나 주랑을 거닐다가도 수다쟁이가 다가오는 것을 보면 이제 바로 흩어지자는 신호를 주고받는다. 모임에 참가한 사람들이 갑자기 조용해지면, 사람들은 헤르메스가 모임에 참가했다 고 말한다. 그와 마찬가지로 수다쟁이가 만찬회장이나 친구들의 모임에 나타나면 모두들 그에게 이야깃거리를 제공하지 않으려고 입을 다문다. 그리고 누가 말을 걸지않았는데도 그가 입을 열려고 하면,

 

마치 북풍이 바닷가 암벽을 채찍질하면

폭풍을 피해 달아나는 선원들처럼 참석자들은 높은 파도에 들까불려 뱃멀미가 날까 봐 자리에서 일어나 퇴장한다.

 

언젠가 아리스토텔레스도 자꾸만 진부한 이야기를 해대는 수다쟁이에게 시달린 적이 있었다. "놀랍지 않소, 아리스토텔레스?" 라고 말하는 그자에게, "놀라운 것은" 하고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했다. "그게 아니라, 멀쩡하게 걸을 수 있는 사람들이 당신을 참고 견딘다는 것이요." 또 다른 수다쟁이가 장광설을 늘어놓은 뒤 "철학자여, 내 이야기가 지루하지는 않았지요?" 라고 하자, 아리스토텔레스는 "아니오, 나는 당신 이야기를 듣지 않았으니까요" 라고 말했다. 아닌 게 아니라 수다쟁이들이 우리에게 이야기를 떠안기면, 혼은 그들의 말에 귀를 맡기기는 해도, 속으로는 다른 종류의 생각을 펼치며 혼자서 고찰한다. 그래서 수다쟁이는 말을 들어주거나 믿어줄 사람을 구하기가 쉽지 않은 것이다. 성행위가 너무 잦은 씨가 생식 능력이 떨어지듯, 수다쟁이의 말은 불완전하고 결실을 맺지 못하는 법이다.

 

인체 가운데 자연이 혀만큼 안전하게 울타리로 둘러친 부위는 없다. 자연은 혀를 지키기 위해 그 앞에 이를 배치했으니 말이다. 그래서 내부의 이성의 침묵의 고삐를 당기는데도 혀가 복종하지 않거나 자제하지 않으면, 우리는 피를 흘릴 때까지 혀를 깨물어 그 불복종에 제동을 걸 수 있는 것이다. "그 종말은 재앙이다" 라는 에우리피데스의 말은 자물쇠를 채우지 않은 보물창고나 광을 두고 한 말이 아니라, 고삐 풀린 혀를 두고 한 말이다. 문 없는 집이나 끈 없는 주머니는 그 임자에게 아무 쓸모도 없다고 믿으면서 자기 입에는 문도 달지 않고 자물쇠도 채우지 않아, 마치 흑해에서 물이 흘러나오듯 끊임없이 말이 흘러나오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들은 말을 아주 무가치한 것으로 여기는 게 분명하다.

 

p. 17~21

 

 

 

수다와 반대되는 것을 따져보아야 한다. 말하자면 침묵에 대한 찬사를 귀담아듣고, 침묵의 엄숙하고 성스럽고 신비스러운 성격을 마음속에 떠올려야 한다. 또한 간결하게 말하는 사람, 적은 말에 많은 의미를 담을 줄 아는 사람이 말 많은 떠버리보다 더 경탄받고, 더 사랑받고, 더 현명한 사람으로 간주된다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플라톤도 그런 사람들이 하는 말은 촘촘하고 짜임새 있고 압축되어 있어 능숙한 궁수(弓手)같다며 칭찬한다. 루퀴르고스도 동료 시민들이 어려서부터 침묵을 통해 그런 습관을 들이도록 강제하여, 말을 간결하게 하도록 만들었다. 마치 켈트이베레스족이 무쇠를 땅속에 묻어 땅의 불순물을 제거함으로써 강철을 만드는 것처럼 라코니케인의 말도 군더더기가 없으니, 불순물을 모조리 제거함으로써 날카롭고 함축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이 경구와 재치 있는 즉답(卽答)에 능한 것은 평소에 자주 침묵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바로 그런 말들을 수다쟁이에게 제시하여 그런 말들이 얼마나 매력적이고 효과적인지 보여주어야 한다.

 

정확하게 대답하기를 원하는 사람은 묻는 사람의 의도와 말뜻을 정확히 이해하기 위해 일단 기다려야 한다. 그래야만 속담에서처럼 이쪽에서는 양동이를 요구하는데 저쪽에서는 물통이 없다고 거절하는 일이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어쨌거나 말하고 싶은 뜨거운 욕망은 제지되어야 한다. 그래야만 우리 혀 뒤에 오래전부터 쌓여 있던 어떤 압력이 질문에 의해 분출되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인상을 주지 않을 것이다. 소크라테스도 그런 방법으로 갈증을 해소하곤 했다. 그는 운동한 뒤 한 잔 가득 퍼서 버리고 나서야 비로소 음료를 마셨다. 그렇게 그는 혼의 비이성적인 부분으로 하여금 이성이 정해준 때를 기다리는 버릇을 들이게 했던 것이다.

 

질문을 한 발 한 발 뒤따라가며 묻는 사람의 의도에 맞게 콤파스와 자로 대답을 정확하게 재어줌으로써 수다를 경계 안에 가두어야 한다.

 

소크라테스는 허기나 갈증을 느끼지 않는데도 먹거나 마시도록 유혹하는 먹을거리와 마실 거리를 피하라고 권한 바 있다. 마찬가지로 수다쟁이는 가장 마음에 들거나 평소 지나치게 심취하는 화제는 조심해야 하며, 그런 화제에서는 밀려오는 말의 물결에 완강하게 저항해야 한다. 이를테면 군인들은 툭하면 전쟁 이야기를 하고, 호메로스가 소개하는 네스토르는 기회가 닿기만 하면 자신의 무훈(武勳) 이야기를 되풀이하여 늘어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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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하는 것은 무거운 짐을 더는 것과는 다르다. 말은 해도 여전히 남아 있기 때문이다. 사람은 필요한 것이 있어서 자신을 위해 말하거나, 듣는 사람에게 도움을 주려고 말하거나, 소일거리나 그때그때의 활동에 양념을 쳐 서로를 즐겁게 해주기 위해서 말한다. 그러나 말이 말하는 사람에게 쓸모가 없고, 듣는 사람에게 불필요하며, 즐거움도 우아함도 없다면, 왜 말을 하는가? 말도 행동과 마찬가지로 무익하고 무의미할 수 있기에 하는 말이다. 끝으로, 무엇보다도 말한 것을 가끔 후회한 적은 있어도 침묵한 것을 후회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는 시인 시모니데스의 말을 명심해야 한다. 사람들은 고통스럽고 괴롭더라도 다른 일에 주의력을 집중함으로써 딸꾹질과 기침에서도 벗어날 수 있다. 그러나 힙포크라테스에 따르면, 침묵은 목이 마른 것을 막아줄 뿐 아니라 불쾌감과 고통을 유발하지도 않는다.

 

"건강하게 살고 싶으면 평생을 치료가 필요한 사람처럼 살아야 한다" -무소니우스

 

이성의 효력은 약과 같은 것이 아니라 건강식과 같아서, 거기에 익숙해진 사람이라야 건강과 활력을 얻기 때문이네. 한편 충고나 질책은 최고조로 부풀어오른 정념들에는 별반 효력이 없으며, 간질병 환자들을 깨우기는 하되 병을 낫게 하지는 못하는 냄새 자극제보다 더 나을 게 없다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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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물들도 이성이 있는지에 관하여

 

우리가 이전의 삶 대신 지금의 삶을 택한 것이 옳았다는 것을 그대는 곧 깨닫게 될 것이오.

 

우리가 알기에 그대들은 정의, 지혜, 용기 등등에서 자신들이 동물들보다 더 우월하다고 믿고 있기에 하는 말이오. 가장 현명한 인간이여, 대답해주시오. 나는 그대가 키르케에게 퀴클롭스들의 나라에 관해 이야기하는 것을 들었소. 그곳에는 쟁기질하거나 씨 뿌리는 사람이 아무도 없어도 땅이 걸고 기름져서 온갖 곡식이 절로 자란다고 말이오. 그대는 어느 쪽 땅을 더 높이 평가하오? 퀴클롭스들의 나라요, 아니면 염소들이 풀을 뜯고, 농부들이 아무리 애써도 보잘것없는 소출밖에 돌려주지 않는 울퉁불퉁한 이타케 섬이오? 화가 난다고 마음에도 없는 대답은 하지 마시오.

 

세상에서 가장 현명한 인간은 갑을 찬양하고 경탄하면서도 을을 택하고 사랑하는 것을 옳다고 믿는다, 이렇게 말해도 되겠군요. 혼에 관해서도 그대는 같은 대답을 하겠지요. 농토와 마찬가지로 혼의 경우에도, 저절로 자라는 곡식처럼 노력하지 않고도 미덕을 산출하는 혼이 더 나은 혼일 테니까요.

 

그렇다면 그대는 동물들의 혼이 본성상 미덕을 생산하기에 더 알맞고 더 완전하다는 것을 인정하는 셈이오. 동물들의 혼은 남이 지도하거나 지시하지 않아도, 쟁기질하거나 씨 뿌릴 필요가 없는 토양처럼 각각의 종류에 적합한 미덕이 저절로 생겨나 자라게 하니까요.

 

차라리 동물들이 가장 현명한 인간보다 어떤 미덕을 덜 갖고 있느냐 물으시죠. 원하신다면 먼저 용기부터 고찰해 보시오. 그대는 용기를 자랑스럽게 여기고, '대담한 자' 또는 '도시의 파괴자'라고 불려도 부끄러워하지 않으니까요. 하지만 이 고약한 양반아, 그대가 한 짓은 단순하고 고상한 전쟁 수행방법밖에 모르고 기만과 거짓말에 능하지 못한 사람들을 계략과 속임수로 속이는 것이었고. 또한 그대는 그런 교활함에다 교활함과는 결코 양립할 수 없는 미덕이라는 이름을 붙였소.

 

그러나 그대도 보다시피, 동물들은 저들끼리 싸우거나 그대들 인간과 싸울 때 속임수를 쓰거나 재주를 부리지 않고, 공개적인 용기와 진정한 힘으로 자신을 방어하오. 동물들은 법의 부름을 받거나, 기피자라고 소추당할까 두려워 싸우는 것이 아니오. 동물들은 본능적으로 예속되기 싫어하여 끝까지 굽히지 않고 싸우며, 몸이 제압당해도 포기하기는커녕 싸우면서 죽지요. 많은 동물들이 죽을 때 힘과 용기가 신체의 어느 한 부위에 모여 마지막 몸부림을 치면서 살해자에게 계속 저항하다가 불꽃처럼 꺼져버리지요.

 

p. 199

 

 

긴말 할 것 없이, 그대들이 용기에서 동물들을 능가한다고 생각한다면, 어째서 그대들의 시인들은 가장 용감한 전사들을 ‘늑대의 마음을 가진’ ‘사자의 용기를 가진’ ‘투지가 멧돼지 같은’이라 일컫고, 그들 중 어느 누구도 사자를 ‘인간의 용기를 가진’이라 하거나 멧돼지를 ‘투지가 인간 같은’이라 하지 않는 거죠?

 

내 생각에 시인들은 빠른 주자(走者)를 과장법에 의해 ‘바람처럼 날랜’이라 하고, 미남을 ‘신과 같은’이라고 하듯, 훌륭한 인간 전사들을 더 우월한 피조물들에 비기기 때문인 것 같소. 그 이유인 즉 용기의 칼날을 예리하게 해주는 것은 적개심인데, 동물들은 싸울 때 적개심이 희석되지 않지만 그대들 인간은 포도주를 물로 희석하듯 적개심을 타산으로 희석하기에, 위기 때 적개심이 실종되어 좋은 기회를 놓치기 때문이오.

 

실제로 그대들 인간 중에는 싸울 때는 적개심을 품을 것이 아니라, 냉정한 사고를 위해 적개심을 제쳐두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자들도 있소. 안전과 살아남기가 목적이라면 이런 견해도 옳다고 할 수 있겠지요. 그러나 용맹과 자기방어의 관점에서 보면 그것은 수치스러운 태도요. 그대들이 자기 방어를 할 수 있도록 침(針)이나 발톱이나 이빨을 주지 않았다고 자연을 비난하면서도, 그대들의 혼이 타고난 무기를 빼앗거나 못 쓰게 만든다면 분명 자가당착이 아닐까요?

 

 

20110910-20220117 타이핑 채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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